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자연(또는 신)이 장구한 시간에 걸쳐 인류를 섭리해 온 올바른
기본원리를 찾아보기 위해선 수천만 년의 인류의 발자취를 우선 더듬어볼
수밖에 없다.
현대인은 역사 이래 가장 높은 학력을 자부하고 있으면서도, 아득한
인류사를 통하여 조명해 보면 현대인이 자랑하는 지식이란 부분적이고
기술우상주의적이며, 본능추구적인 학문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인간들에게 우월감을 가져다 준 과학기술이란, 우주 대자연의 발자취가
가르쳐주는 인류의 올바른 삶을 이해하고 몸으로 체험하는 본질적이고도
거시적인 지식이 못 된다.
현대의 과학지식은 지구상의 수십만 종의 생물 중 오직 사람의 즐거움을
발산할 수 있는 대상을 발명하고, 심심풀이의 감각을 변질시키고, 귀의
청각을 멀게 하고, 몸의 촉각을 타락 시키는 수단으로 지식의 많은 부분이
이용되고 있다.
즐거움의 가치를 지향해 질주하는 인류사의 방향의 속도를 우주적인
거시적 시각에 입각하여 올바른 방향으로의 전환을 위해서는,
시간적으로는 수천만 년의 인류의 삶을 대강이라도 이해해야 되고,
공간적으로는 미세한 원자의 세계로부터 대 우주에 이르는 대자연과
인간환경과의 인과에 대해서도 마음깊은 곳에서부터 깨달음이 있어야,
대자연의 나침반의 눈금을 읽고 인류가 제자리에 서서 올바른 방항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과학기술이 발달하여 갈수록 지식은 전문화되어 학문 사이의 벽은
두터워지고 있다. 그리하여 지식의 세분화의 가속은 허상의 지식을 무조건
따르거나 부분적인 전문기술에 빠져 균형적이고도 본질적인 지식엔
무관심하다. 그저 경쟁과 즐거움의 대상과 감각적인 자극만 추구한다.
특히 도시라는 새장 속에서 한정된 경험과 암기적이고 돈벌이 목적의
기계적인 교육으로 인하여 편견과 단색의 두터운 근시안을 양산하며
향락과 승리제일주의 가치관의 문명인을 더욱 양산하며 배출하는 곳이
바로 현대의 일부교육이다.
본질적이고도 입체적인 시각의 세계관으로의 변화를 위해 여기서는
까마득한 우주적인 시간에 걸쳐 인류의 삶을 간략히 살펴보고 끝을 알 수
없이 광대하고 심오한 우주 대자연 속에서 작은 한 개의 세포적인 존재인
인간이 자연과의 작용에 관해서는 다른 장에서 부분적으로 생각해보겠다.
(1) 인류는 생리학적으로나 해부학적으로 곡채식 동물로 창조되었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인류의 조상인 원시인류의 출현을 기원전 250만
년경으로 잡고 있고, 고생인류의 존재는 대개 250만 년 이전에서 6천만
년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그러나 약 7천만 년 전부터 나타난 것으로
추정되는 학자도 있다(최몽룡 (인류문화의 발생과 전개) 동성사, 1985. p.
12).
창세기에는 아담과 하와가 몸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식물로 생식을
하면서 행복하게 살았던 장면을 아주 짧게 나타 내주고 있다.
기원전 8세기경 그리스의 역사학자 헤시모도스는 태초의 인류의 삶을
이렇게 쓰고 있다.
"... 그들은 아무 걱정도 없이 신들처럼 생활하였으며, 슬픔을 몰랐으며,
무참히 늙어가는 일도 없었다. ... 죽음은 마치 잠자는 것과 같았다. ...
기름진 땅에서는 농작물이 저절로 풍성하게 익어갔다. 그들은 이 땅에서
풍요한 산물에 에워싸여 평화롭게 ... 충실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제레미 리프킨, (엔트로피의 법칙) 최현 역, 범우사 1983. p. 46).
인류학을 보더라도 고생인류는 아프리카나 아열대지방이나 따뜻한
해안지방에서 풍부한 야생의 곡식과 채소와 과일을 채집하면서 평화롭게
살았다. 인구가 많아져 채집할 곡식이 부족해지자, 인류의 거주지역이
넓어져 갔다. 사람을 구경하기 어려울 정도로 인구가 희소하고 사람이
귀하므로 그들은 서로 그리워하고 사랑했다.
