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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와의 대화/성인 환자를 위하여

26. 성, 그 쉽지 않은 이야기

by FraisGout 2020. 6. 3.

이 책의 초판에서는 성에 관해 따로 이야기하지 않았었다. 책 전체에 
걸쳐 자유롭게 언급이 되어 있으므로 특별히 논의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현대 섹스 혁명과 진료실에까지 
찾아든 성 개방의 물결을 고려하여, 성에 관한 내용을 따로 마련하여 몇 
가지를 덧붙였다.
  섹스 혁명의 가장 충격적인 면은 그것이 가히  혁명이라는데 있다. 
그것은 점진적인 성의 해방, 개방, 자유가 아니다. 성에 대한 새로운 
태도나 해방은 성의 자유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좋던 싫던 간에 변화의 물결에 휩싸여 있고, 변화가 계속됨에 따라 
우리 역시 계속 그 영향을 받고 있다.
  섹스 혁명은 진료실에서라도 확실히 느낄 수 있다. 오늘의 환자는 
어제의 환자와 다르다. 그들은 성에 대해서 자기들끼리만 아니라 
의사에게도 스스럼없이 말한다. 환자는 새로운 문제를 제시하고, 새로운 
질문을 하며, 의사가 직접적으로 이야기해 주길 바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환자들은 그들의 성생활을 의사에게 비밀로 하려 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환자들은 아무 거리낌없이 그런 이야기를 해서 의사들을 
당황하게 한다. 사회적으로 존경할 만하고 안정된 위치에 있는 환자들도 
서로 아내를 바꿔 잔다거나, 변태성욕, 동성애, 성 전환, 구강 섹스, 항문 
섹스, 그룹 섹스에 대해 마치 자신의 섹스 습관의 일부인 양 거침없이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러한 환자의 숫자는 계속해서 늘어 갈 것이다.
  오늘날은 환자들은 성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보다 정확하게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더 많이 읽고 보았다. 책이나 영화는 섹스 홍수로 가득 차 
있고, 노골적으로 이를 묘사한다. 섹스를 다루지 않는 책은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지경이며, 작가들 역시 그들 자신의 섹스에 대해 솔직하면서도 
흥미로운 삽화를 곁들여 써나간다. 환자들은 왜 자신이 작가들처럼 
자유스러울 수 없는지 , 그리고 섹스가 그들이 읽은 것처럼 왜 즐겁고 
유쾌하지 않은지 알고 싶어한다.
  섹스에 관한 이야기를 싫어하는 의사나, 과거에 부모들로부터 이야기를 
듣지 못하고 자란 의사들은 진찰실에서 노골적인 성 애기를 들을 때마다 
혐오감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눈치챈 오늘의 환자들은, 의사에게 
섹스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거나 그런 이야기를 들어줄 다른 
의사를 찾아갈 것이다. 시대의 흐름과 환자들의 변화를 따라잡기 위해서, 
어떤 의사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의 성 지식을 넓혀간다. 그들은 새로 
나온 섹스에 관한 책이나 잡지를 구입하고, 섹스 영화를 보러 다니기도 
한다. 어떤 의사는 집중적인 성교욱 프로그램에 참여해서 배우기도 나다. 
환자와 성 관계를 갖고 나서 '지금은 성에 개방의 시대이니까' 하고 
스스로를 속이는 의사도 있다. 성에 대한 최근 지식을 습득하지 못한 
의사들은 자신이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느낀다. 또 환자가 자기보다 성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싶을 때 좌절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아무리 그들이 열심히 노력한다 하더라도, 섹스 혁명 이전에 
길들여진 의사는 결코 신세대에 적응사지 못할 것이다. 물론 노력은 
해보지만 성 해방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실제로 이해하지는 못한다. 결국 
구세대는 낡은 생각을 고수할 것이고, 새롭게 변하는 환자들에게 자신의 
낡은 견해를 주입시키려 할 것이다.
  개혁의 시대에 태어나 새로운 환경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젊은 의사들은 
기성 의사들과 확실히 다르다. 섹스 혁명을 겪은 의사들은 기성 세대 
의사들과는 다른 시각으로 성을 이해하고, 다른 반응을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현상들이 반드시 의사를 비롯한 모든 사람과 세상이 훨씬 
좋아졌다는 것을 의미하는지 비롯한 모든 사람과 세상이 훨씬 좋아졌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단지 세상이 달라졌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섹스 혁명은  큰 사회적 혁명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큰 
혁명의 물결은 아무도 알 수 없는 곳을 향해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섹스 혁명 그 자체는 현저하게 눈에 보이는 것들, 일시적인 것들, 
귀착점으로 보여지는 것들, 혹은 전혀 관련이 없어보이는 것들 등등 여러 
개의 다른 부분들도  이루어져 있다. 이들은 서로 연관되어 있지만 그 
관계를 대부분 명료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섹스 혁명을 가능케 한 요소들은 무엇일까?
