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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정보/마음

일곱째 마당- 생명의 본성대로 사는 길

by FraisGout 2020. 6. 28.

    우리 몸의 감각이 곧 진실은 아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 몸의 감각기관이 사물을 보고 듣고 맛보
고 냄새맡고 만질 수 있는데 근거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우리 몸을 엄연한 물체 
덩어리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것을 보고 만질 수 있기  떄문입니다. 그렇지만 몸이라는 것이 
감각이 지각하는 것처럼 물질로 꽉 차있는 것이 사실일까요? 
  사람 몸의 약70%가량은 물로 되어있습니다. 물은 수소원자와 산소원자로 구성되어있지요. 
수소는 원자핵을 중심으로 1개의 전자가 산소는  8개의 전자가 돌고 있는데 원자핵이 주먹 
크기만 하다고 할 때 원자핵으로부터 약 20km나 떨어진 곳에 좁쌀보다 작은 크기의 전자가 
돌고 있습니다. 양자물리학은 모든 원자의  99.9%가 텅 빈 공간이며 이공간  가운데 진동하
는 에너지인 소립자가 빛의 속도로 활동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몸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원자들은 허공과 같아서 우리 몸은 사실 빈 것들의 모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왜 몸이 텅 빈 허공으로 지각되지 않고 물질로 꽉 차 보일까요?  
  우리 눈은 빛의 파장을 통해서 사물을 지각합니다. 눈이 지각하고 있는 빛의 파장의 진동
폭이 원자핵과 전자사이의 거리보다 커서 눈의 빛이 몸의 원자들 속을 뚫고 지나가지 못하
기 떄문입니다. 이를테면 테니스 공의  크기가 테니스네트의 구명보다 크기  때문에 네트에 
걸려 통과하지 못하는 이치와 같습니다.  만일 우리 눈이 x선으로 지각한다면  딱딱한 뼈는 
통과하지  못하고 물렁물렁한 조직은 통과하므로  사람 몸은  해골과 뼈로만  보일 것입니
다. 더 짧은 파장인 감마선으로 지각하게된다면 사람  몸을 다 투과하여 몸은 흔적조차  보
이지 않을 것입니다. 마치 바람이 그물에 걸리지 않고 다 통과하듯이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 눈의 지각능력은 상대적이며 극히 한정되어 있습니다. 우리 눈으로 볼 수 있
는 가시광선 너머에는 우리 눈으로 감지할 수 없는 주파수를 가진 빛의 영역이 가시영역과
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넓게 펼쳐져 있습니다. 우리  눈앞에 엄연히 존재하는 많은 대상들
을 우리는 지금 못보고 있습니다. 빛뿐만이 아니라 소리, 냄새 , 맛, 촉감들도 사람의 감각기
관은 극히 한정된 범위의 것만 지각할 수가 있고 그 범위 너머의 무한히 넓은 영역의  것들
은 다 놓치고있는 것입니다. 감각기관에서 보내오는 반응의 양과  농도가 너무 거칠고 크기 
때문에 이 거친 것이 섬세한 지각과 느낌을 제압한 나머지 우리의식이 감각기관의 거친 지
각에만 반응하는 꼴입니다. 
