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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외 정보/버릇

한국형 개인주의

by FraisGout 2020. 9. 30.

  남 나름 이상의 개성이나 능력, 정신적 가치란 무의미할 뿐 아니라 이를 발휘하면 
오히려 인심을 잃고 결속을 깨뜨린다 하여 소외당했던 것이다.

  분단 40여 년 동안의 의식구조 변천을 가늠해 보려면 변천 이전의 의식 원형을 
설정하고 그 변천을 있게 한 의식 인자를 설정함으로써 비교해 보지 않으면 그 
변천상이 부각되지 않는다. 그래서 먼저 그 한국인의 의식 원형과 그 원형을 
변천시킨 구미인의 의식 원형을 가려볼 필요를 느끼게 된다.
  유목, 상업 등 이동성 직업을 주된 생업으로 영위해 온 유럽 사람들의 밑뿌리에는 
사람이란 제각기 서로 다른 이해, 의견, 감정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잠재적으로 
대립하고 있다는 인간관이 가로놓여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각자가 책임지는 
개와의 평등한 대립사상인 것이다.
  인간끼리 잠재적으로 대립하고 있기에 말과 이성으로 상호의 이해를 조정하고 
대립의 노골화를 예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구미의 사회생활이 상호 교환되는 계약을 지킨다는 전제 아래 영위되는 
것이라든가, 각종 종교나 사상이 계약사상에서 싹트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결국 구미형 의식구조는 인간 상호의 이질성과 대립을 전제하고 그 전제 위에서 
언어를 매개체로 하여 공동지향을 한다는 데 있다 해도 대과가 없겠다. 이를 
도식화하면 '대립 -> 언어 -> 공동'이 된다. 이같은 도식 방향으로 공동을 
지향하는 정신태도를 '상인형 의식구조'라고 부르기로 하자. 상인들이 물건을 사고 
팔 때 이미 이해의 대립이 전제되어 있고, 이해를 조정하기 위해 교섭, 흥정, 의논 
등 언어를 거쳐 계약에 이르고 일치를 추구한다. 이 과정이야말로 바로 구미형 
민주주의에 있어 의사 결정의 과정, 바로 그것이기도 하다.
  이에 비해 한국형 의식구조의 특징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 것일까. 한국 특유의 
의사 결정방법으로써 곧잘 지적되는 것이 전원 일치의 집단의사 결정방식이다. 각 
관청이나 조직체, 단체, 기업체에서 쓰고 있는 품의제가 바로 그것이요, 정식 회의 
이전에 비공식적인 형태로 관계자끼리 의견을 교환하는 담합제 등이 그것이다. 비록 
이견이 있고 이해관계가 있더라도 웬만하면 그 전원 일치의 집단의사에 거역이나 
대립을 하지 않고 만다.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알았습니까?' 하고 물으면 모르더라도 전원 일치하여 '예....