  그 중 하나는 임신에 관한 사고의 변화이다. 산아제한을 그예로 
들어보자. 오랫동안 사회단체들이 강력하게 산아제한에 관한 법률을 
말소시키려 노력했지만, 산아제한 널리 시행되고 있다. 
  이러한 태도의 변화를 가져오게 한 몇 가지 요소 중의 하나는 피임약의 
개발이다. 의학의 기적이라 할 수 있는 피임약은 산아제한뿐만 아니라 
성의 해방에 박차를 가한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피임약은 임신에 공포를 
없애 주었고, 그러한 공포가 없어짐에 따라 억압된 성의 해방을 가져오게 
된 것이다. 어떤 이들은 만약 산아 제한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바뀌지 
않았다면, 피임약은 기존의 방법들이 그랬던 것처럼 쉽사리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유가 어찌되었건, 피임 방법이나 피임약을 
처방해야 하는 의술에도 커다란 변화가 왔다. 의심, 두려움, 희망, 공포, 
그리고 무엇보다도 결단력이 필요한 새로운 의학 분야가 의사의 해야 할 
일로 추가되었다. 의학이 발달 할수록 새로운 위험과 문제가 생겨나고, 
새로운 해결책은 언제나 새로운 문제를 몰고 오기 마련이다.
  임신에 대한 태도의 변화는 낙태에서도 볼 수 있다. 낙태에 대한 
사람들의 견해가 이렇게 쉽게, 갑자기 변할 수 있으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이런 변화는 낙태에 대한 인식의 변화보다는 임신에 대한 
인식의 변화에서 비롯된다. 임신을 침범할 수 없는 신성한 것이라 
생각했던 기존의 생각으로 낙태를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임신을 신성시하지 않게 되어 더 이상 임신에 얽매이지 않게 되었으며, 
사회적으로도 낙태를 허용하는 분위기가 된 것이다.
  성의 해방의 의료 현장과 의사 자신들에게 아주 민감하고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도덕적, 윤리적으로, 그리고 법률적으로 용납되지  않던 낙태를 
같은 의료 행위들이 그토록 짧은 시간에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러한 가치의 변화가 가져온 영향은 실로 엄청난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이런 변화를 의식하지 못하거나, 낙태 수술과 관련없는 
의사들은 자신과 상관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이런 변화는 우리 
주의에서 일어나고 있고, 우리에게도 틀림없이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물론 어떤 의사들은 지난 날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낙태를 반대하는 
입장을 고수하기도 한다. 어떤 이는 비록 낙태를 찬성하기는 하지만, 그들 
자신이 직접 낙태 수술을 하는 것은 거부하기도 한다. 임산부나 그 
가족에게 뭐라고 했든지 간에 생명체를 없앤다는 두려움에서는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의사가 갖는 문제는 다만 변화할 뿐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예상치 못했던 출생률의 저하는 임신에 대한 견해의 변화가 
가져온 또 다른 현상의 하나이다. 비록 산아 제한이나 낙태가 출생률을 
저하시키기는 했지만, 그 근본 원인은 사람들 자신 안에 있고, 거기에 
아이를 적게 갖겠다는 생각이 이런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인구 증가율 
0으로 표현할 수 있는 이런 생각은 자연 보호나 환경 오염이라는 보다 큰 
개념의 일부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세상이 돌아가는 것에  대한 
개념이 바뀌면서 결혼에 대한 생각들도 달라졌다. 아이도 낳지 낳고 
결혼도 하지 않은 채 동거 생활을 하는 젊은이들이 날로 늘어나고 있다. 
아이를 갖게 된 후에 결혼이 뒤따르기 하지만, 최소 몇 년 동안은 대부분 
아이를 갖지 않는다. 이런 결혼의 변화는 직접 관련된 사람들뿐만 아니라, 
결혼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나쁘게 보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도 악영향을 
끼친다.
  섹스 혁명이 가져온 가장 뚜렷한 재난은 바로 성병이다. 교육 수준이 
높아지고 약품의 효과도 높아졌지만, 성병은 아직 무서운 전염병이다. 그 
원인은 피임약으로 인한 성의 해방이다. 이로 인해 일시적인 외도가 
증가하고,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매독이나 임질의 전염이 늘어가는 
것이다. 임신이나 사회적 비난의 두려움이 사라졌으므로, 섹스를 억압할 
아무런 이유가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성병에 걸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 자체는, 임신이나 사회적 비난에 대한 두려움보다 
결코 더 큰 장애물이 되지 못한다. 성병에 대한 두려움이 충분한 장애 
요소가 되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실제로 성병은 계속 
번져가고 있다. 치료술이 발달하는데도 성병이 번져가는 것은 여전히 
불가사의이며 의학이 안고 있는 숙제로 남아 있다. 이를 밝히기 위해서 
우리는 다른 원인을 찾아보아야 한다.