학자에 따라서 원시인은 무지하고 비도덕적이고 빈곤한 생활을 한 것으로
잘못 알고 있기도 하다. 근세 이후 인구의 포화상태로 인하여 죄악에
물들어 있던 일부 원시인을 피상적으로 연구한 편견이었음이 밝혀지고
있다. 인구밀도와 자연과의 함수 관계에 의하여 변천하는 인간성의 법칙을
모르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구석기시대의 사냥꾼은 신석기시대
농부는 현대의 직장인보다 더 행복했을 것이다"라고 그의 저서
(대화)(홍사중 역, 삼성문화문고 1972. p. 80)에서 말하고 있다.
태산 준령의 오지 산촌에는 불량 청소년이 없고 인심이 순박하다. 그런
곳에서 한달 이상을 지내보면 고독감, 그리움, 한가함, 사랑스러움, 슬픔
같은 어진 정서가 샘솟는다. 평소에 생각도 나지 않던 친척과 친구도
만나보고 싶어진다. 그러나 그곳에서 30여리 떨어진 거리의 집단부락에는
불량한 건달 청소년이 생겨나고, 인심이 각박해진다.
삼남지방에서 보리고개가 심했던 가장 큰 원인은 인구의 과잉이었다. 한
개 군에 한 집씩 있었다면 보리고개가 있을 수 있었겠는가. 산과 들에
자생했던 과일과 야채와 곡식과 염소, 양, 닭이나 물고기만 해도 먹고
남는다.
그런데 학자들 중에는 우리 선조들이 몇 천 년 내지 몇 만 년 동안
가난한 보리고개에 시달려오다가 새마을운동 이후에야 비로소 빈곤을
해결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학자들이 있다.
철에 따라 이동하며 일정한 지역에서 살던 고생인류들의 인구가
증가하자, 인근 열대지방으로 이주하여 얼마 동안 살았다. 또 채집한
식량이 부족할 정도로 인구가 계속 증가하자 온대지방으로, 그리고 한
대지방으로까지 인류의 거주지를 확대해갔다. 그들은 산과 들에서
자생하는 풍부한 열대 과일과 식물을 채집해서 먹었다. 때문에 야생의
동물과 같이 거의 병 없이 천진무구하게 살았다는 사실이 학자들에 의하여
밝혀지고 있다.
온, 한대 지방으로 이동하자, 추위를 막기 위해 두텁고 질긴 옷이
필요했고(임혜상 (문화인류학) 삼문 1986. p. 78) 몸을 따뜻하게 하는
불이 소용되었다. 추위를 견디기 위해 육식과 화식의 풍속이 정착된
것이다. 위도가 서로 다른 더운 지역에서 또는 추운 지방에서 수백만 년
내지 수천만 년을 사는 동안, 피부색깔과 체격과 습관이 달라지게 된
것이다. 그리도 그때는 인구가 희박하고 산림이 울창하여 썩은 나무만
주워와도 불을 사용하는데 불편이 없었다. 그러다가 약 7천년 전, 신석기
시대에 토기를 사용하기까지는 부분적으로 화식을 했을 뿐 거의 생식을
했다.
최초의 사람들은 음식을 날 것으로 먹었다. 그후 불을 만들 줄 알았을
때도 때때로 날 것으로 먹었다. 그들은 식물 뿐만 아니라 동물도 날
것으로 먹었다. 중앙 아프리카의 원주민들은 근년까지도 소와 양의 위
속의 아직 소화되지 않은 풀을 즐겨 먹는다. 에스키모인들은 순록의 위
속에 들어있는 것들을 먹기 좋아한다(임혜상, (문화인류학) 삼문 1986. p.
72). 더구나 인류가 불을 발견하기 전에는 신의 창조법칙 대로 또는
대우주의 섭리 대로 생식을 하였던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독일 네안데르탈에서 발견된 10만년 전 고생인류인 네안데르탈인의
치아는 앞니가 어금니같이 끝이 뭉툭하다. 그 뭉툭한 앞니로 곡식과
채소를 갈아 먹었던 것이다.