  내 감각기관으로 감지가 안되는 그 넓은  영역의 것을 없다고 주장하거나 감지되고  있는 
좁은 범위의 것만 사실이라고 고집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마치 대롱을 통
해서 하늘을 내다보고 대롱 속에 비치는 하늘만 하늘이고 대롱 밖의 것은 하늘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겠지요. 우리 감각기관은 우주와 세계를 몇  만 분의 일도 감지하
지 못하고 있습니다. 감각기관에만 의존하게 되면 환상을 실상으로, 가짜를 진짜로 잘못  보
게 되거나 거꾸로 보는 착오에 빠지게 됩니다. 태양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집니다. 우리 
감각기관은 날마다 태양이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는 것을 의심할 바 없는 사실로 받
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구의 자전현상에 대한 우리 감각기관의 착각입니다. 감
각기관을 믿지 말아야합니다. 이들은 모두 착각을 가져다주는 틀린 잣대입니다. 아무리 뛰어
난 과학기술과 도구가 개발되어 놀라운 정보를 알아낸다 하더라도 그것 또한 우리  감각기
관과 한정된 의식의 필터를 통해서 다서 번역하여 인식해야 하므로 결국은 한정된 정보만으
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고 한정된  이해와 체험밖에 못하게 됩니다.  따라서  생명과 우주의 
본질과 실상을  사실대로 알고자 한다면 우리의 오관과 한정된 의식의 울타리 밖으로 나아
가서 탐색해야만 합니다. 이러한 탐색의  여행이 가능합니다. 바로 직관의 통찰력이  그것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감각기관에 의한 지각은  나와 대상을 이분화  시킴으로써  필연적으로 
감각기관의 한계만큼만 경험하게 해주지만 직관은 나와 대상이 하나되어 내가 바로 그 대상
으로서 전체적으로 경험하게 해줍니다. 이 직관의  개발이 사실을 사실대로  바로 보게  하
는 잣대를 줄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직관의 능력을 키워갈 수가 있습니다.
    과학은 절대진리인가?
  언제부터인가 인류의 대중의식 가운데는 과학이 아니면 진리가 아니라는 집단신념이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실증과학을 통해서 증명되지 않은  것은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겠다
는 태도입니다. 과학적인 증거가 있는 것만 진실이고 과학의 영역 밖의 것은 진실이 아니라
고 고집한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과연 과학으로 증명된 것은 확실히 진리라고 믿어도 괜
찮을까요?
  과학 맹신자들은 과학이야말로 명백한 객관적 사실이라고  주장하지요. 그들은 이러한 객
관적 사실체계를 진리로 증명하기 위해 그 증거로서 또 다른 많은 사실들은 동원하기도 합
니다. 이 증거를  보아라. 그런데도 진실이 아니냐는 식입니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그 사실
증거라는 것이 하나의 사물에 작용하는 어떤 요인이 그 밖의 다른 요인들과 얼마만큼의 관
계를 가지고 있다는 강한 믿음일 뿐입니다. 따라서 과학이란  세상의 여러 신념체계들 가운
데 돋보이는 하나의 신념체계일 뿐입니다.  과학자들도 대개는 자기 생의  말년에 지금까지 
옳다고 믿었던 그 믿음에 이의를 나타내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동안 증거로 써왔
던 사실이라는 것이 자신의 관점에 대한 강한 확신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다
른 패러다임도 받아들이게 되는 것 같습니다.
  과학이란 우주 가운데 존재하는 다른 창조와 마찬가지로 한계와 제한을 가진 창조입니다. 
모든 창조물 등은 한결같이 집단 신념에  의해 창조되고 경험되며 경험의 한계에  도달하면 
소멸되는 사이클을 따라갑니다. 실증과학이라는 창조 역시 이 사이클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계의 모든 사물들은 시간성과 공간성의 한계 내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세계를 빚어내는 생명과 우주의 근원, 본질은 한계가  없으며 시간과 공간 너머
에 있으며 물질도 모양도 차원도 없으며 말로 설명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다만 허무가 아니라 우주만유의 현상세계를  창조해내는 무한 가능성입니다. 따라서 
생명과 우주의  이 한계 없는 근원과 본성을 한정된 잣대로 잴 수가 없습니다. 
  10cm 짜리 잣대로 수만 km이상의 거리를 재려고 한다거나 1kg짜리 저울로 수 만  톤 이
상의 무게를 측정하려고 한다면 그 일이 가능할까요? 만일 누가 대롱을 통해서 하늘 전체를 
보겠다고 애쓰고 있다면 우리는 그를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요? 인류가 지금까지 이루어  
놓은 과학의 성취는 대롱 구멍정도입니다. 
