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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정보/마음

넷째 마당 - 죽음에서 벗어나기

by Healing New 2020. 6. 28.

    죽음을 넘어 부활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지 사흘만에 다시 부활한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
니다. 부활의 가장 큰 의미는 몸이 죽더라도 생명은 영원히  죽지 않음을 여실히 증거한 것
이 아닐까요? 달마대사가 부활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같은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달마대사
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와 포교활동을 하는데 이를 시기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어느 시대고 위대한 사람은 꼭 시기심이나 박해의 대상이 되는 것 같습니다. 달마를 독살
하려고 다섯 번이나 시도했지만 독약을 마시고도 몸에서 독이  받지 않아 죽지 않았습니다. 
여섯 번째는 "내가 중국에서 할 일을 다 했으니 이제 인연이 다됐다"고 생각하고 독을 받고
서 열반에 들었습니다. 시신을 입관해서 웅이산에 매장했습니다. 
  그 무렵 위나라의 송운이라는 사신이 인도에 갔다가 중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파미르 고원
을 넘어 오는데 웬 수염이 덥수룩하고 늙수그레한 승려가 긴 지팡이를 어깨에 걸쳤는데 거
기에 짚신 한 짝만 매달려  있었습니다. 송운이 수인사를 하며 물으니  그 유명한 달마라고 
합니다. 위나라에 돌아와 들으니 달마는 이미 독살되어 매장되었다고 합니다. 너무 이상하게 
여겨져 묘소를 파 보았는데 관속에 시체는 간 곳이 없고 짚신 한 짝만 남아 있었다는  것입
니다. 
  예수님과 달마대사가 보여주고 있는 부활은 몸 너머에 영원히 죽지 않는 진짜 생명이 실
존하고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실은 예수만 부활하고  달마만 부활하는 것이 아니
라 우리들 모든 사람의 생명은 본래 죽음이  없으므로 누구나 다 부활한다고 볼 수 있습니
다. 부활한다기보다는 우리 생명은 처음부터 아예 죽지 않는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한 
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내 몸이 죽어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겉모양만 바뀔  뿐 내 생명이 죽는 일은 결코 없습니
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망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육신으로서의 나만이 빛과 같은 
실체로서 존재합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다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지배적인 신념은 "죽음은 내 생명의 끝이다, 죽어버리면 모든 것이 
쓸 데 없다, 죽은 다음에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누가 알겠는가, 그러니 살아 있는 동안  잘 
먹고 잘 입고 즐기면서 살면 그만이다" 이런 식입니다. 만일 당신이 지금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 생각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죽음은 내 생명의 끝이다"라는 생각이 나오는 곳이나, 당신의 몸이 나오는 곳이나, 나무, 
산, 들, 우주 삼라 만상 모든 존재가 나오는 곳이나 그 뿌리를 캐고 들어가면 모두 같은 곳, 
같은 자리입니다. 그 자리가 바로 우주가 창조되어 나오는 근원이요, 내 생명의 근원입니다.  
  사실은 몸이 내가 아니라 그 자리가 바로 나입니다.  몸은 단지 그 자리에서 내가 조각품
을 만들어 내듯이 창작해낸 창작품입니다. 그런데 나는 그동안  내가 만들어낸 조각품에 너
무 애착을 가진 나머지 그 속에 들어가 꽉 쳐박혀  지내왔습니다. 이것에 대한 애착이 너무 
지나쳐서 이젠 이 조각품이 바로 나라는 착각 속에 빠져 있습니다. 조각품을 지어낸 근원에 
대해서는 망각하고 있는 것이지요. 객지에 나가 사는 동안  고향집을 깜빡 잊어버릴는 것처
럼 말입니다.  
  이러한 배경을 바로 알게 될 때 비로소 내 몸의 죽음이 곧 내 생명의 죽음은 아니라는 사
실을 깨닫게 됩니다. 근원으로서의 내가 조각품을 창조해 보았듯이 근원으로서의 나는 언젠
가는 그 조각품을 버리는 경험도 하게 됩니다. 근원인 내가 조각품의 경험을 끝내고 조각품
을 버리는 경험을 시작하는 것, 그것이  바로 몸의 죽음입니다. 그러니 몸의 죽음이  근원인 
나의 죽음은 아닌 것입니다.
