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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외 정보/버릇

강한 주제의식

by FraisGout 2020. 9. 30.

  주제는 한국인을 도덕적으로 성숙시켜 법없이도 살아올 수 있게끔 한 좋은 면도 
있지만 이처럼 창의력 있는 개체의 균등화 때문에 진보적인 면을 무디게 해온 
부정적인 면도 없지 않았던 것이다.

  여자가 담배를 피우고 있으면 '여자인 주제에....' 하며 주제넘거나 주제없는 
행위로 단정한다. 사내가 별나게 장발인 경우에도 '사내인 주제에....' 한다. 여자는 
여자로서 지켜야 할 어떤 사회적 분이 있으며, 남자는 남자로서 지켜야 할 어떤 
사회적 분이 있다. 비단 남자의 분, 여자의 분뿐만 아니라 사회적 인간이며 그 
사회에 처한 신분역할, 곧 분이 있다. 선생이면 선생으로서의 분, 공무원이면 
공무원으로서의 분이 있다. 곧 그 사람이 처한 사회적 역할에서 생성된 그 당위의 
행동거지를 '주제'라고 한다. 그 주제에 맞는 행동거지가 아닐 때 주제꼴이 
사납다느니, 주제넘는다고 한다.
  한국인의 의식구조에서 이 '주제'가 차지하는 자기 주제는 유럽 사람의 그것에 
비해 유별나게 강하여 이 주제에 맞게 사고하고 행동하지 않을 때 그가 소속된 어떤 
규모의 집단에서도 소외당하기에 이 주제는 한국인의 한 존재 조건이 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철학자 G.H 미드가 내세운 사회 심리학의 한 개념으로 '역할'이 있다. 
사람은 자신이 처해 있는 사회적 지위에 알맞게 행동하게끔 기대되고 또 요구받는데 
이 기대와 요구에 부응하여 행하는 일정의 행동방식을 '역할'이라 했다. 바로 그 
역할의 한국적 표현이 '주제'란 것이다.
  이처럼 사람에게는 동시 가림없이 이같은 역할 기대가 있으나 그 역할의 규제력이 
강하고 약하고의 차이가 있다. 한국 사람의 규제력이 메가톤 급이라면 서양 사람의 
그것은 킬로톤 급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기에 서양 사람과 만났을 때 그 사람들의 
언행이 적지 아니 주제넘게 보이는 이유가 이에 있는 것이다.
  한말 우리나라 문물제도의 개화를 위해 조정에서는 조영하를 청나라에 보내어 
총대신 이홍장에게 제도개혁을 맡을 인물 하나를 추천해 달라고 의뢰했었다. 이때 
추천된 인물이 당시 천진에 와 살고 있던 독일사람 묄렌도르프였다.
  묄렌도르프가 한국으로 떠날 때 이홍장은 송별연을 베풀어 주고 그 자리에서 한국 
사람은 주제에 대해 대단한 분별이 있으며 그 분별을 지키지 않으면 한국에서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할 뿐더러 살아갈 수도 없다고 유별나게 심한 한국인의 
주제의식을 환기시켰던 것이다.
  그리고서 조선 왕 앞에 가면 무릎을 꿇고 큰절을 하겠느냐고 물었다. 이에 
묄렌도르프는 총독에게도 아직 그런 공경례를 하지 않았으니 왕 앞에서도 하지 
않겠다고 하자 이홍장은 그와 같은 유럽 사람의 사고방식으로는 하지 않겠다고 하자 
이홍장은 그와 같은 유럽 사람의 사고방식으로는 조선에 가서 맡은 일을 해내기 
어렵다고 주제를 지킬 것을 강조하였고, 묄렌도르프도 그가 처한 어떤 위치가 
그에게 요구하는 모든 주제를 지킬 맘을 단단히 하고 한국 땅에 건너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처음 고종을 배알할 때 극도의 근시안인데도 안경을 벗고 들어간다. 
왜냐하면 신하로서 임금 앞에 안경을 쓰는 것은 주제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는 신하가 임금에게 하는 통례대로 세 번 허리를 굽혀 머리가 땅에 닿도록 
큰절을 하고 라틴 어로 발음을 적어 익힌 한국말로 다음과 같이 아뢰었던 것이다.
  "신이 귀국에 와 불러보시니 감축하와 갈력 전심하올 것이니 군주께서 항신을 
신임하시기를 바랍니다."
  역시 한말에 이하영이 미국 대리공사로 가 있을 때 워싱턴 사교계의 무도회에 
자주 초청을 받았다고 한다. 활달하고 적응성이 강했던 이하영은 한복에 갓쓰고 
미투리를 신은 채 이 무도회에 가서 춤을 곧잘 추곤 했던 것이다. 이 말이 조정에 