  나는 성병의 유행이 젊은이들의 가치관의 변화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개인적 안전, 신체의 고결함, 일반적인 건강이나 
부(부)에 대한 가치관의 변화이다. 일시적이고 무관심한 태도, 신체적 
가치를 무시하는 행동들은 건강이나 섹스에만 제한된 것이 아니라, 더 큰 
혁명의 일부인 것 같다. 학교, 직장, 개인의 야망, 성공, 미래에 대한 신념, 
이 모든 것들은 젊은이들에게 이전처럼 그렇게 가치있는 것들이 아니다. 
삶, 건강, 부(부), 안전, 편안함, 신(신), 국가 등은 이제 더 이상 소중한 
것들이 못된다. 이미 이런 것들의 가치는 떨어졌고, 질병에 대한 두려움도 
무절제한 섹스나 마약을 막을 수 있을 만큼 강한 방패막이가 되지 못한다. 
결국 젊은이들에게는 위험한 작 파멸의 길로 접어들 유혹만 늘어난 
것이다. 그리고 성병이나 마약은 자기 파멸의 일면을 보여준다.
  이러한 신체나 개인적 풍요, 가치에 대한 무관심과 환멸은 의사에게도 
새로운 도전이 되고 있다. 의사가 환자에게 자신의 충고를 따르도록 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 중의 하나는, 환자의 자신에 대한 사랑(자기애)이다. 
의사들은 환자를 겁주기도, 하고 환자가 의사의 말을 듣지 않을 경우 
일어날지도 모를 무시무시한 일들을 이야기해 주지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도 자기자신을 돌보지 않는 환자들에게는 소용이 없다. 실제로, 
자신을 미워하는 환자들은 의사의 위협에 부정적으로 반응한다. 예를 들어, 
뚱뚱한 환자에게 계속해서 과식할 경우 심각한 결과가 일어날 것이라고 
겁주면 오히려 체중이 5킬로그램이나 더 늘 수도 있고, 알콜올 중독 
환자의 경우에는 더 심한 주정을 할 수도 있다. 따라서 환자를 위협하는 
것이 이미 자신에게 환멸을 느낀 젊은이의 경우에는 문제를 악화시킬 
뿐이다. 이런 환자에게는 그 점을 지적해 주고, 그들이 자신의 신체를 너무 
무관심한 것 같다고 말해 주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 대신 환자 스스로가 
세상이나 자기 자신에 대한 비하, 환멸, 절망을 말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하며, 환자 스스로 자신의 환멸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이성적인 생가가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섹스 혁명의 다른 일명인 동성 연애는 이제 일부 사람들의 문제가 
아니고 사회 전체로 확산, 모든 사람들의 문제가 되었다. 게이 
해방운동(동성  연애자의 권리 확장과 차별 폐지 주장)은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비록 환영받지는 못하지만 조직화되고 공인된 형태의 
사회 조직으로 떠오르고 있다. 그러나 아직 동성 연애자들의 단체는 주로 
대학 캠퍼스나 일부 종교 단체와 사회 단체에서만 인정해 주고 있는 
상태이고, 시민들 역시 따뜻하게 받아들이는 입장은 아니지만, 이들에 대한 
태도는 여러 계층에서 도덕적, 사회적, 혹은 법률적으로 변하고 있다. 가장 
큰 변화라면 많은 동성 연애자들이 자신을 동성 연애자라고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동성 연애에 이러한 혁명적 변화가 일어나고, 사회적으로 
개방되고 인정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 그 자체는 아직도 변하지 않은 
채 남아있다. 동성 연애는 항상 당혹스런 이야기이고, 성의 해방이 일어난 
지금도 그 당혹감은 줄지 않고 있다. 동성 연애가 병적인 것이냐, 아니면 
정상적인 섹스 취향의 일부일 뿐이냐 하는 논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대체로, 동성 연애자들의 대변자들은 이를 병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이 천성적으로 갖고 태어난 하나의 특성으로 생각한다. 
동성애가 선척적인 것이라면, 의사에게 동성 연애를 고칠 수 있습니까? 
하고 묻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다. 선천적인 것이라면 고칠 수 없는 것이고, 
고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동성 연애자들의 입장에서 문제되는 단 하나는 
이들 소수 그룹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다. 동성애가 선천적인 것이라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기는 하지만, 의사나 동성 연애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동성 연애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으며 유아기 발육 결함의 결과일 
것이라고 믿고 있다.
  환자는 한 인간이며, 따라서 인간답게 대해야만 한다.