  근원은 원래 죽음이 없습니다. 
  만일 근원으로서의 나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오직 '경험하는 것'이라고  답할  
수 있습니다. 나의 신념대로 지어낸  몸이라는 창조를 내가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것뿐입니
다. 
  나는 내 몸의 삶도 경험할 수 있고 내 몸의 죽음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종교나 철학, 사상, 이념 같은 다양한 신념체계들을 음미하고 감상할 수  있습니
다. 마치 미술관에서 작품을 감상하듯, 그 중에 내 마음을 끄는 것이 있다면 거기에 푹 빠져 
버리듯이 말입니다. 
  신념체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신념체계가  마음에 든다면 거기에 빠져버리고  맙니다. 
그렇게 되면 나는 그 신념대로 경험하게 되겠지요. 
  당신의 몸이 바로 당신이라는 신념에 빠지게 되면 당신은 몸과 함께 운명을 같이 하면서 
낳기도 하고 죽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당신의 몸을 하나의 창조물로 여긴다면, 그
리고 그것을 만든 존재가 바로 당신이라는 신념을 갖게 된다면 몸이 낳고 죽는데서 한 발짝 
떨어져서 당신의 몸을 작품을 감상하듯이 감상할 수 있습니다. 
  몸이라는 창조를 지어내는 근원이 바로 당신입니다. 이런 사실을 당신이 가슴에 사무치도
록 느끼고 있다면 당신에게 죽음이 찾아 올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죽으려 해도 당신의 몸
만 사라질 뿐 당신의 생명은 결코 죽지 않습니다. 
  
  나는 그동안 병원에서 많은 사람들의 임종과 주검을 보았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이 죽을 
때 고통스런 모습을 보여 줍니다. 어떤 사람들은 차마 보기 괴로운 단발마적 발악을 하기도 
합니다.  
  시신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알겠지만  시신이 보여주는 얼굴은 생전의 얼굴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아무리 사랑하던 사람이라도 일단 죽고 나면 대부분은  시체 옆에 있기를 싫어합
니다. 쳐다보기도 싫어합니다. 그러나 아주 드물기는 하지만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한 채  편
안하게 죽는 분도 있습니다. 
  과거의 많은 성직자들은 한결같이 위대한 주검의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죽음을 통해서 
찬란한 광명을 보여주는가 하면 더러는 자신의 시체를 광명의 불로 스스로 태워 소멸시키기
도 했습니다.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가는 그가 죽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생전에 아
무리 큰소리치던 영웅호걸도 죽어가는 모습을 위장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욕망,  저
항, 이기심에서 완전히 벗어나 관용과 자비심으로 충만해 있다면  죽을 때까지 그의 얼굴은 
결코 고통스럽거나 추해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반대로 죽는 순간까지 그런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아마 그는 고통스런 과정을 겪게 
되겠지요. 그런 죽음을 옆에서 지켜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곱게 잘 죽어야 겠다는 소망을 품
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 즉 인생이라는 것은 어쩌면  죽음을 준비해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곱게 잘 죽기 위해서는 곱게 잘 살아야 한다는 뜻이지요.
  잘 죽기 위해서는 임종 때  어떤 마음을 먹고 있는가가 제일  중요합니다. 그래서 흔히들 
인생의 결산은 임종 때 먹는 마음이라고 하지요. 우리가 죽음 다루기니 생명의 근원과 하나
되기니, 말하고 있는 것은 임종 때 마지막 마음을 잘 먹기 위한 훈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
닙니다. 평소에 제법 양심도 바르고 의롭게 살았다하더라도 죽는  순간에 마음을 잘못 먹으
면 사후의 자신의 의식세계에 큰 혼란을 빚게 될 것입니다. 
