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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외 정보/버릇

만족을 모르는 속성

by Healing New 2020. 9. 30.

 자기가 처해 있는 위치에서 상향을 모색하되 그 상향은 자신의 노력과 근면의 
대가로 얻어진 일단계 위쪽의 상향이어야 한다.

  만약에 1백만 원이 생긴다면 많은 한국인은 그 1백만 원으로 할 수 있는 최고의 
호사를 발상한다.
  흥부전에서 흥부가 박을 타자 수십 섬의 쌀이 나왔다. 물론 가난에 쪼들렸던 
감정적 반작용도 작용했겠지만 흥부는 그 수십 섬으로 단번 아이들을 불러낸다. 
10여 명 되는 흥부의 아들들은 철환처럼 이 밥산에 틀어박혀 밥을 먹는데 밥 속에 
묻혀 보이지는 않고 그저 꿈틀거리기만 했다 한다.
  수십 섬의 쌀은 아껴 둔 분량으로 분을 지킬 줄을 모른다. 만약에 1백만 원이 
생긴다면 그것을 자신의 분에 맞게 또 장래를 위하여 살아가는데 뜻을 부여할 수 
있도록 쓴다는 법없이 남들이 선망하는 표피적이고 단세포적인 허영의 가치에다 
자신을 매몰하는데 소비한다. 
  한국인의 소비성향은 대체로 이같은 화살표의 연장 위에 놓여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시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 생각해 보자. 이를테면 흥부가 박을 타서 나온 
쌀이기에 수십 섬씩 대량으로 밥을 지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가정은 타당하다. 
노동이나 노력의 대가가 아닌 횡재이기에 그같은 무턱댄 소비가 가능한 것이다. 
만약 흥부가 관가에서 태를 대신 맞고 얻어온 쌀말이라면 그것을 한꺼번에 밥을 
짓는다는 법은 없을 것이다. 자신이 땀을 흘려 노력한 대가라면 그것이 아무리 큰 
재산이라 해도 낭비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한데 낭비를 한다는 것은 그 낭비하는 
돈이 노력의 대가로 생긴 돈이 아니라는 결과가 된다.
  평당 50만원 짜리 대지 4백 평에 건평 2백 평의 3층 석조 양옥, 시가 3억 원짜리 
집이 있다. 옥외 풀장이 있고 자가용 2대, 독일제 피아노 2대, TV가 4대, 가정부는 
3명이다.
  사실 더 사치할 여분이 없다. 그러기에 이제 해외도피로 그 상향성의 사치는 
비약을 한다.
  벽면에 비밀금고를 만들었다. 그 속에는 세 개의 특수 허리띠가 들어 있었다. 그 
허리띠에는 4만5천 달러의 외화가 숨겨져 있었다. 그 밖에도 그 금고에는 1천만 원 
어치의 금붙이가 들어 있었다. 
  또 자물쇠도 잠그지 않은 경대 서랍에 4백만 원 돈이, 옷장 속에 또 다른 
1천4백만 원의 돈이 각기 굴러 있었다 한다. 그리고 그 집 주인이 외유 끝에 
들어오면서 1천만 원쯤은 항상 집에 있었다고 태연스럽게 말했다 한다.
  지금 나는 아라비아 토후나 미국에 망명한 아프리카의 추장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정부가 지불보증을 하고 3백 50만 달러의 차관을 들여와 철강업을 
시작했던 한국 사람 얘기다.
  그 기업은 부실기업으로 낙인 찍혀 관리가 산업은행으로 넘어갔고 그는 파산 
지경에 살 집마저도 빚으로 넘어갔다 해서 동정까지 샀던 분이다.
  한데 웬일인가, 3억짜리 호화주택에 살면서 집에 굴러다닌 돈만도 그의 기업을 
부실기업으로 낙인 찍히지 않게 할 수 있었던 금액인 10여 억을 훨씬 웃돌았던 
것이다.
  또한 다른 예를 들어보자. 3년 동안 26만 달러를 해외에 빼돌리고 
로스앤젤레스에서 3만 달러짜리 벤츠를 몰며 하루 1천 달러씩 뿌린다. 국내에서는 
1천 5백만 원짜리 오스틴을 몰며 배우, 탤런트 등 백여 명을 엽색해 왔다. 넥타이만 
3백 89개요, 구두가 26켤레, 허리띠만도 56개나 되었다. 또 엽색용 미끼로 핸드백이 
73개, 목걸이가 40개, 팔찌가 20개.... 더 이상 말할 나위가 없겠다.
  이 두 케이스는 작금에 들통난 호화 풍조의 극히 일부분이다. 호화를 극한 끝에 
외화를 도피시켜 해외이주로 그 호화성향을 연장시키는 한국적 사치의 정해진 
루트를 이 두 사람은 걸었을 뿐이다. 이미 그 길을 걸어가 산 사람도 허다하고 
지금도 그 루트를 걷고 있는 사람도 허다하다. 그리고 그 루트를 선망하고 있는 
사람 또한 허다하다.
  이같은 사회 풍조의 근본적인 원인은 자신이 정상적인 노동의 대가로 돈을 벌지 
않았다는 데서 오는 것이다. 곧 정치와 경제 및 사회의 구조적 결함을 이용해서 
횡재를 했으며, 그 횡재에서 번 돈은 노동의 대가로 주어진 돈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흥부가 대신 매를 맞고 얻은 엽전과 박을 타서 나온 천만금과 질이 
다르듯이....
  사람은 자신의 사회적 경제적 또는 문화적 위치에서 맛볼 수 있는 행복의 분량은 
그 위치의 고하를 막론하고 평등하다는 사실은 비단 성현들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진실이다. 곧 손꼽는 재벌이나 구멍가게 주인이나 또 장관이나 5급 공무원이나 그 
위치에서 맛볼 수 있는 행복의 양은 같다. 높을수록 잘 살수록 행복이 많다는 법은 
없는 것이다. 한데 한국인은 지위가 높을수록 재산이 많을수록 비례해서 행복의 
분량이 많은 줄로 안다. 서구처럼 횡적이 아니라 종적인 상향구조 사회의 특성이긴 
하나 한국인의 인생 목표는 항상 비현실적인 상향의 지위요, 상향의 부다. 그리고 
일생 상향만 하다가 만족을 못하고 죽는다. 곧 자기의 현실적 위치에 만족을 하지 
못한다.
  이같은 상향구조의 한국적 의식구조에 횡재가 야합하면 앞서 지적한 부조리가 
기생한다.
  이미 부패해 버린 일부의 반사회적 사치풍조를 탓한다는 것은 나무에서 고기를 
구하는 격이다. 다만 이같은 개연성이 지금 우리 국민들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두렵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나도 횡재할 기회가 있으면 위험을 무릅쓰고 그에 
뛰어들고, 흥부의 박씨를 얻으면 나도 벤츠를 타고 로스엔젤레스를 누비며 배우, 
탤런트를 엽색하겠다는 그런 개연성이 두려운 것이다. 자기가 처해 있는 위치에서 
상향을 모색하되 그 상향은 자신의 노력과 근면의 대가로 얻어진 바로 일단계 
위쪽의 상향이어야 한다. 2단계, 5단계, 10단계의 점핑 상향은 어떤 형식으로든지 
불행으로 보상을 받는 것이 역사의 법칙이었다.
  만약의 1백만 원은 생기질 말아야 한다. 1백만 원이 생기질 말고 1백만 원을 
벌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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