부드러운 화식을 하면서 이의 부피가 점차 줄어들었다고 인류학자는
밝히고 있다. 인간의 치아는 육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채식을 하기 위해서
창조되었다는 사실이 생리학적으로나 해부학적으로 증명되고 있다. 창자의
길이도 육식동물보다 길어서 섬유질의 채소를 더 긴 시간 동안 저장하도록
만들어졌다.
위의 인류의 진화에 관한 설명은 빙하기의 내습 등 자연환경의 도전이나
인간의 도전을 사상한 선사시대의 삶에 대한 얘기다.
세계적인 석학 아놀드 토인비는 그의 저서(역사의 연구)에서 인류문명의
발생과 진보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인류가 6천 년 전을 전후하여 발생한 문명발생 지역을 21개 문명권으로
선별하고, 그 문명발생의 원인을 치밀하게 분석하고 있다. 문명발생
원인을 우수한 인종에 연유(인종설)한 것도 아니고, 또한 환경에
기인(환경설)한 것도 아닌, 자연환경 또는 인간환경에 도전하여 그 고난을
극복하고 응전한 과정에서 문명이 발생했다고 보았다.
한 예로 이집트의 문명은, 빙하기에는 이집트, 아라비아 사막 등지에
비가 내려 동식물이 번성하였기 때문에 이를 수렵, 채집만으로도 충분히
살 수 있었다.
빙하기가 물러가면서 이 지역이 건조한 사막으로 변하자, 생존을 위해
나일강 유역 소택지를 농경지로 개발하면서 문명을 낳았던 것이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수메르 문명도 이집트 문명의 발생과 비슷한 경로를
겪었다.
중국 황하 유역의 문명은 극단적 더위와 추위와 홍수라는 역경에
대응하여 생존을 위해 응전하는 과정에서 황하문명을 발생시켰다.
비슷한 환경인 양자강에서는 기후가 온난한 무도전환경이라서 문명이
발생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현대인은 음식의 즐거움을 포함해
쾌락을 쫓기에 왜 그리 바쁜가.
(2) 인구의 증가와 기후의 변동이 자연파괴적인 화식의 문화와 죄악을
낳으며 문명을 발전시켰다.
인류는 인구의 증가와 기후의 변동으로 인하여 채집생활만으로는 또다시
식량이 부족한 시기를 맞게 됐다. 그러한 도전과 위기의 보리고개를
수없이 넘기며 수천만 년을 자연과 합일된 생활을 했다.
인구의 계속적인 팽창으로 더 이상 이동할 땅도 없고, 채집할 식량과
수렵할 동물이 부족해지자, 1만 년 전후해서 부족한 식물을 우선 재배하는
농업혁명이 온대지방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양, 염소, 닭 같은 부족한
동물을 기르기 시작했다. 오늘날은 물고기까지 길러서 먹으니 말세의
징조가 아닐 수 없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는 미국의 속담처럼, 농경사회에서 필요한
청동기와 철기문명을 일으킨 것도 삶의 보리고개를 극복하는 필요의
부산물이었던 것이다. 추운 지장에서 불을 사용하면서 광석에서 녹아난
금, 은, 동, 철을 우연히 발견하고는 만드는 법을 알게 된 것이다.
토기, 청동기, 철기가 발명되면서 점차로 생식은 줄어들고, 화식의
가지수가 늘어났다.
인구가 많아져도 더 이동할 지역이 없어지자, 소유욕 등 악이 생기면서
씨족 조직이 생기고 부족국가라는 조직이 생겼다.
인구가 많아질수록 욕망과 죄악과 질병의 가지수가 늘어갔고, 병행하여
지식도 발달해 왔다. 이에 따라 조직은 점점 강화되어 국가라는 조직이
형성되었고, 인간의 생활은 저인망식으로 관리하는 지식과 조직이
발달해가고 있다.
고난이 있는 곳에 문명과 국가의 조직이 생겨나고, 질병과 죄악이 많은
시기에 도달하여 성현이 탄생했다
인류가 한 곳에 정착하여 농경사회를 이룩하면서 증가하는 인구에
비례하여 새로운 땅을 개간하고, 건축과 땔감으로 목재를 수탈했다.