  "천지만물은 나와 더불어 조금도 차이가 없는 오직 하나의 생명이며 여기에는  무한한 행
복, 지혜, 자비가 충만해 있고 이것은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의 빛이다"
  이런 생각이 임종 때 먹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마음이 아닐까요? 평소에는 이런 생각을 안
하다가 죽을 때가 되어서 갑자기 떠올리기는 힘든 일이겠지요.  그러므로 평소에 그런 마음
가짐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따라서 늘 이런 생각이 자신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훈련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죽는 순간 오로지 이런 마음으로 충만해 있다면 그는 몸이 죽더라도 생명이 죽지  않음을 
경험할 것이고 그의 죽음은 편안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줄 것입니다.  
    죽음에서 해방되기
  죽음이란 내 생명이 모두 끝나버리는 종착역이 아닙니다. 
  또한 죽음이란 내가 영원히 빠져 나올 수 없는 어떤 함정도 아닙니다. 
  흔히 삶이란 무상하다고 합니다. 
  삶만 무상한 것이 아니라 죽음도 무상한 것입니다. 무상이란 항상이 없는, 한 순간도 그대
로 머물러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삶이 고정된 실체가 아니듯이 죽음  또한 고정된 실체가 
아닙니다. 
  죽음이라는 리얼리티는 삶이라는 리얼리티와 마찬가지로 나의  의식의 차원에 따라, 나의 
신념의 내용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가변성의 대상입니다. 
  삶이 하나의 한정된 창조이듯이 죽음 또한 하나의 한정된  창조입니다. 내 생명의 근원을 
한정없는 백지에 비유할 수 있는데  거기에는 한정된 창조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이러한 
근원으로서의 내가 한정된 창조들을 지어낼 수도 있고 반대로 지어내기를 그만둘 수도 있습
니다. 나는 모든 창조들을 다 다루어 내고 조절할 수 있는 영원한 근원이자 배경입니다. 
  죽음이라는 창조 역시 내가 지어낼 수도 있고 내가 지어내기를 멈출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머무르는 의식의 차원, 혹은 의식의 수준을  의도적으로 바꿀 수가 있습니
다. 모든 존재들이 따로 분리되고 독립되어 보이는 개별의식, 자아의식의 수준에 내가  머무
를 수 있는가 하면 모든 존재가 통합되어 하나의  생명으로 느껴지는 우주의식, 순수의식의 
차원에 내가 머무를 수도 있습니다. 이 두 차원의 의식 중 어디에 머무를 것인가는 내기 의
도하고 결정할 일입니다. 
  현상계의 어떤 차원에서 볼 때는 우리 몸의 수십조 개의 세포 하나하나는 독립된 생명의 
단위입니다. 그러나 내 몸으로부터 세포들을 낱낱으로  떼어내서 분리시킨다면 그것들은 각
각의 생체들로서 존립할 수가 없습니다. 
  우주 가운데서 서로 분리되어 보이는 사람들, 동물들, 나무들, 별들........ 우주의 모든 존재
들이란 우리 몸의 세포들 같은 것이어서 이들은 낱낱으로  분리되어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너와 내가 서로 떨어져 존재하고 있다는 분리감은 착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몸이란 세포 하나하나가 나서 죽고, 나서 죽고를 계속하고 있는 흐름인 것처럼 우
주 또한 낱낱의 존재들이 나서 죽고를 반복하고 있는 흐름입니다. 저 밤하늘에 반짝이는 아
름다운 별들도 나서 죽고 하는 흐름 속에 존재합니다. 모든  존재들이 나서 죽는 일을 계속
하고 있을지라도 우주라는 생명자체는 영생합니다. 
  나와 우주는 분리되어 따로 존재한다는 생각을 끝끝내 버리지 않기로 고집한다면 나는 나
고 죽는 일을 계속하고 있어야 하므로 항상 두려움 속에서 죽음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죽음이 있게 되는 원인, 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원인은  분리된 '나'라는 생각, '내가 따
로 있다'는 생각입니다. 반면에 죽음을 없애는 방법, 즉 내가 죽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분
리된 '나'라는 생각, '내가 따로  있다'는 생각이 소멸된 의식의  차원으로 들어가는 것입니
다. 