  그러나 의사들에게, 특히 환자가 동성애 환자인 경우에 평등하게 
대하기가 쉽지만은 않다. 환자가 동성 연애자라는 점에서 오는 거리낌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다른 의사들의 경우는, 환자가 자신이 동성 
연애자라는 점을 인정했을 때에야 치료를 끝낸다. 가장 어려운 점은 동성 
연애 환자가 자신의 성 생활을 자세하게 이야기하며 의사에게 도움을 청할 
때이다. 대부분의 의사들은 남녀 간의 성 행위를 듣는 것도 힘들어 하기 
때문이다. 게이 해방운동으로 인해 의사를 찾는 동성 연애 환자들이 
늘어나고 있는 지금, 의사들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적어도 이런 환자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의사는, "나 역시 뚜렷한 
해결책을 제시해 줄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해 주는 것으로도 환자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남녀 간의 이성 문제에서 찾아볼 수 있는 
시련, 질투, 분노, 권태, 경쟁심, 지배욕 등을 동성 연애자들의 이야기로 
발견할 수 있다. 다만 다른 점은 상대방이 동성이라는 점뿐이다.
  포르노의 확산의 섹스 혁명의 또 다른 면이다. 너무 광범위하게 퍼져서, 
포르노라는 것이 아직도 따로 존재하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음란 서적이나 영화는 금지되어 지금처럼 널리 퍼져 있지 
않았다. 이제 포르노는 어디서나 볼 수 있게 되었고, 음란 서적을 파는 
곳이나 포르노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은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가정으로 
직접 배달되는 잡지에까지 나체 사진이나 성 행위를 묘사한 그림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포르노 사회에서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결론은 아직 없고, 
의사의 개인적인 견해에도 별로 큰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 같아. 의사들은 
자기들이 믿어온 것을 계속 믿으려 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섹스 혁명의 중점이 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성교 그 자체이다. 섹스 
혁명이 성교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이는 대답하기 힘든 질문이다. 
왜냐하면 성 행위는 너무나 개인적인 비밀에 속한 갓이어서 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섹스 혁명이 성교에 준 영향 중 하나는 개방적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사람들은 부끄러움없이 
자기들의 성 관계를 다른 이들에게 말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성 행위의 
경험과 문제들은 이야기한다. 섹스를 모든 사람에게 공개적으로 말하는 
면에서의 선두 주자는 작가들이다. 독자들에게 인기도 있다. 글로 써진 
것은 항상 저자의 환상이 약간은 추가된 것이지만, 읽는 이의 상상을 
자극하고, 그들로 하여금 보다 대담해지도록 하는 효과를 가진다.
  보다 확실한 변화는 성교한 연령층이 자꾸 낮아져서, 어린 나이의 
청소년들도 정기적으로 성 관계를 갖는다는 것이다.
  확실하게 어떤 경향인지 분명치는 않지만 순결의 개념도 바뀌어 가고 
있다. 젊은이들의 혼숙이 자유로와졌으며, 창피나 죄책감도 큰 문제가 되는 
것 같지 않다. 결혼한 부부들의 외도도 잦아졌다. 난혼이나 간통이란 말을 
쓰기가 무색하게 되었다.
  또 한 가지는 섹스에 대한 여성들의 태도를 변화다. 소위 여성 해방이라 
할 만하다. 여성들이 성에 대해서 적극적이 되었다. 10대나 20대 초반의 
여성들은 그들의 성욕을 주저없이 밝히며 더 이상 기다리고만 있지 
않는다. 그들은 성 행위를 즐기려 하고, 오르가슴을 느끼는 데 훨씬 
개방적이다. 이런한 변화는 여성의 생활 전반에도 많은 변화를 주고 있다. 
이제 성은 여성의 삶에 있어 중요한 일부가 되었다.
  




"이 병은 당신의 성 기능에 영향을 줄 수도 있습니다"라고 말하기보다는, 
특수한 경우가 아닌 이사 신체적 질환이나 수술 자체가 성 기능에 영향을 
주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는 것과, 대부분의 환자들이 그 점을 걱정하지만 
만약 어떤 변화가 있다 하더라도 이는 질병에 대한 정신적 스트레스 
때문이지, 결코 신체적 변화가 일어난 대문은 아니란 것을 설명해 주어야 
한다. 따라서 회복기에 있는 환자에게 그런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걱정을 말하게 하고, 거기에 대해 설명할 기회를 주는 것은 아주 현명한 
태도이다. 이런 후처치가 아주 중요하며 여기까지가 완전한 치료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의사들은 환자에게 그의 성 기능에 아무 일도 없을 거라는 뜻으로 
습관적으로 무심결에 "정력이 곧 좋아질 겁니다"라고 말한다. 이미 오래 
전부터 성불구인 환자도 있고, 성 기능은 정상일지라도 섹스 경험이 전혀 
없는 환자들도 있는데 이 사실을 간과한 채 말이다. 의사의 이런 말은 
환자를 굉장히 당황하게 하고, 환자의 생활을 더 복잡하게 만들 수도 있다.