드디어 중세말에는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 산림이 황폐해졌다. 영국의
영세층은 땔나무가 없어 추위에 떨게 되어 급기야 나무보다 비용이 더
드는 땅 속의 석탄을 캐기 시작했고, 그 검은 석탄은 빈민층에서부터 때기
시작했다. 무거운 석탄을 운반하고 석탄광의 물을 퍼내기 위해 증기기관이
필요했고, 그리하여 증기기관의 사용이 산업혁명의 도화선이 됐던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원시인류가 250만년 내지 수천만년 이상의
기간을 채집생활을 하며, 지구의 청소년 시절에 해당하는 시기를 대자연의
법칙 대로 생식하며 살았다.
인구의 팽창으로 인하여 이를 극복하느라고 개발한 농경사회는 5천년
내지 1만년 전후밖에 안되는 극히 짧은 기간이다. 부분적으로 화식의
습관을 익혀오던 인류는 이 기간에 화식과 육식으로 맛의 즐거움에
중독되면서 질병과 죄악이 증가하기 시작했고, 인류를 죄에서 그리고
질병과 고통에서 구원하기 위해 고등종교의 필요성이 더욱 증대되었던
것이다.
또한 식량이 부족하여 배고픔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농사짓는 기술을
발명했고, 추위라는 고통에서 면하고자 옷과 집을 만드는 재주를 짜냈고,
농사짓는 고통을 줄이고자 농기구를 발명했고, 소, 말의 힘을 이용하는
지혜를 만들어냈다. 우리 나라에서 소, 말을 이용하여 농사를 짓기 시작한
시기는 신라 지증왕 때이다. 현재의 상태가 불만스럽다는 고통에서
극복하고자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영역에서 경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고통의 의미를 종교 경전이나 학문에서 다루고 있는
사실을 깊이있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밖에 고통은 사고를 깊게 할 뿐만 아니라 자제력, 의지력,
자기반성력을 북돋아준다.
질병에 관한 글에서 왜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질병은 잘못된 자연관과
세계관에서 오기 때문에, 그 가치관을 올바로 변화시키지 않으면 질병을
완치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3) 승리주의 인생관이 인류와 자연을 파괴한다.
남북미의 원주민인 인디언이나 인디오들은 본디 동북 아시아에서살던
우리와 혈통이 같은 몽고족이었다. 그들은 보다 풍요로운 새로운 땅을
찾아 베링해협이 육지로 연결되었던 7만년전부터 1만년 전 사이에
미대륙으로 건너가 신대륙의 주인이 되었다. 그러던 것이 16세기 이후부터
미대륙으로 건너간 침입자에 의해 수세기 동안 수십만의 원주민이
무자비한 살육을 당하며 땅을 빼앗겼다. 1890년에는 100만에 가깝던
원주민이 25만명으로 줄어들었다.
북미대륙뿐만 아니라 남미대륙, 아프리카와 호주와 뉴질랜드에서까지
원주민이 그들에게 짐승과 같은 희생을 당했다. 멸종된 원주민 종족만도
많다고 한다. 그들은 원주민뿐만 아니라 자연까지 정복하고 시멘트와
아스팔트, 철근과 석재, 석탄과 석유, 원자핵과 산업쓰레기, 폐수와
매연으로 자연을 쓰레기장으로 파괴하고 있다.
세계인구의 25%에 지나지 않는 선진공업국이 세계자원의 80%를 소비하며
산업쓰레기의 75%를 생산해낸다고 유엔인구 활동기금이 밝혔다(한겨레신문
89. 1. 29).
세계적인 미항인 시드니 항구가 쓰레기, 생활하수, 공장폐수로 수질의
오염이 기준치의 25배를 넘는다는 보도가 있었다(서울 신문 89. 2.2).
남미의 도시 주변의 호수와 강도 쓰레기와 공장폐수로 물의 오염이
심각하다는 보도를 보고 있다. 대서양과 북해 영국해변이 폐기물로 오염돼
해수욕장들이 폐쇄되고 있다.
지구 산소의 3분의 1을 공급하여 지구의 허파라고 하는 아마존 유역에
쇠고기를 공급하는 목초지를 조성하고, 댐을 건설하기 위해 축구장만한
크기의 열대숲이 매 5초마다 불태워지고 있으며, 1년에 서독면적만한
열대림이 소실되고 있다(서울신문 88. 12. 11, 89. 1. 29). 그리하여
국가조직이 필요없는 밀림 속에서 평화스럽게 천연의 삶을 사는
인디오들의 생활터전이 지금도 수탈 당하고 있다.
남미뿐만 아니라 말레이지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뉴기니아의 열대림도
소멸되고 있다.