  내가 죽음을 다룰 수 있다는 생각이 환상이 아니라, 죽음  앞에서 나는 꼼짝 못한다는 생
각이 바로 환상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거의 모든 인류에게 정서적으로 가장 고통스럽고 
두려운 일이란 바로 죽음입니다. 죽음의 실체를 알 수 없으니까 막연하게 그것을 두려운 대
상으로만 보게 되고 따라서 죽음이라는 주제를 떠올리는 것 자체가 금기시됩니다. 
  많은 임종 환자들이 죽음 그 자체보다는 죽어가는 과정과 죽는 방법에 대해서 더 두려움
을 느낀다고 합니다. 죽음에 대해 탐구하는 의사들의 관찰에  의하면 모든 임종환자들은 자
신의 죽음이 임박해 올 때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스스로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임종환자들
은 얼마 안 가 자기가 죽게 된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가족들 앞에서 그 얘기를 털
어 놓을 수 없으니 혼자서 마지막을 힘들게 보낸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전문가들이 한결같
이 강조하는 바는 환자 자신이 주체적으로 결정하고 처리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
게 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죽음의 가능성을  솔직하게 터놓고 이야기하는 것이 
오히려 환자의 불안과 두려움을 줄여줄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죽을 때의 육체적 고통도 훨
씬 적어진다고 합니다. 그가 자신의 죽음을 다룰 수 있는 여유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병을 치유하려고 노력하던 때와 마찬가지로 죽을 때에도 죽음을 원만하게 받아들이기 위
해 노력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컨대 환자에게는 병과의 투쟁을 그만 두고 몸에 대한 집착에
서 스스로를 해방시킬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생활의료 4단계- 죽음 다루기>
  미국 텍사스 사이먼튼 암 연구소에서 암환자들을 위해 개발한 독특한 심리 요법 가운데는 
일종의 죽음 다루기 훈련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주로 임종을 눈  앞에 둔 환자들을 돕기 위
해 개발한 것인데 이 방법의 중심 사상은 "모든 일은 자신의  신념대로 경험한다"는 것입니
다. 죽음과 사후세계도 자신이 믿는 그대로 체험한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일종의 긴장이완과 상상법인데 환자의 신앙이나 신념 등을 참고하면서 그 연습 내
용을 조금씩 변형시킬 수 있습니다. 
  대체로 자신이 죽어가는 과정, 장례식의 과정, 천국으로 가는  과정, 또는 인간 세상에 다
시 태어나는 과정 등을 자신이 좋아하는 방식대로 선택하고 자신이 믿는 대로 상상하는 것
입니다. 이 훈련을 되풀이하다 보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현저하게 줄어들게 됩니다. 이 훈
련을 되풀이하다 보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현저하게 줄어들게 됩니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한 전투기 조종사가 고엽제를 공중살포한 일이 있었는데 전쟁이 끝
난 뒤 그는 갑상선암이 걸렸습니다. 임종을 눈앞에 둘 정도로 악화된 상태에서 그는 극적으
로 회복되었다고 합니다. 바로 이 '죽음 다루기' 훈련을 열심히 한 덕분에 말입니다.  
  그러면 사이먼트의 죽음 다루기 훈련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  살펴봅시다. 이 훈련은 마치 
죽음 예행 연습 같은 인상을 주고 있기 때문에 단지 죽음의 공포를 조금 경감시켜주는 정도
를 목표로 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훈련이 기대하는 궁극적 목표는 
몸은 죽어도 생명은 영원히 죽지 않는 다는 것을 자각하게 하고 나아가 죽음에서 영원히 벗
어날 수 있는 방법을 스스로 찾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내 생명의 본체는 죽음이 없는 영생
의 존재라고 하는 것이 사실이니까요. 
  처음에는 옆 사람이 천천히 읽어주거나 녹음기에 녹음해 두고 그것을 들으면서  연습하면 
되지만 자주 되풀이해서 연습하다 보면 익숙해져서 그러한 도움 없이 혼자서도 할 수 있게 
됩니다. 
  1. 조용한 분위기에서 편안한 자세를 취한다. 
  2. 긴장을 풀기 위해 1-2분간 천천히 아랫배로 호흡한다.
  3. 긴장이 풀렸다고 생각되면 이제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응시한다.
