회의나 세미나에서 반대 의견이 많이 나오지 않는 이유도 나도밤나무병의 소치다.
나는 아닌 밤나무로 이의를 제거하기에는 용기가 필요하며, 자칫 그것이 심하면
이단시되고 소외당한다.
'나도밤나무'라는 색다른 이름의 나무가 있다. 키가 훤칠하며 10미터쯤 자라는
데다 노란 꽃이며 붉은 열매가 고와 관상수로 심어지는 큰키나무다. 한데 잎이
밤나무잎과 비슷하다는 것만으로 나도밤나무가 된 것이다. 그 나무가 밤나무이고
싶은 것이 아니라 우리 한국 사람이 그 나무로 하여금 밤나무이게 하고 싶었기에
주어진 이름이다.
나도밤나무뿐 아니라 우리 한국의 초목 이름에는 '나도...'하는 동조성 이름이 한
유형을 이루고 있다. 나도냉이, 나도바람꽃, 나도생강, 나도송이풀, 나도박달,
나도미꾸리... 나도... 그것에 동조하여 그 후광 속에 안주하려는 우리의 심성이 초목
이름에 투영된 것일 게다. 왜 '나는 아닌 밤나무'라고 우겨대어 밤나무보다 키도
크고 제목도 좋고 꽃도 곱고 열매도 아름답다고 개성을 내세우지 못한 것일까. 남과
다른 내나름의 이질성을 배척하고 남과 같은 남나름의 동질성에 가치를 부여해 온
오랜 농경정착 생활의 유산이기도 할 것이다.
또 오랜 사대주의도 나도밤나무병의 명인이랄 수 있을 것이다.
조선 초에 명나라 사신이 와서 수어를 먹어 보고 맛이 좋았던지 이 고기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이에 통사가 '수어'라고 말하자 수어로 오인하고 물 속에 사는
고기가 모두 수어인데 하필 이 고기만을 수어라고 하느냐고 반문했다. 이것이
연유가 되어 아무리 무식할망정 천사(명나라 사신)가 수어라고 한 바에야 그 고기는
수어가 돼야 한다는 사대논리로 수어가 '나도수어'가 돼버린 것이다.
소학교 다니는 아들놈이 손목시계를 사달라고 조른다. 어머니는 중학교에
들어가면 사준다고 달랜다. 하지만 딴 아이들도 다 차고 다닌다면 시계를 찰 수
있는 정당성이 생기고 따라서 동조해 버린다.
선생님이 '알았습니까.' 하고 물으면 알지 못하면서도 '알았습니다.'라고 남들에
동조하는 것이 선생님에 대한 의리가 돼 있고, 식당에 가서 웃사람이 설렁탕을
선택하면 나도, 나도... 설렁탕에 동조하고, 술자리에 가서 웃사람이 웃옷을 벗으면
나도, 나도... 동조하여 벗는다.
회의나 세미나에서 반대 의견이 많이 나오지 않는 이유도 나도밤나무병의 소치다.
나는 아닌 밤나무로 이의를 제기하기에는 용기가 필요하며, 자칫 그것이 심하면
이단시되고 소외당한다. 그래서 한국에 있어 회의는 반대 의견이나 소수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이 아니라 동조하게끔 변질시키는 과정이라 해도 대과가 없다. 그래서
회의장 안에서 하는 회의는 형식적이고 회의장 밖에서 변질시키는 공작이 진짜
회의다. 그렇게 동조시켜 놓고서 만장일치! 짝짝 하고 끝난다.
유태인들의 모임에서는 그것이 국회든 종교 회의든 반상회든간에 '회원 전원
일치의 결의는 무효'라는 원칙이 작동하고 있다. 재판정에서도 배심관들의 유죄표가
무죄표보다 1표가 많았을 경우 그 판결은 무효가 되어 무죄가 된다. 2표 차가 나야
비로소 유죄 판결이 난다. 소수 의견을 이토록 존중한다. 이스라엘 국회에서도 전원
일치의 결의는 무효다.
이런 일이 있었다. 카터 미 대통령이 이스라엘을 방문, 국회에서 연설을 했을 때
짓궂기로 소문난 코헨 여사가 말끝마다 물고 늘어져 국빈을 당황하게 했던 것 같다.
이에 의장 직권으로 코헨 의원의 퇴장을 만장일치로 가결, 퇴장을 명했다. 이에
그녀는 '만장일치의 결의는 무효'라고 버티고 앉아 있었다 한다. 정말 코헨 의원을
퇴장시키고 싶었으면 누군가 사꾸라 표를 던져 퇴장 의안에 반대했어야 했던
것이다. 소수의견과 반대의견을 존중하는 문화적 배경 없이는 이 같은 제도가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발명왕 에디슨의 발명 제1호는 전기투표기록기였다. 일일이 투표함까지
걸어나아가 투표하는 번거로움을 덜고 의석에서 버튼만 누르면 찬반의 수가
나타나는 그런 편리한 기계다. 이걸 쓰면 소수 의견이 박탈당하고 다수 의견이
횡포를 부리기 때문이다.'라고. 이것은 '나는 아닌 밤나무'의 소수 의견을 존중하고
수렴하려는 민주주의 정신의 구현이다. 표결만이 전부라면 다수파의 승리는
자명하고 토론은 의식에 불과하며 졸고 있어도 된다. 민주적인 의논이란 다수파가
소수파의 비판에 시련받는 과정이요, 그 소수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협상 테이블에 여야나 노사가 나도밤나무가 되어 일률적이고 강경일변도로
나간다면 하나마나의 협상이 되고 말 것이다. 양편에서 각기 '나는 아닌 밤나무'의
의견에 비판받고 또 수렴하여 협상 테이블에 퍼스트 카드, 세컨드 카드, 서드
카드...를 들고 나와야만이 협상은 숨통이 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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