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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외 정보/버릇

공공적 미성년

by FraisGout 2020. 9. 30.

  집안에서는 그토록 인간적으로 성숙하고 원숙했던 이 한국인들이 공공성 속에 
노출되자마자 길잃은 고아처럼 불안하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공공지대는 이방이며 
낯이 설었다.

  인간이란 낱말을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일이 있다. 곧 주체인 사람은 어떤 
객체와의 사이로 인간일 수 있다는 말이다. '나'란 사람은 이성과의 사이, 가족과의 
사이, 씨족과의 사이, 공동체와의 사이, 나라와의 사이 등 많은 객체와의 사이로 
파악되고 존립할 수가 있다.
  사람이나 민족에 따라서 어떤 객체와의 사이가 다른 객체와의 사이보다 한결 
소중하고 덜하고 한다. 가령 아버지와의 사이를 나라와의 사이보다 수백 배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있기도 하고 여자와의 사이, 아버지와의 사이보다 공동체와의 사이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있기도 하다. 그렇듯이 어떤 민족의 풍토적, 체질적, 문화적 
여건 때문에 가족과의 사이가 나라와의 사이보다 더 소중한 민족이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가 속하고 있는 한민족이 가장 소중한 사이의 객체가 무엇이며 
그 소중함의 비중이 어느 만큼인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이야말로 한국인을 알고 
그 가치관을 알며 그 문화를 알고 역사를 아는 가장 핵심적 관건이 되기 때문이다. 
  서양 문화의 원천인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폴리스(도시국가)가 가장 소중했다. 
항상 해적이나 외침 앞에 노출되어 있었기로 그들의 존망이 그들 '폴리스'의 존망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막에 사는 사람들은 가족보다도 부족이 한결 소중했다. 
유목생활은 가족 단위로 옮겨다니는 것이 아니라 부족 단위로 옮겨다니기 때문이다. 
가족이란 규모로는 가혹한 사막적 자연이나 침략자를 당해 낼 재간이 없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그토록 유태인이라는 부족에 집착을 하고 집념을 갖는 것도 
그들이 사막에 살아온 유목민이기 때문이다.
  한말 강화의 광성포대에서 의적을 막던 한국의 병사들은 미군 해병대의 공격에 
전사했거나 죽지 못한 자는 흐르는 한강물에 하나 빠짐없이 투신하러 갈 만한 
기력이 없는 부상자였다고 당시 미국측이 보고서에 지적되고 있다.
  또한 이 보고서는 포로들을 한국군 측에 조건없이 송환할 테니 데려가라고 
통고했으나 한국측에서는 "이미 그 포로들은 당신의 손아귀에 있으니 죽이든 말든 
당신네들이 할 일이지 우리는 알 바가 아니다."
  양이의 포로가 되었다는 사실이 그 인간 자체에 죽음보다 강한 치욕을 주거나 
국가의 일원으로써 국가에 치욕을 주었거나 그 사실이 가족이나 가문의 명예에 
치욕적 요소가 되거나 하는 세 요인 가운데 하나이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자명해진다. 그의 가족이나 가문의 명예를 더럽히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한 
것이었다.
  이 확고한 전통적 가치관은 집을 경계로 한 그 안과 밖의 구분을 엄연하게 
하였다. 곧 집 밖의 어느 세상은 '밖'이고 '남'이며, 대신 집 안에 있어서의 개인은 
소멸된다.
  처는 '안사람'이요, '아내'이며, '댁'이다. 아버지는 개인이 소멸된 우리 아버지요, 
집은 '우리 집'이다. 나의 아버지, 나의 집이라고 부르는 서양의 개념과 판이하다.
  곧 서양에서는 가족 개념보다 개인 개념이 강한데 비해 한국에서는 개인 개념은 
가족 개념 속에 소멸돼 버린다.
  한국인의 우리 것이라는 소유 관념은 집 안에 있는 것에 국한되는데, 서양의 우리 
것은 사회에 있는 모든 것이 된다.
  한국인에게 있어 집 밖에 있는 것도 내 것도 아닌 남의 것이며 남의 것인 이상 
파손돼도 없어져도 아랑곳없다. 서양인에게 있어서 공원에 핀 한 송이 꽃은 집안에 
핀 꽃과 같은 뜻을 갖는데, 한국인에게 있어서 공원에 핀 꽃은 남의 꽃이다. 
그러기에 그것이 꺾어져도 우리 집 울 안에 핀 꽃이 꺾어진 것처럼 애석해 하지 
않는다.
  한국인이 양옥을 짓고서 양식 구조의 집에 살긴 하지만 담과 대문만은 한국인의 
의식구조의 표현대로 높게 쌓고 또 빗장을 질러 놓는다.
  비록 침대에서 자고 서양식 식사를 한다 해도 그들의 의식구조는 한국적이다. 
이를테면 자기 자식이 부정한 일을 저지르면 온갖 정성을 다해 관심을 쏟고 처치를 
하는데 공공의 일인 정치가의 부정이나 경제적 부정에 대해서는 그 백분의 일의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 것은 모두가 집 밖의 일이기 때문이다.
  집 안에서는 그토록 인간적으로 성숙하고 원숙했던 이 한국인들이 공공성 속에 
노출되자마자 길잃은 고아처럼 불안하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공공지대는 이방이며 
낯이 설었다. 곧 집단에 허약하기 그지없으며 집단 생활에 훈련이 덜 되어 마치 
어린이 다루듯 해야 한다.
  공원의 잔디밭에는 아무런 팻말이 없어도 들어가지 않게 되어 있는데도 한국의 
공원에는 '들어가지 마시오'라는 팻말이 꽂혀 있다. '나무를 꺾지 마시오', '소변을 
보지 마시오', '쓰레기를 버리지 마시오', '좌측통행이오', '우물을 깨끗이 씁시다' 
등등 현기가 날 지경으로 과보호를 받고 있다. 시내버스를 타면 '운전사와 얘기하지 
맙시다', '금연', '화기지입금지', '거스름 돈을 준비해 주시오',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합시다', '개문발차 엄금' 등등 모든 승객을 백치에 가까운 어린이 취급을 하고 
있다.
  구미의 버스에는 이와 같은 극히 당연한 표어가 붙어 있는 법은 없다.
  한국인은 공공적 미성년인 것이다.
  한국 사람을 일본 사람과 비겨 말할 때 개인 개인으로 보면 한결 훌륭한데 몇 
사람씩을 모아 놓고 보면 한편 못하다고 한다. 이 견해는 진실이며 곧 한국인의 
집단 공공성에의 취약점을 직시하고 있다. 단결이 안 되고 분열이 심한 한민족의 
결점도 이 집단 공공성에의 훈련이 부족한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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