인류와 동물이 마셔야 할 산소와 퇴비를 생산하는 고목을 잘라내서 만든
호화 외제 공해가구를 존경하며 정신을 빼앗기고 있는 사람이 있다.
원주민을 돕는 길은 아무 간섭도 하지 말고 자연 그대로 내버려두는
일이다. 그러나 구미의 양식을 가진 지성인들이 자연 존중의 도덕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데 대해서는 존경과 협조를
보내야 할 것이다.
원주민을 학살하고 그들의 땅을 뺏은 이주민이 지금 발전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거시적 시각에서 보면 퇴화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들의 몸에서 채식의 김치냄새가 나듯, 저들의 몸에서는 육식의
노릿내가 난다.
진화론자들의 말을 빌리면 인류는 수백만 년 내지 수천만 년 동안 환경이
다른 곳에서 생활한 탓에 인종의 변화가 생겼다고 한다. 그 말에 일리가
있다면 육식으로 인한 노릿내와 소털 같은 빛깔의 머리색과 파란 눈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육식을 많이 하는 요즘 소년들은 확실히 옛날 소년들보다 키도 크고
얼굴이 서구형처럼 미끈하게 되어가고 있다. 소나 말같은 짐승은 키가
크고, 체중이 늘어난다면 효용가치가 있겠지만, 사림이 키가 커지고,
체중이 늘어난다고 해서 어떤 변화가 있는 것일까. 일하고 걷는데 힘이 덜
드는가. 도덕성이 향상되고 머리가 좋아지는가. 권투나 씨름 같은 싸움을
하는 데는 유리할 것이다.
신이 수십억 년은 보내면서 창조한 지하자원을 극히 짧은 기간에
공해쓰레기로 만들어버리고 있다. 이 공해가 세포를 자극하고 신체적
균형을 파괴하여 질병을 일으키는 것이다.
과학기술은 자연의 위대함과 신비를 알기 위한 수단이지 인간과 자연을
병들게 하는 도구가 아닌 것이다. 과학기술을 더욱 발전시켜 자연의
비밀을 연구하는 방향으로 선용하지 않고, 감각을 타락시키는 쪽으로
악용하고 있다.
그러나 과학이 있으므로 자연의 오묘막측함을 깨닫게 하므로 또한 과학이
소중하게 된다.
사람에게 지은 죄는 회개하면 용서를 받는다고 하는데, 대자연을 파괴한
죄도 용서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기에 사람에게 지은 죄는
상대적이지만 자연에게 지은 죄는 본질적이라고까지 말하는 학자도 있다.
왜냐하면 자연을 훼손한 죄는 그 영향이 우리 후손과 모든 자연에게
영원히 미치고 회복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4) 열역학의 제2법칙
여기서 열역학의 제2법칙인 엔트로피의 법칙을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 등 선진국에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엔트로피의 법칙에 관해서
국내에서도 서너 가지의 번역 책자가 소개되고 있다.
먼저 열역학의 제1법칙을 설명하자면 다 아는 바와 같이 '물질의 질량은
불변하다'는 법칙이다. '우주의 에너지와 물질의 총화는 일정하다.
변화하는 것은 형태이고 질량은 변치 않는다'는 에너지보존의 법칙이다.
열역학의 제2법칙인 엔트로피의 법칙은 지하자원을 한 번 사용하면
영원히 재생산할 수 없다는 현상을 하나의 법칙으로서 현대 사회현상에
적용하여, 올바르고도 심도있게 설명했다는데 대해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열역학의 제2법칙인 엔트로피의 법칙이란 '물질과 에너지는 사용 또는
이용이 가능한 것에서 사용 또는 이용이 불가능한 것으로 ... 또는
질서있는 것에서 무질서한 것으로 변화한다'는 법칙이다(제레미 리프킨
(엔트로피의 법칙) 최현 역, 범우사 1983. p. 25).
우리가 사용하는 석탄이나 석유는 사용하면, 그 에너지는 지상의
공중으로 흩어질 뿐 없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소비한 그 석탄이나
석유는 영원히 다시 만들어지지 않고, 사용이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이 우주도 엔트로피의 법칙에 지배받고 있다는 설명이다.
그리하여 이 지구는 점차 인간에 의해 무질서해지고, 황폐해진다는
것이다.