  의사는 환자 자신의 신체적 질병에 대한 정신적 불안이나 걱정이 그의 
성 생활에 일시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을 환자에게 알려주어야 
한다. 만약 의사가 여기에 무엇인가 덧붙여 설명하고 싶다면, 환자가 
가지고 있는 질병이 성 기능에 지장을 준다는 보고가 아직은 없다고 말해 
주는 것도 좋을 것이다.
  반대로 성에 관한 문제가 정신적, 신체적 증세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따라서 환자에게 의학에 관련된 것을 설명해 줄 
때는 반드시 성 생활에 대한 부분도 포함시켜야만 한다.
  그러나 여전히 섹스에 관련된 얘기를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환자가 스스로 증세를 말하고 그와 관련된 질문을 해 온다면 훨씬 
쉬워지겠지만, 아무리 성 해방 운운해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결국 
환자에게 "성 생활은 어떻습니까?"라고 묻는 수밖에 없는데, 이런 질문에 
대개의 환자들은 어색한 표정으로 "괜찮아요" 혹은 "그저 그렇지요"라고 
대답한다. 이런 간단하고 무의미한 대답 외에는  더 이상 아무 말도 더 
들을 수가 없다.  
  환자가 이런 식으로 대답할 때 약간 다른 방법으로 접근해 보면 어떨까? 
그의 짧은 반응을 단순한 대답으로만 여길 것이 아니라, 대화의 막을 여는 
계기로 삼아보면 어떨까? 환자가 사용했던 단어를 끄집어 내어 다시 한번 
다음과 같이 질문해 보는 건 어떨까? "어떤 면에서 괜찮다는 말입니까?" 
"괜찮다는 말은 무슨 뜻이죠?" 이렇게 질문을 하면 환자는 자신의 대답이 
대화의 서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환자가 성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을 때 서두를 꺼내는 또 
한 가지 방법은, "성 생활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안 하시는군요"하고 
지적해 주는 것이다. 이처럼 환자가 빠뜨린 부분을 지적해 주는 것이 직접 
질문을 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다. 어떤 환자들은 이런 지적을 받게 
되면 "무얼 알고 싶으세요?"라고 반문해 오기도 한다. 이때는 구체적인 
질문 대신 "왜 성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지 않는 거죠?"하고 말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일 것이다. 이렇게 몇 마디가 오고간 후엔 아무리 
주저하던 환자라도 결국 이야기하게 된다. 그러나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의사는 환자가 이야기하지 않는 여러 가지 것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이야기를 유도해 나가야 한다는 점이다.
  환자에게 성에 관한 이야기는 누구나 좀 부끄러워한다는 사실을 미리 
이야기해 두는 것도 좋다. 물론 전혀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환자에게 
강요를 해서는 안 된다. 말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이야기해 두는 것도 좋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고는 완전한 
치료가 힘들다는 점도 덧붙여야 할 것이다. 
  환자와 성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장애가 되는 심각한 요소는 단순히 
대화술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사람들이 성에 대해서 
갖고 있는 기존의 잘못된 관념으로 인한 것이다. 문제는 그들이 성에 
관해서 무엇을 얼마만큼 모르느냐는 것보다 무엇을 얼마만큼 알고 있는가, 
그리고 그들이 알고 있는 성에 관한 지식이 얼마나 사실과 거리가 먼 
것인가 하는 것이다. 성에 대한 잘못된 인식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갖고 있는 성 문제를 문제시하지 않고 당연한 것으로만 알고 있다. 
따라서 환자가 자신의 성생활에 대해 "좋아요"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게 
반드시 만족스럽고 행복하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섹스란 만족스럽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르겠지만, 전체적으로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의사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사실과는 다른 
어떤 기본 전제에 연연하는 것 같다. 이런 잘못된 생각들이 너무나 넓게 
퍼져 있어,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마치 자신을 속이기 위한 일종의 
배반인 것처럼 여겨지기까지 한다. 마치 본의 아니게 사회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특정한 개념을 바꾸는 일에 공모하는 듯한 느낌마저 들게 
한다. 그러나 모든 것을 드러내는 섹스 혁명으로 인해, 그 사회적 목적은 
과거의 그것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이제는 필요치 않게 되었고, 잘못된 
기존의 인식도 저절로 바르게 고쳐질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오랜 시간에 걸쳐 일어났고, 지금까지 성을 더욱 
객관적으로 연구하고자 하는 많은 시도가 있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정신을 파헤치는 새로운 방법을 발견했다. 그가 사용한 방법, 즉 
정신분석은 지금껏 잘 알려지지 않았던 성의 중요한 부분들, 즉 억압된 채 
우리 내부에 깊숙이 묻혀 있어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았던 부분들을 들추어 
냈다. 이런 부분들은 내부에 묻혀 있기 때문에 의식적으로는 인식할 수 
없지만, 여전히 우리 내부에서 활동하고 있다. 프로이트는 성에 대한 
관심은 사춘기에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는 
잠재력이며, 성의 충동과 이를 충족시키는 다양한 방법들은 인간의 
일반적인 성장이나 행복에 영향을 주었고 그것은 과거에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광범위하고 중요한 것임을 밝혀 냈다.