하고 대답하는 그런 대립 회피의 심리가 지배하고 있다. 이 대립을 회피하는 성향은 
한 마을에 정착해서 서로 긴밀하게 협력하여 농사를 지어 먹고 살아온 농경공동체 
사회의 필연인 것이다.
  이 농경공동체 사회에서는 대립과 이견과 비범이나 개성 같은 것은 공동체 영위의 
저해요소가 된다. 유럽에서는 언어로써 인위적으로 형성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공동체가 우리나라에서는 자연적으로 존재되어 내려왔으며 그같은 상태에서 언어는 
오히려 그 공동을 파괴하고 대립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된다. 따라서 자기 
주장이나 자신의 이익의 명백한 표현은 삼가해야 된다. 그러기에 한국형 의식구조를 
도식화하면 '공동 -> 언어 -> 대립'이라는 발전 방향이 된다. 이 대립을 
두려워하는 정신구조를 이른바 '농민형 의식구조'라 하자.
  정착성 농경공동체 사회에서는 논물을 대고 모를 심고 김을 매며 수확을 하는 
시한성 작업에 있어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다. 촌락 내부에 있어 
대립은 이같은 협력을 불가능하게 한다. 극단적인 경우 대립요소는 그 공동체 
사회에서 소외시켜 버린다. 일단 쇠외당하면 정신적 고통은 두말할 나위가 없고 
생활 그 자체에 위협을 느끼게 된다. 실제로 한국인의 의식구조 가운데 전원일치에 
의한 의사결정이 배후에 도사리고 있음은 바로 이 공동체로부터의 소외에 대한 
하나의 공포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요, 말을 하는 유일한 동물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중의 
정의는 말, 곧 언론 없이 정치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고, 이것이 곧 
구미형 의식구조의 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한데 '공동 -> 언어 -> 대립'의 방정식 위에 형성된 한국형 의식구조에 있어서는 
당연히 언어의 기능이 저해될 수밖에 없다. 언어 대신 뱃심이나 이심전심, 통찰 같은 
한국적인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이 중요시된다. 그리하여 집단 내부에 대립이 
생겼을 때 조정자의 역할은 "자, 나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하면서 대립자 쌍방의 
입을 막는 일이 가장 급선무가 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인 것이다.
  40여 년 전 한국인의 의식구조는 바로 이같은 농민형 퍼스낼러티였었다. 이 
원형에 40여 년 동안 변수 인자로 작용한 것이 바로 상인형 퍼스낼러티이며, 이 
변수의 작동으로 원형이 얼마나 변질되었는가로 40여 년 간의 의식구조의 변천을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농민형 의식구조의 기본은 개를 전체 속에 매몰시킴으로써 전체의 화를 
유지하려는 것인데, 상인형 의식구조의 기본은 개를 전체 속에서 독립시켜 그 
개끼리 화를 유지한다는 데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하겠다.
  곧 개인의식이 지난 40여 년 동안 가장 크게 변화, 변절을 한 것이다. 개인의식, 
자기의식이 지난 40여 년에 비해 분명히 강해지고 발달한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40여 년 전의 개인은 어떤 가문의 나, 어떤 가족의 나 하는 식으로 어떤 공동체에 
예속된 개인으로, 개인의 식은 항상 그가 소속된 공동체의식보다 차선적이요, 가치가 
덜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윤리는 바로 그 개의 공동체로의 희생 과정에서 
선이었다.
  한데 40여 년 간의 근대화 과정에서 그 매몰되고 예속될 대상체인 공동체가 
차례로 붕괴해 내렸던 것이다. 대가족이 핵가족이 되어 무너지고 도 도시화의 
진행으로 촌락 공동체가 무너졌다.
  그리하여 농민형 의식구조를 지탱할 지주와 투사체를 상실하고 만 것이다.
  거기에 상인형 의식구조를 바탕으로 하여 형성된 민주주의 사상의 개인의식 
부양에 가속되어 한국인의 개인의식은 어떤 교정이나 틀이 없이 자유분방하게 
커나갔다.
  구미에 있어 개인주의는 희랍시대 이래 오랜 시행착오 끝에 고된 책임을 수반한 
자기가 하는 일에 전적인 책임을 지는 그런 개인주의요, 또 그 개인이 소속된 
집단에 의해 조정되고 조화되는 그런 개인주의였다.
  한데 40여 년 동안에 속성된 한국인의 개인주의는 책임이 수반되거나 남의 이해에 
조정되고 조화되는 그런 개인주의가 아닌, 너무나 이기적이고 아집적인 개인주의가 
되고 만 것이다.
  의식구조가 개조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수백 년 동안에 이루어진 의식구조가 
개조되려면 여건의 변화만으로는 손쉽게 개조될 수가 없다. 그러기에 농민형 
의식구조인 전체에 매몰, 그 속에서 무책임하려는 집단적 무책임 성향은 엄연히 
살아 있으면서 자기 개인의 이해나 주장만을 내세우는 그런 파행성 개인주의가 
판치게 된 것이다.
  이를테면 독일 사람은 길가로 난 창이 더러워져 있거나 길가로 난 창이 더러워져 
있거나 길가로 난 베란다의 꽃이 시들어가고 있으면 아무 상관없는 행인일지라도 그 
집 초인종을 누르고 주인을 불러내어 유리창을 닦으라고 시키고 꽃에 물을 주라고 
이르고 간다. 왜냐하면 그 길가로 난 창이 더럽고 꽃이 시든다는 것은 그 집 사람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 그 공동체의 공공차원의 일이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한국 사람이 이같은 남의 집 일을 시키고 또 이르고 간다면 머리가 돈 