인류는 사용이 손쉬웠던 에너지인 목재로부터 시작해서 사용이 어렵고
비용이 더 드는 석유와 우라늄을 소비하고 있다.
원자력 전기는 우라늄을 캘 때부터 시작해서 보관, 발전, 폐기물 처리에
이르기까지 방사능이 계속 유출되어 인류와 생물에 큰 위협을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라늄도 한정된 자원이다.
핵폐기물의 처리도 심각한 문제일 뿐만 아니라 가장 오래가는 플루토늄은
50만 년간 유독성을 보유하면서 자연을 오염시킨다(신과학연구회,
(신과학운동) 범양출판사 1986. p. 213). 원자력발전이나 핵폐기물
처리에는 완전한 방법을 아직 개발 못한 것이 현실이다.
86년 4월 소련 체르노빌 핵발전소에서 발생한 사고로 주변의 광범위한
지역에서 소나무 길이가 정상상태보다 10배나 커지고, 오크나무의 잎이
무한정 자라고, 아카시아잎도 어린이 손바닥만하게 자라는 등의 이변이
생김에 따라 이 일대 숲이 모두 고사할 것이라 한다(국민일보 89. 8. 15).
미국과 영국의 과학팀이 핵을 융합하는 방법으로 무한정하고 깨끗하며,
값싼 에너지를 얻는 기술을 개발했다는 기사가 89년 3월 25일자 각
신문에서 보도됐다.
에너지의 값이 비쌀수록 자연은 덜 파괴되고, 에너지 값이 쌀수록 자연과
인류는 더 병들고 훼손된다는 함수관계의 경향이 있음을 알고 있다면,
값싼 에너지가 공급된다 해서 그리 반가워할 건 없다. 에너지 값이 싼
덕분으로 우리는 얼마나 오염된 공기를 마시며 자연을 파괴하며
사회범죄를 양산하고 있는가.
태양열 에너지의 이용을 기대하는 사람도 있지만 막대한 투자를 해서
빌딩 지붕꼭대기에 태양열 집열판을 만들어 놓아도 엘리베이터조차 움직일
수 없는 열밖에 생산이 안 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 도시의 빌딩이란 괴물은 대낮에도 찬란한 전등과 상하수도, 승강기
등을 쓰느라고, 에너지를 물마시듯 소비하고 있다.
그 빌딩에서 하는 일이란 기껏해야 음식, 술, 과자류, 음료수를 팔고,
먹고, 마시고, 배설하거나 옷가지와 신발류를 팔거나, 호텔 같은 빌딩에서
오염된 공기를 마시며 잠이나 자는 곳이다.
건물 안의 사무실이란 곳에서는 대낮인데도 대형 형광등을 총총히 켜고,
에어콘을 돌리며 백색의 양질의 종이를 물쓰듯 하면서, 더 나누자, 더
주자, 빼자 하면서 숫자와 수식어를 고치고 또 고치는 행위를 반복하는
곳이다.
외형은 번질거리는 건물이 점점 새로 서지만, 공해나 쓰레기를
생산하거나 판매하는 건물에 지나지 않는 구조물이다. 옛날에는 천시되던
상업이 그 건물 속에서 가장 대우받는 직업으로 선망의 대상이 되어 있고,
에너지가 고갈된 후세에서는 계층에 대한 평가가 또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질서스럽던 자연물은 무질서한 공해물로 변천해 간다. 강은 모래와
나무숲과 싱싱한 물고기와 맑은 물의 자연이 아닌 시멘트와 오염된 수질과
폐기물 찌꺼기와 비닐, 유리조각, 콘크리트 다리의 무질서한 공해물질로
변질되어 간다.
쾌락지향의 승리지상주의자는 그런 지경이 된 강을 자연의 강보다
아름답다고 한다.
농경사회에서는 먹는 음식찌꺼기와 대소변은 물론, 주택의 지붕,
흙벽까지도 다시 논밭으로 되돌려주어 퇴비로 사용했다.
그런데 도시의 모든 쓰레기는 자연순환을 단절시키고 토양의 산성화를
가중시키고 있다.
(5) 자연파괴는 하나님에게 대적하는 행위이다.
신학자 헨리 버네트와 프란시스 세페르는 각각 그의 저서를 통해 사람은
하나님이 창조한 피조물을 보호하고 봉사하는 사환(종)의 의무를 가지고
있다. 자연을 훼손하고 파괴하는 행위는 하나님에 대한 큰
죄악이다.(제레미 리프킨 (엔트로피의 법칙) 최현 역 범우사 1983. p.