  몇 년 후 킨제이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성행위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이를 출판하기에 이른다. 그 후 마스터스와 존슨은 직접적인 관찰을 통해 
성행위에 대한 연구를 하기에 이른다. 비록 이런 연구들이 인간의 
성생활에 대한 지식에 많은 것들을 보충시켜 주기는 했지만, 아직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부분들이 많이 남아 있다.
  아마도 우리가 가장 잘 모르는 부분은 남자와 여자의 성적인 차이점일 
것이다. 몇 마디로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오랫동안 왜곡되어 온 점을 
중에서 핵심만 말해 보자면, 남자는 성관계를 갖고 싶어하는 반면 여자는 
싫어한다는 생각이다. 정상적인 남자는 호색적이지만 여자는 그렇지 않고, 
남자는 정력적이고 욕망에 넘쳐 있는 반면 여자는 수동적이며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 등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남녀의 성에 대한 태도를 뚜렷이 구분해 
왔다. 실제 자신의 경험을 통해 위의 생각들이 사실이 아님을 알고 있는 
사람들마저도 남자와 여자는 원래 그런 것이고 그래야 정상인 것으로 믿어 
왔다.
  그러면 무엇이 사실인가? 남자와 여자의 성에 대한 태도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남녀의 차이점을 설명하는 데 있어 사람들은 
어떤 고정된 형태를 만들어 내려는 경향이 있다. 즉, 서로 다른 특성들을 
나열해서 남자는 이러이러하고 여자는 이러이러한 것이라고 결론짓기를 
좋아한다. 이런 방법으로는 결코 남녀의 성적 특성을 정확하게 나타낼 수 
없다. 사람은, 남자는 모두 이런 식이고 여자는 모두 저런 식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단순한 동물이 아니다. 오히려 서로에 대한 두 가지 특성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이 사람이다. 우리 모두 이런 점을 마음속으로는 
알고 있다. 그러나 어떤 알 수 없는 이유로 인해, 특정한 고정된 형태를 
만들어 내고 이를 믿으려 한다. 이런 남성상과 여성상을 만들어 냄으로써 
사람들은 자기 자신도 그럴 것이라 생각하고, 거기에 맞추어 살려고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고정된 남성상과 여성상이 
만들어졌고, 거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아마 
오래 전에 어떤 사회적인 이유로 인해 남성은 성에 적극적인 것으로, 
여성은 소극적인 것으로 여겨야 할 필요가 있었고, 이 관념이 오랫동안 
보편화되어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갖게 된 것 같다.
  아무리 이런 시각에서 남녀를 보는 경향이 강하더라도, 의사 자신마저 
개인적으로 환자를 대할 대 위와 같은 잘못된 생각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 어떤 환자든지 남녀를 불문하고 성적 욕구에 적극적이거나 수동적일 
수도, 바라거나 주저할 수도, 대담하거나 부끄러워할 수도 있다는 보다 
자유로운 생각을 가져야 할 것이다. 만약 이런 식으로 의사가 남녀에 대한 
자신의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여자도 성에 대해 적극적일 수 있고, 
섹스를 원할 수도, 성적 흥분과 즐거움을 만끽할 수도, 남자를 능가할 만한 
오르가슴을 느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며, 또 이런 
가능성을 인정하게 되면 남자라고 해서 항상 섹스를 원하는 것은 아니고, 
항상 부인보다 섹스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며, 항상 섹스를 원하고, 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과, 항상 발기가 되고 성적 쾌감을 
느끼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런 이해를 
근거로 의사가 환자를 대한다면, 기존의 관념과는 다른 관념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얼마나 많은 의사들이 이렇게 할 수 있을까?