사람으로 웃고 말거나 언쟁이 붙어 일대 소란을 빚고 말 것이다.
  곧 공동체 속의 개인의 책임이 정립되고 되지 않고의 차이가 이런 점에서 완연히 
드러난다.
  구미적인 개인주의는 공공간에 있어서 그 공공에 모두 책임을 지는 그런 
개인주의이다. 한국의 파행성 개인주의처럼 공공 속에 무책임하고 공공질서를 
지키지 못하는 개인주의는 진정한 개인주의가 아닌 것이다.
  둘째로 대등했을 때 평등한 것이 생명인 상인형 의식구조의 평등의식이 변수로 
작용한 농민형 의식구조의 변동을 들 수 있다.
  구미에 있어 평등은 기회의 평등이지 차이가 심한 개성이나 능력이나 노력 같은 
비기회성의 것까지의 평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한데 지난 40여 년 간 한국에 
도입된 평등의식은 비기회성의 모든 것에까지 평등의 가치를 부여하려 하는 이 역시 
파행성 평등의식이 체질화되고 말았다.
  곧 40여 년 동안 형성된 한국인의 평등의식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같은 
평등의식이다. 희랍의 대도인 프로크루스테스 사람을 잡아오면 자신의 침대에 묶어 
놓고 그 침대보다 크면 다리를 잘라 버리고 그 침대보다 작으면 억지로 잡아늘려 그 
침대 크기에 맞추었다. 곧 모든 사람이 자기 침대 크기로 평등해야만 했던 것이다.
  키가 1미터 남짓한 난쟁이와 2미터 남짓한 키다리를 보고 당신들의 키는 남 
나름의 보통키라고 말한다면 사람 놀린다고 분노를 할 것이다. 곧 사람은 
천차만별로 난쟁이도 있고 키다리도 있으며 뚱보도 있고 홀쭉이도 있다. 수학은 잘 
하지만 그림은 형편 없기도 하고, 음악은 '수'인데 산수는 '가', 재치는 있는데 
게으른 자, 창조성은 결여되어 있는데 노력형, 신뢰성은 있는데 판단력이 결여된 자 
등 천차만별인 것이다.
  그런데 이같은 차등을 두어서는 안 된다 하여 성적을 모두 평균해서 '우'로 주려는 
그런 이상한 평등의식이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학교에 우열반을 두려고 했을 때 벌떼처럼 반발이 일어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진정한 의미의 평등의식은 그 장점과 단점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평가함으로써 그 
인간을 인간으로 존중하는 의식이다.
  모든 사람을 남 나름으로 취급, 그 능력이나 개성, 성차를 적극적으로 평가 
식별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 얼른 보아 인간적인 태도인 것이다.
  그것은 마치 만원전차 속에서 노인을, 도 횡단보도에서 맹인을 여느 사람 
나름으로 취급하는 가혹함과 같은 것이다. 미국에서는 지금 직종이 20여만 종으로 
분류되고 있으며, 철강업만도 무려 3만 8천 종에 이른다고 한다.
  산업화가 진행됨에 따라 직종의 분화나 새로운 직종이 생겨날수록 인간에게 
새로운 능력을 요구하고 이제까지 숨겨져 있던 또는 쓸모가 없다 하여 무시되어 온 
능력에 각광이 비치곤 한다.
  실로 천차만별의 사람들이 그 천차만별성에 있어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또 
추구받는 개성의 그지없는 개화가 곧 현대의 가장 현대다운 요소인 것이다.
  그것을 그릇된 평등의식으로 획일화하여 개성이나 재능이나 취미를 무시하고 
남들처럼 너도 나도 법과에 보내는 식이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곧 40여 년 동안에 변천된 한국인의 평등의식은 농민형 의식구조인 획일적인 남 
나름주의가 적지 아니 배합되어 있는 그런 평등의식이랄 수 있다. 
  농경공동체 사회에 있어 인간의 개성화란 악덕이었다.
  왜냐하면 대자연이라는 강적을 상대로 사람끼리 일치단결하여 노동력을 마을 
단위, 가족 단위로 조직적으로 대지에 투입한다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러하기 위해서는 개개인은 이목구비와 수족에 제대로 박힌 오체구족의 
육체 노동력의 소유자, 곧 남 나름이어야 한다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었던 
것이다.
  남 나름 이상의 개성이나 능력, 정신적 가치란 무의미할 뿐 아니라 이를 발휘하면 
오히려 인심을 잃고 결속을 깨뜨린다 하여 소외당했던 것이다.
  이 남 나름의 획일주의가 서양의 개성적 평등의식과 야합하여 '남 나름 
평등'이라는 변태의 의식구조를 형성해 놓고 만 것이다.
  프랑스의 성적표를 보면 과학의 우등생, 미술의 우등생, 봉사의 우등생, 친절의 
우등생, 리더십의 우등생, 엘레강스의 우등생 등 그 아이의 개성과 능력을 발견, 
그것을 조장하는 방향으로 성적을 평가한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에서는 그 모두를 
평균해 낸 성적이 우수해야 우등상을 준다. 곧 무개성의 획일주의이다.
  밥상도 그랬다. 서양 음식은 일품 요리로 시간 전개형으로 나오는데 한국 음식은 
먹든 안 먹든 이것저것 여관 밥상식으로 고루 갖추어 공간 전개형으로 획일화하여 
갖다 안긴다.
  개성무시의 획일주의가 이 평등의식을 잠식, 이상한 평등의식을 형성해 놓고 
말았다.
  구미 선진국에서는 수세기에 걸친 개인간의 철저한 차등으로써 평등한 입장에서의 
가혹한 경쟁을 통해 인간공존의 논리와 새로운 가치를 탄생해 냈던 것이다.
  지난 40여 년 간에 변천된 의식구조 가운데 개인의식과 평등의식의 변천을 더듬어 
봤는데 이같은 의식구조의 외인적인 변용은 그 장단점을 가려 발전적으로 교정하는 
시기가 빠를수록 좋은 것이며 바로 오늘날이 그것에 손대야 할 바로 그 중요한 
시기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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