254).
종교의 말씀이 있기 전에는 신은 어떤 방법으로 자신을 나타내셨는가,
대자연을 통해 자신을 나타냈다고 볼 수 있다.
그러기에 고대인류는 해와 달 산과 나무 등의 자연의 신비를 신성시하고,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던 것이 인간이 인간 이외의 자연을 뜻대로
이용해도 되는 특권을 신으로부터 받았다는 인간의 오만이 근세 이후의
중심사상이었던 기계론적 자연관을 낳았다. 무생물의 자연도 다만 차원이
다른 삶일 뿐이다. 모든 자연의 기본단위인 원자들은 저 우주 속의 별
사이에서도 화학작용을 하며 결합하여 분자를 이루고, 유기분자들은
복잡한 아미노산, 단백질 등의 생명체의 기본단위를 창조한다(한국일보
89. 2. 11(1) 성간물질).
식물이 자라고 동물이 성장하는 것은 무생물의 유기적인 작용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세계적인 석학들의 설명이다. 우리의 분신이며, 한
몸의 유기체이며, 또한 신이 사랑하는 창조물인 자연을 훼손,
수탈하면서도 독실한 신앙인이라고 자부하는 사람이 있다. 이 지구는
비교할 수없이 조화롭고 균형된 살아있는 극치의 예술품이다.
인간이 뜻대로 악용해도 되는 그러한 대상이 아닌 신성한 존재이다.
(6) 창세기의 새로운 해석
인류는 약 1만 년 전후로부터 부분적인 농경과 목축이라는 산업혁명을
일으켰다. 그 최초의 시기가 중동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기원전 7천
년경이다.
그런데 동양에서는 중국의 황하유역에서 옥수수 같은 농작물을 재배하기
시작한 것이 기원전 3천 년경이다. 중동지역은 아프리카가 가깝고
아열대지방으로서 일찍부터 인구가 밀집하여 농경생활이 빨리 시작됐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기에 우상숭배와 죄악이 심했고, 많은 민족과
나라들이 명멸했다. 사람들은 인구의 증가로 살기가 어려워져, 농사를
짓는 괴로움을 감수해야 했고, 따라서 죄악이 증가함으로써 고통의 증대로
인하여 신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세계 곳곳에서 잡신을 숭배하는
수백 가지의 신앙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인구가 이미 포화상태에 있어서 정벌과 약탈과
노예제도로 인한 죄악이 만연했고, 더구나 식량부족에다 대자연의 법칙을
어긴 화식의 편식과 육식으로 인하여 문둥병 등의 질병이 증가하였다.
그때가 유사 이래 가장 비참한 시점이었던 것이다.
창세기 1장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만물을 노예화하고 이기적으로 악용하라는 의미로 그 말씀을 해석하고
있는 종교인이 아직도 있는지?
1980년 미국교회협의회가 주관한 모임에는 대표들 만장일치로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필요로 하는 것은 '자연 및 땅을 존중하는
새로운 종교'라는 결론을 내렸다.
우주는 나눌 수 없는 한 몸의 유기체라고 우주물리학자들은 설명한다.
우주는 거미줄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다. 원자는 그 범위 안에서 우주의
영향을 주고, 전우주는 이 원자를 빛에 가까운 속도로 회전시킨다. 생물의
세포를 숨쉬게 하는 에너지의 근원도 우주에서 생성하는 것이다. 전체와
나는 하나라는 범아일여의 인도 힌두교사상이나, 대자연은 한몸이라는
불교의 일체불이라는 자연관이나, 노장사상이나, 태극사상이나 모두 현대
우주관과 일치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아지고 있다.
또한 신유학파인 중국의 철학자 정호도 "인의 사람은 천지만물의 온갖
것을 일체로 본다 ... 자연과 인간에게는 아무분별도 없다"고 했고,
왕양명의 세계관도 이와 같았다. "위대한 사람은 천지만물을 일체로 본다"
모든 욕망에서 해탈한 돈오청정한 상태에서 우주와 합일한 직관을 통해
터득한 동양의 진리인 것이다.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사회가 조직화되면서 사람이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가치관이 엄존했었다. 그것을 타파하기 위해 사랑과 자비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제 신은 만물을 사랑한다는 말씀을 자연을 통해 하고 계시지 않는가.