  자기 남편은 지나치게 섹스를 요구하고 자기를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부인을 대할 때, 얼마나 많은 의사들이 예외적인 가능성을 
고려해 볼 수 있을까? 자신의 남편을 섹스광이라고 낙인찍는 부인을 대할 
때, 어쩌면 그녀가 성적으로 지나치게 수동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의사가 몇이나 될까? 대부분의 의사들은 자신들의 남성적인 편견으로 인해 
성적으로 굉장히 적극적인 남성을 대할 때 혹시 그가 성적으로 수동적인 
면을 숨기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
  이야기를 바꾸어, 남편이 자기 아내의 성적 욕구를 불평할 때, 많은 
의사들은 그 남편이 여자란 항상 수동적이어야 한다는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또는 자기 아내는 섹스에 
너무 무관심하고 지나치게 수동적이며 섹스를 싫어한다고 불평하는 남편을 
대할 때, 아내의 무반응은 남편이나 자기 자신이 생각할 때 비정상적인 
자신의 성적 욕구를 표출하지 않기 위한 일종의 방어 수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못한다. 이런 종류의 불평들을 잘 연구해 본다면, 결혼으로 인해 
발생하는 여러 가지 성적 문제나 다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발견하게 될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불평이란 그 속에 진실을 
숨기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의사가 주의를 기울인다면, 불평이란 화를 
내거나 반항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불평이란 아무것도 
아니다. 이는 슬픔, 혼란, 의심의 표현이다. 대부분의 불평은 복잡하게 얽혀 
있고 과장되어 있으며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남편의 성적 
욕구나 그의 지배적인 행동들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마찬가지로 
여자는 어떠해야 한다는 여성상을 갖고 있는 남성은 자기 아내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을 것이다. 어떤 불평이든 그 뒤에 숨겨져 있는 것을 찾아야 
한다. 예를 들어, 아내는 남편의 여성적인 면을 숨기고 있을지도 모르고, 
남편은 아내의 남성적인 면을 숨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부부에게 
있어 이런 점은 내놓고 하는 불평들보다 더 큰 문제점으로 여겨질 것이다.
  성에 대한 고정  관념으로 인해 죄의식을 느끼는 경우의 한 예를 불감증 
환자인 여성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그녀는 오르가슴을 느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일 주일에 한 번씩 수개월 
도안 상담을 계속한 후에도 별다른 이야기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몇 
가지 구체적인 이야기를 해 주었다.
  신혼 초기에는 섹스를 할 때 오르가슴을 느꼈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쉽게 나왔지만 나머지 이야기들은 여간해서 하지 않았다. 겨우 그녀는 
어떤 체위로 관계를 가질 때만 오르가슴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 체위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말하지 않고, 다만 그것이 너무 끔찍스러워 남편이나 
자기 자신이 그런 식으로는 더 이상 계속할 수가 없다고만 이야기했다. 몇 
주가 지난 후, 많은 고민 끝에 마침내 그녀는 그 체위를 설명하게 되었다. 
그것은 그녀가 위에, 그리고 남편이 밑에서 관계를 갖는 것이었다. 여성인 
자신이 움직이고 남편은 가만히 있는 이런 체위에서는 아주 강한 
오르가슴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문제는 관계가 끝난 후였다. 이런 
식으로 일을 치르고 나면 항상 그녀는 죄의식을 느꼈고, 더럽다거나 
타락한 기분이 들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그녀는 여성의 위치에서 관계를 
갖는 남편이 이를 어떻게 생각할까 걱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가장 불쾌한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의 남편이 남편 자신은 
아래에 있고 아내가 적극적인 상대가 되는 것을 좋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남편이 여성적인 욕망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녀를 끔찍하게 했고, 비록 더 이상 오르가슴을 느끼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런 체위로는 관계를 갖고 싶지 않게 된 것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만약 남편이 아래에 있기를 거부했다거나 그녀가 남자 
역할을 하는 데 대해 약간의 남성적 반항이라도 했더라면 그 체위를 계속 
유지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 그녀가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그녀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르가슴을 
느낄 수 있는 그 방법을 중지하게 만든 것은 그녀 자신이 갖고 있는 
남성성에 대한 두려움, 그녀가 적극적이고 지배하는 역할을 할 때에만 
쾌감을 느낀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녀로서는 남녀 모두가 성적으로 
적극적일 수도 있고 수동적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이상적인 남성성에 집착했던 한 남자 환자는 자신의 증세를 설명하면서 
자신의 아내는 불감증이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단지 그 말뿐이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전혀 불감증이 아니었다. 그녀는 오르가슴을 느낄 수 있었다. 
다만 문제는 남편이 그녀의 성기를 손으로 자극해 줄 때만 그렇다는 
것이었다. 단순한 성교만으로는 오르가슴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아내 때문에, 그 환자는 관계를 가질 대마다 손으로 그녀가 오르가슴을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습관이 생겼다. 이런 특별한 자극으로 그녀는 
절정에 도달할 수 있었고, 거의 10년 동안 이런 형태의 섹스는 그들 
모두를 만족시켜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를 찾아오기 바로 얼마 전 그는 갑자기 이런 아내의 
욕구에 반감이 일어났고, 더 이상 관계를 가질 때 그의 손을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결국 아내는 전혀 쾌감을 느끼지 못했고 좌절감만 느꼈다. 그 역시 
아내와 마찬가지로 불행해졌고 그들의 결혼 생활마저 짜증스러워졌다.