  4. 자신의 죽음의 순간을 상상해 본다. 자기의 시신 옆에 둘러앉아 있는 사람들을  그려본
다. 그들이 자기의 죽음 앞에서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 그들이 무슨 말을 하며 어떻게 느
끼고 있는가? 그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충분한 시간 동안 상상해 본다. 
  5. 자기 시신의 입관 절차와 이어서 장례의식이나 추도행사를 그려본다. 여기에는 누가 참
석하고 있는가?  그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어떤 느낌들을  가지고 있는가? 역시 
충분한 시간을 들여 상상해 본다. 
  6. 자기의 몸이 죽은 후에 자기 의식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몸이 죽은 다음에 자
기 의식이 찾아간다고 생각하는 곳으로 의식을 보낸다. 그곳에서 조용히 머물면서 몇 분 동
안 그 곳을 느낀다. 
  7. 이제 자기의 의식을 우주 가운데로 떠나 보낸다. 우주의 근원이자 내 생명의  근원이라
고 생각되는 곳에 자기가 있다는 느낌이 들 때까지, 즉 생명의 근원과 하나되는 순수의식의 
차원에 있다는 느낌이 들 때까지 거기에 머문다. 
  8. 이제 여기에서 지난 인생을 회고해 본다. 자기가 즐겨서 한 일은 무엇인가? 생전에  꼭 
이루고자 했던 목표는 무엇이었나? 무슨 일  때문에 분노했는가? 그 분노를 지금도 가지고 
있는가?
  9. 이제 당신은 생명의 근원에 안주하겠는가? 아니면  어떤 천상에서 행복을 누리겠는가? 
그것도 아니면 다시 새로운 몸을 가지고 이 세상으로 돌아와 새 인생을 설계하겠는가? 생명
의 근원이나 천상에 안주하기로 결정한다면 그곳은 이러할 것이라고 당신이 이해하고  상상
하는 대로 그곳의 인상을 떠올려 충분한 시간을 들여 경험하라. 
  10. 만일 인간 세상에 다시 돌아오기로 결정했다면 지난 생과 같은 부모를 선택하겠는가? 
아니면 새로운 부모를 선택하겠는가? 새로운  부모의 모습은 어떠하며 어떤 인품을  지니고 
있는가? 형제 자매는? 그들은 지난 생과 같은 형제 자매인가? 직업은 무엇으로 할 것인가? 
새로운 인생에서 성취하고자 하는 목표는 무엇인가? 새로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
엇인가? 새로운 인생 전반에 대해 주의 깊게 살펴본다. 죽음과 재생이 자기 삶 속에서 계속 
이어져 되풀이되고 있음을 음미해 본다. 
  11. 마음속으로 이미 죽음과 재생의 과정을 경험했으니 인생의 과정에서 죽음과 재생이라
는 것이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치는 것이구나 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라.  이 과정에서 충분한 
시간 동안 그것을 경험한다. 
  12. 천천히 눈을 뜨고 현실로 돌아와 완전히 깨어난다. 
  
  이 훈련을 경험해 본 환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죽음을 상상해 보니까 지레 짐작으로 겁을 
먹고 있던 것과는 달리 죽음이라는 것이 결코 두렵거나  고통스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 장례식을 상상했을 때는 "아, 내가 이 세상에 없더라도 가족과 친구들은 그런 대로 잘 
살아 가겠구나" 싶어 마음이 편안해지기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이나 천상에 머물기로 결정한 사람들은 내 몸이 죽더라도 내 생명 자체는 조
금도 훼손됨이 없이 영생한다는 것을 확인했으며, 인간 세상에만 삶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
간 세상을 떠나니 더 편안하고 행복한 삶이 있는 것을 자각하였다고 합니다. 
  재생을 결정한 환자들은 새로운 인생을 계획하고 자신이 원하는 인물로 다시 태어나는 것
을 상상해 봄으로써 내면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고 죽음이야말로 자기가 원하는  인간으로 
다시 나아가게 하는 새로운 길목이라는 것을 느꼈다고 합니다. 
  꼭 임종 환자가 아니더라도 본인이 원할 경우 건강한 노인이나 심지어 젊은이들에게도 이 
훈련을 시켜보았는데 그들 역시 죽음에 대한 관점과 태도에 큰 변화가 일어났고, 따라서 심
신의 평화를 회복시키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방법을 일상
생활에서 활용해 볼 수 있습니다. 