새로운 사상을 주장하는 신학자는 "신의 창조물을 이기적으로 이용하거나
파손하는 것은 죄이며, 신에 대적하는 행위로 해석하는 것이다."((제레미
리프킨 위의 책 p. 254).
현대 문명병과 사회악은 이러한 대원리를 어긴 데서 오는 것이다. 질병과
부도덕은 화식과 육식의 편식, 자연파괴, 그리고 향락과식에서 오는 것이
분명해졌다. 다시 설명하지만, 첫째 화식과 육식으로 인해 자연치유력과
저항력의 기본영양이 되는 비타민류와 미네랄, 생효소의 결핍을 초래하고,
둘째 자연오염과 공해가 질병의 인자로 작용하고 있다. 다음으로
쾌락집착주의 가치관은 편한 것이 발전이요, 행복이다 라는 인생관을
돌덩이처럼 굳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불편한 노동을 기피한 대가로
운동부족이 고혈압, 당뇨병 등의 질병의 원인이 되고 있다. 불편과 고통의
기피가 질병과 죄악과 자연파괴적인 문명의 모체이다. 이웃집이 잘 보이지
않는 첩첩산중에서 생활해 보라. 다시 말하지만 고독감, 허무감, 그리움,
애정, 이웃사랑의 정서가 가슴에서 샘솟고 성격이 온순해진다. 반면,
도시에서, 편리한 주택에서 미식을 먹으며 자가용을 소유하고 또
빌딩이라도 가지고 있으면 마음은 교만해지고 친척과 이웃의 사랑도
메말라가고, 경쟁심과 만족감, 우월감, 지배욕, 향락욕이 마음을 메우고,
정서는 삭막해 간다. 그리하여 그것을 이루지 못한 계층의 욕망을
자극하여 경쟁을 더욱 증폭시키고 범죄심리를 충동시키고 있는 것이다.
자연은 정서를 부드럽게 하지만, 화려한 도시건물은 갈등과 긴장과
투쟁욕을 자극한다. 쾌락과 편리와 현대문명의 장점에 대해선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지능이 낮은 사람일수록 쾌락과 물질에 집착하고,
한글조차 모르는 사람등 쾌락과 현대 문명의 장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식물도 쓰고, 시고, 떫고, 약내 나는 여러 가지 채소를 고루 먹어야
건강하듯, 봄 같은 기쁨, 여름 같은 즐거움, 가을처럼의 슬픔, 겨울처럼의
고통을 고루 섭취할 때 건강한 정신과 인격이 길러지는 것이다.
신 또는 대우주가 창조한 법칙 대로 자연식을 하며, 자연노동을 하며,
자연의 신비를 탐구하며, 자연을 선용한다면, 불치병과 죄악이 사라져갈
것이다. 자연식, 생식은 맛이 순수하고 깨끗하고 시원하다. 그리고 자연을
상대로 한 노동은 본질적인 지식과 신체의 리듬과 비밀을 알려주고 창조적
보람을 안겨준다.
자연의 세포인 인간이 자연의 대원리에 어긋나는 가치관으로 인해
불균형의 우주자연관과 불건강한 세계관을 가짐으로 해서 질병과 죄악을
생겨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계가 질적으로 진보하자면 질적으로
다양화한 가치관들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쾌락지상주의자도
자연파괴낭비자도 필요한 존재이다. 그러한 가치관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세계관이 성립하는 것이다. 다만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향락주의자들만이
활보하고 있는 현상이 문제일 뿐이다.
인류의 에너지를 헛된 향락과 자연파괴라는 죄된 일에 낭비 시키지 말고,
인간을 포함한 자연의 연구와 대자연의 존중보존과 그리고 미래를 향한
우주개발에 우리의 에너지를 소중히 사용해야 할 것이다.
"미래의 21세기는 인류가 자연을 계속 착취하는 한, 전쟁, 천재지변 등의
재난의 위험보다는 공해의 재난으로 50내지 100년 이내로 인류가 멸망할
것이다"라고 미래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다.
인류는 자연존중의 자연윤리관으로 21세기의 재난을 극복하고, 이 지구를
인류와 자연의 낙원으로 건설하는 방향에 에너지를 집중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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