  이 이야기를 듣고난 후, 나의 첫 번째 질문은 왜 아내가 오르가슴을 
느끼는 방법을 그만두었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도 잘 모르겠지만, 
단지 그렇게 하는 것이 지겹게 느껴졌고, 그래서 그만두기로 했다는 
것이다. 잠시 후, 자신들의 성 관계가 마치 '자위행위를 하는 것 
같았다'라고 덧붙였다. 또한 아내의 문제를 자신이 이런 식으로 채워 주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아내가 건강한 여성이라면 정상적인 관계에서도 
오르가슴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기 자신, 특히 자신의 
페니스가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만약 그의 페니스가 정상이라면 손가락이 
하는 일을 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아내가 
자신의 손가락에 반응을 한다면 자신의 페니스에도 반응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이러한 고민이 결국은 자신의 남성다움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만약 그가 진짜 남자라면, 자신의 페니스만으로도 아내에게 
쾌감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성교 
때 손을 사용하지 않게 되었고 자신이 일체 다른 행위 없이도 아내를 
만족시켜 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노력해도 잘 되지 않았다. 그의 페니스는 결국 그를 실망시켰고, 
마침내 자신은 남자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아내는 그가 다시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진심으로 잘 대해 
주었다. 그녀는 그들이 지금가지 10년 동안 얼마나 잘 지내왔는지, 그리고 
이전의 방법으로 서로 얼마나 만족해  했었는지를 그에게 이야기해 주며 
예전으로 돌아갈 것과 자기 자신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라고 말해 주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예전의 방법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그 자신의 남성다움의 결핍을 인정하는 
것이며, 더욱이 자신의 여성다움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환자는 계속 상담이 진행되면서, 좀더 자연스럽게 자신이 여자라고 
생각하게 된 몇 가지 증거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이런 이야기는 그의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고 또 즐거웠던 일이었으므로 좋은 감정을 
가진 채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야기가 자신의 여성성을 인식하는 
부분에 이르자 그런 것들을 비난하며 이야기를 중지해 버리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반응이 그가 지금까지 아내를 위해 해왔던 행위를 갑자기 
비난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아내와 함께 가져온 
관계들이 너무도 즐거웠고 자신과 아내는 정말 잘 어울리는 부부로 
생각했었다고 지난날을 떠올렸다. 그러다가 자신의 손을 사용했던 순간에 
이르렀을 때, 그가 그렇게 했던 것은 단지 아내를 즐겁게 해 주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그것을 즐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의 
손 사용이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즐거움이었다는, 그리고 아내가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자신이 그렇게 하고 싶어했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자, 그는 갑자기 자신의 여성성이 두려워졌다. 그리고는 아내와 
자신에게 오히려 성공적인 성적 분출구였던 그 방법을 즉시 포기하게 된 
것이다.
  이 환자의 문제는 여기 제시한 것보다 훨씬 복잡한 것이었고, 그의 
아내에게도 확실히 문제가 있었지만, 나는 그 이상 그들의 문제에 
파고들지 않으려 했다. 오히려 10년 동안 그들은 자신들의 문제에 잘 
적응해왔기 때문에, 최선의 치료는 그들을 과거의 적응상태로 되돌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수십 차례의 상담이 진행되는 동안, 그 
환자는 자신에게 미묘하게 영향을 미치는 것들을 이해하게 되었고, 그것들 
중 무엇이 더 중요한가를 깨닫기 시작했다. 그러자 남성성이나 여성성에 
대한 두려움이 확연히 줄었고, 그들이 성적쾌감을 느낄 수 있었던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다시 되돌아갈 수 있었다.
  성 문제는 남성과 여성에 대해 사회에서 이상적이라고 여겨지는 개념과 
자신의 성적 취향의 갈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요컨데, 우리의 도덕 
관념이라고 할 수 있는 남성과 여성에 대한 고정 관념과 우리의 성적 
욕구가 맞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죄의식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심리 과정은 우리 모두에게 좀더 성적 욕구를 억제하고 사회적 
관습에 맞추어 집단 의식을 따르게 하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힘이 남성과 여성에 대한 잘못된 관념을 보편화시키고, 그 생각을 
고수하게 만드는 것이다. 성적 쾌감을 제한하고 성 문제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는, 이런 사회 조직 안에서 개인이 치르는 값이 꽤 비싼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회는 한 사람과 여러 사람이 조화를 이루면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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