  단 한 가지,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생사관에는 대개 종교적인 신앙이나 철학적 신념이 뒷받침되어 있기 때문에  죽
음 다루기를 안내할 때는 어느 특정 종교를 전제하거나  강요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 
환자가 그 종교를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여서 믿게 된다면 상관이 없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는 오히려 환자에게 정신적 혼란과 부담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결국 임종환자
를 더욱 어려운 지경으로 빠뜨리는 셈이지요. 
  특정한 종교나 신념의 강요가 마치 폭력처럼 작용해서 환자를 더욱 힘들게 만드는 경우를 
나는 많이 보았습니다. 환자의 내면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신념이 존중되어야 합니다. 
    몸은 죽더라도 생명은 죽지 않는다. 
  평소에 양심이 바르고 곱게 살았다고 하더라도 죽을 때 마음 잘못 먹으면 사후의 의식의 
차원이 퇴락하겠지만, 평소에 조금 잘 못 살았다고 하더라도 "나와 더불어 천지만물이 하나
의 생명이며 그것은 영원한 생명의 빛이다"와 같은 마음을 놓지 않고 임종을 맞이한다면 그
의 의식은 높게 진화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눈에  보이는 현상세계, 자기  몸이나 가족이나 자기  소유물 같은  
모든 물질적 존재가 실은 허상이고 착각이며 모두 텅 비어 없는 것으로 보는 것이 제일  좋
습니다. 이 텅 빈 허공 가운데  참 생명의 세계가 있는데 여기에 내  생명의 뿌리인 순수한 
빛이 가득 차 있다는 영상적 이미지를  관찰하면서 한시도 여기로부터 의식이 떠나지 않는 
것이 제일 편하고 좋을 것입니다. 
  몸이 죽을 때 자기의 의식만 떠나갈 뿐 가족, 재산,  권력, 명성 같은 일체의 소유는 하나
도 가져가지 못합니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볼 때 생전에 내 것이라고 고집했던 소유가 내 것
도 네 것도 아닌 것이고 내가 한때 잠시 관리했을 뿐입니다. 
  내 몸도 실은 내 소유가 아닙니다. 몸도 바로 보면 내 것도 네 것도 아니며 내가 한 시절 
잠깐 관리했을 뿐입니다. 따라서 죽을 때  자기가 가지고 갈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임종 때 
마지막으로 먹고 있는 마음뿐입니다. 즉 의식뿐입니다. 그러므로 죽을 때 가지고 가는  마음
이 생전에 소유하던 하늘같은 부와 명성보다 훨씬 귀중한 것입니다. 
  생전의 부모도 배우지도 자식도 자신의 영원한 의지처가 못됩니다.  그들 역시 한정된 시
간 동안만 조금 의지가 될 수 있었을 뿐입니다. 영원하고도 완전한 의지처야말로 내 생명의 
고향인 순수의식입니다. 순수의식이란 어떤 논리가 아니라 곧 생명입니다. 여기에는  무한한 
행복, 지혜, 자비, 능력이 원만하게 갖추어져  있습니다. 무한가능성으로 충만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죽음을 떠나 영생하는 생명의 빛입니다. 
  누가 지금 임종의 문 앞에 있다고 합시다. 
  "당신은 죽음이 없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답은 오직 "그렇다"입니다. 두 번째 똑같은 질문에 대해서도 그의 유일한 답은 역시 
"그렇다"입니다. 백번 천번을 묻더라도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답은 오직 "그렇다"뿐입니다. 