들어왔을 때 각료회의에서 크게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한 나라의 사신은 국왕을 
대리하는 것인데 어찌 주제넘게 그런 야한 행동을 할 수 있느냐고.... 그가 본국에 
송환된 이유 가운데는 이 주제를 지키지 못한 것이 큰 몫을 차지했다고 한다.
  지금도 학교 선생이 술집에서 유행가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면 그 선생은 그 
사회에서 배겨나지 못하게 되어 있다. 미국이나 유럽 같으면 전혀 그것이 주제에 
걸리지 않는데도 한국에서는 민감한 이유는 바로 한국인의 주제의식이 별나게 강한 
때문이다.
  부인네들이 사회 일선에 나와 소비자 보호운동을 하고 교통질서 캠페인을 하면 그 
운동 자체에는 십분 공감을 하면서도 어딘지 아련한 저항감을 느끼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부녀자들에 대한 전통적 역할 기대는 현모양처로서 집 안에 있는 것이기에 
집 밖에 나와 남성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주제에 넘는다고 생각하게 된다. 물론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는 것에 아련히 저항감을 갖는 것도 주제의식이 강하기 
때문이다.
  심리학을 연구하는 학자가 사회학 분야에 침범해 들면 사회학 분야의 학자들은 
주제넘는다고 반감을 갖는다. 따지고 보면 요즈음 학문은 학문의 경계를 넘어 
횡적인 연구를 필요로 하고 있다. 한데 이같은 주제의식이 강한 한국의 학계에서는 
횡적인 연구를 가급적 기피하게 되고, 따라서 진취적이질 못하게 된다.
  이같은 주제의식이 한국인에게 강하게 체질화된 이유로서 우리 선조들이 대대로 
한마을에서 정착해 살았던 정착 촌락공동체였음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정착사회는 
그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해 마치 피라미드를 이루고 있고 돌 하나하나처럼 분과 
역할을 정해 놓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 분과 기대하는 역할을 넘어서면 바로 그 피라미드 공동체가 흔들리게 된다. 
그러하기에 그 분의 한계를 엄하게 규제하고 다스릴 필요가 생긴다.
  분에 넘게 잘나도 안 되고, 희망이 별나게 커도 안 되며, 분에 넘게 모험을 해도, 
창의력을 부려도 거부당한다. 높이 솟은 말뚝은 쳐서 고르게 하고 높이 올라가고자 
하는 발을 끌어 그 분의 틀 안에 고정시킨다.
  이같이 하여 모든 사람은 분의 틀 안에 넣어 등가치화한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한국에 있어서 인간됨의 가치는 대가족이나 촌락이나 계급사회가 요구하고 기대하는 
역할수행의 인격을 형성하는 일이며 그 같은 인격형성을 위해 그 많은 주제를 
정하여 그 주제를 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유럽처럼 스스로 독립해서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인격 형성과는 
대조적이랄 것이다. 그래서 자율, 독립, 개인사회인 유럽에서는 남이나 집단과의 
함수관계랄 주제가 별반 발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 주제의식이 강하기 때문에 그 주제를 넘는 개인적인 창의나 모험이 악덕시되어 
좌절되었고 그것이 우리나라의 낙후 요인 가운데 하나가 됐다고 본다. 지금도 많은 
한국인이 이 주제의식의 압박으로 무슨 일을 하려하다가도 포기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주제는 한국인을 도덕적으로 성숙시켜 법 없이도 살아올 수 있게끔 한 좋은 면도 
있지만 이처럼 창의력 있는 개체의 균등화 때문에 진보적인 면을 무디게 해온 
부정적인 면도 없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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