  암이나 에이즈 같은 난치병도 내 생명과  더불어 평등 무차별한 영생하는 생명의  빛입니
다. 우주의 존재 가운데 생명의 빛이  아님은 없습니다. 이와 같이 투철하게 믿고  느낀다면 
암세포까지도 조화로운 생명의 빛인데 어떻게 그 사람의 생명을 해치겠습니까? 가슴에 사무
치는 굳센 믿음은 천지우주를 움직여 그의 생명을 옹호할 것입니다. 설령 그의 몸이 죽는다
고 하더라도 이러한 믿음을 오로지 간직한 채  죽는다고 할 때 그의 신념대로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을 기필코 얻을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을 자각하기 
  현실적으로 죽음이야말로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는 일과 함께 인생에서 가장 큰  사건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생사대사라고 하지요. 그러므로 일생에 가장 큰 일이 생사를 해결하는 
것, 곧 생사에서 완전히 벗어나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인생의 목표를 이와 같이 생사를 떠나 영생을 얻는 것과 같은 완벽하고도 구경적인 근본
에다 두지 않고 어정쩡한 어떤 중간 정도의 성취를 목표로 하게되면 그 중간 목표도 잘  이
루어지지 않을뿐더러 살아가는 동안 항상 어려움에 걸리고 맙니다. 
  가령 내가 몸이 아파서 낫고자 하더라도  생사를 뛰어넘어 영생을 얻겠다고 하는  최상의 
궁극적인 데다 목표를 두고 정진하면 몸이 아픈 정도는 부수적으로 저절로 해결되고 말 것
이나 겨우 몸 아픈데다만 마음을 두고 있을 때는 몸도 해결이 잘 안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평생동안 자기 몸뚱어리, 자기 가족 몸뚱어리 뒷감당만 하다가 끝나버립니다. 어언간 문득 
죽음이 눈 앞에 다가섭니다. 그러므로 편안하고 아름답게 잘  죽기 위해서 나아가서는 생사
를 완벽하게 해결하기 위해서는 늘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죽음을 다루는 근본적인 방법이자 최상의 방법은 바로 생명의 근원을 자각하기입니다. 이 
방법을 온전히 잘 하고 있다면 이제껏 한 다른 말들은 다 군더더기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은 대개 모양이 있으면 살아있고 모양이 없어지면 죽었다고 규정합니다. 그러나 실
은 모양이 있고 없고에 상관없이 내 몸이  있고 없고에 상관없이 내 생명의 근원은 본래가 
죽음이 없는 영생의 생명이라는 것을 꼭 이해해야합니다. 
  들판에 세워진 집이 오래되어 허물어지면 집은 사라져 보이지 않더라도 들판이라는  근원
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듯이 내 생명의 근원은 내 몸이 사라지더라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내
가 태어나고 죽는 것은 생명의 근원인 순수의식의 무한한 바다 위에 작은 파도가 하나 떠올
랐다가 사라지는 것이나 같습니다. 수백 억의  물거품이 떠올랐다가 꺼졌다를 계속하더라도 
그 본질인 바닷물은 영원합니다. 바다라는  하나의 생명은 영원히 계속됩니다. 파도  하나가 
내가 아니라, 전체 바다가 바로 나입니다.   
  물질 육신으로서의 나를 하나의 파도에 비유할 때 그것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를  반복하
는 것은 바로 윤회를 의미하는가? 전생과 후생은 존재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전생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전생으로 안내
한다는 전생 전문가들도 있습니다. 지난 몇십 년 동안  서양의 어떤 의사들이나 치료가들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전생을 보여줌으로써 병을 치유시키는 이른바 전생퇴행요법을 환자 치료
에 응용하고 있습니다. 
  시간도 물질도 어떤 한계도 없는 우주의식, 순수의식의 차원에서는 전생도 후생도 그리고 
현생까지도 없습니다. 이 차원에서는 과거나 미래를 지금 지어내기로  결정하지 않는 한 과
거와 미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개별의식, 자아의식의 차원에서는 나는 한정된 시간 
가운데 있으므로 어제가 있으면 오늘이 있고, 오늘이 있으면 내일이 있듯이 전생과 현생, 후
생이 명백하게 존재하는 것처럼 경험될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에서 볼 때 현실이란 '분리된 나'의 착각이 빚어낸  환상이듯이 전생이나  후
생 또한 '분리된 나'가 지금 순간순간 지어내고 있는 환상입니다.  따라서 내 생명이 참으로 
추구해야 할 바는 전생, 현생, 후생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환상들 너머의  영원한  
배경, 어떠한 한정된 창조도 없는 생명의 근원에 통합하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현상세계의 관점에서 보면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이 분명히 있듯이  현상적 
생명의 나타남이 일회성이 아닐 것이고, 비물질적인 생명의 근원에서 보면 바다와 파도들이 
하나의 바다이듯이 모든 생명체들이 하나의 생명으로서 시간성과 공간성을 초월한 통합적인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몸이 죽더라도 생명은 죽지 않는다는 것을 참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내 몸이 한 번 태어
났다가 죽어 버리면 내 생명은  영원히 끝이다라는 생각, 그리고 반대로  내가 죽은 후에도 
이 몸과 이 마음은 이대로 영원히 지속된다는 생각, 이런 극단적인 견해는 모두 착각입니다. 
  이 우주에 단 하나 변화하지 않는 것은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사실뿐입니다. 모든 것은 
물 흐르듯 흘러가며 변화하고 있습니다. 삶과 죽음이야말로 이러한 변화의 양면성입니다. 만
일 누가 영원히 살고 싶다거나 또는 영원히 죽고 싶어한다 해도 이 두 가지는 모두 헛된 싸
움이며 환상입니다. 
  죽음 다루기의 목표는 몸이 내가 아니라 몸을 지어내고 있는 창조의 근원이 바로 나임을 
실감나게 체험하는 데 있습니다. 몸이라는 겉모습에 속지 말고  생명의 참모습을 바로 보자
는 것입니다. 
  신라 시대의 부설거사는 우주와 생명의 본성을 깨닫고 생사를 초월한 성인으로 높이 추앙
받는 분입니다. 이 분의 사허부구게는 역대로 생명의 본성을 탐구하고자 하는 구도자들에게 
큰 경책과 귀감이 되는 시입니다. 이  시에는 삶의 진정한 목표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생사를 떠나 영생의 행복을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한 교훈적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거느린 처자 권속 삼대밭 같고
     쌓여진 금은옥백 산더미 같아도 
     임종에는 홀로 외로운 혼만 떠나가니
     생각하면 이 또한 허망한 뜬거품이요
     날마다 힘들여서 살아온 세상길에
     벼슬길 올랐어도 머리는 백발이라
     염왕은 벼슬과 영화를 두려워 않거니
     생각하면 이 또한 허망한 뜬구름이요
     재주가 뛰어나서 말로는 요설변재
     천글귀 시를 지어 만호후를 경멸해도
     다생겁의 아만의 근본만 늘게 하나니
     생각하면 이 또한 허망한 뜬구름이요
     가사, 비구름 몰아치듯 설법을 잘하여
     하늘꽃 감동하고 돌맹이 끄덕여도
     껍데기 지혜로는 생사를 못 면하니
     생각하면 이 또한 허망한 뜬거품이로다
  처자 권속이 그렇게 많은 금은옥백의 재산이  산더미 같이 많다하더라도 임종 때는  결국 
혼자 외롭게 혼만 가는 것이니 생각해 보면 이것도 역시 허망한 뜬거품이라는 말입니다. 
  아침마다 날마다 하루 종일 애쓰는 세상길에서 벼슬이 가까스로 높이 좀 올라갈 때는 벌
써 센 머리가 되는 것이니,  염라대왕은 세상의 벼슬아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긴 대통령도 대통령 자리에 있을 때나 사람들이 조금 두려워할지 모르지만 그 자리를 그
만 두거나 죽은 다음에야 누가 그를 두려워하겠습니까? 따라서 우리가 높은 벼슬아치가 되
는 것도 생각해보면 허망한 뜬거품 같은 것이지요. 시를 잘  쓰고 학문을 잘해서 명예가 높
고 학식이 훌륭해도 그래서 왕조차 가볍게 볼 정도가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참다운 도리
에서 본다면 자만심만 더 키우는 꼴이니 이것도 참 쓸데없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한테 존경도 받고 경륜도  화려하고 진리를 입으로는 잘 설명할  수 
있어도, 체험이 되지 않은 지혜로는 생사 문제에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따라
서 이론만의 지혜, 머리로만  헤아리는 분별지혜로는 생사를 면할  수가 없으니 생각해보면 
이것 역시 허망한 뜬거품 같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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