  위대한 과학자일수록 대체로 자신이 알고 있는 과학적 진실을 모래밭에서 주운 한두 알의 
모래 정도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과학의 수준이 이러하다고 하여 과학의 발전성과나 과학적 
방법론을 과소평가하거나 폄하하는 신념 또한 한계를 지닌 창조입니다. 과학의 성과는 한계
가 있으나 인류의 삶과 문명의 진화에 큰  기여를 해왔으며 우주와 생명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또한  현대물리학을 비롯한 선진과학은 우주가  곧 하나의 
생명임을 증명하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전통적인 분석주의적 방법으로는 
이 한계를 넘어 직관적인 탐구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만 종래와 같은 분석주의 적인 실증과학만을 수단으로 하여 모두를 알려고 하거
나 만사를 해결하려고 한다면 그것이  지닌 속성 때문에 한계에 부딪치고   맙니다. 확실히 
해둘 것은 과학은 단지 신념체계이며 하나의 도구일 뿐입니다. 과학은 절대진리와 동의어가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한 순간도 머무르지 않고 변화해마지 않습니다. 다만  변화하
지 않는 것 하나는 모든 존재가 한 순간도 머무르지 않고 변화한다는 사실뿐입니다. 
  오늘의 과학적 진실은 내일의 미신입니다. 과학은 한정된 시간  속에서 인류가 가지고 노
는 놀이이자 게임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예술 작품이지요.
 
    우주와 나는 하나의 생명
  우리 시대 대부분의 인류에게 익숙해 있는 우주관, 생명관은 이러한 것 같습니다. 
 1.절대시간, 절대공간, 절대물질이 존재하며 내 생명은 한정된  공간 가운데 살다가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죽고 마는 물질적 존재이다. 
 2. 나는 객관적 세계와 분리되어 따로 존재하며 세상의 다른  존재들도 서로 분리된 채 독
립되어 있다. 각각의 존재들은 우주의 한 부분이다.
 3. 의식과 물질, 마음과 몸, 주관과 객관, 신과 세계는 분리하여 존재하는 이원성이며  나는  
내 밖의 조물주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이다. 
 4. 의식은 물질우주로부터 진화되어 나온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따라서 사람의  의식은 
뇌라고 하는 물체의 생화학적 작용의 산물이다
 5.이 물질우주와 의식은 절대적 창조자에 의한 우연한 창조의 결과이다. 신념은 의식을  가
진 존재들의 물리적 현실에 대한 경험의 결과이다. 
  이러한 관점들은 대체로 고전 물리학의  세계관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러한 낡은 
패러다임은 점차 퇴조하기 시작하고 있으며 미래의 많은 인류는 이러한 가정을 더 이상 받
아들이지 않게 될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위와 같은   한정된 틀에서 벗어나 우리의 
의식을 자유롭게 확장시킬 때 다음과 같은 가정을 세울 수 있습니다. 
  이 책 속에서 내가 하는 이야기는 이러한 가정의 관점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이런 확장된 
의식의 관점은 전일적 우주관, 전일적 생명관이라고 불리워지기도 합니다. 
 1.절대시간, 절대공간, 절대물질은 존재하지 않으며 내 생명은  공간의 한정과 시간의 제약
을 초월하여 영원히 죽지 않는 순수의식의 존재이다. 
 2. 나와 객관세계와의 분리는 환상이며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서로 분리할 수 없는 전체성
이다. 내가 곧 우주이며 우주는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거대한 생명이다. 
 3.물질이 곧 의식이고 마음이 곧 몸이며 신이 곧 세계이므로 어떠한 것도 둘로 나눌 수 없
는 일원성이다. 나는 결코 피조물이 아니고 내가 나의 몸과 물리적 현실을 지어낸다. 
 4.의식이 물질무주로부터 진화되어 나온 것이 아니라 의식이 물질우주를 창조한다.  따라서 
사람 몸의 생화학적 작용은 의식의 산물이다. 
 5.이 물질우주는 의식을 가진 모든 존재들의 집단신념이 공동 창조한 결과이다. 물리적  현
실에 대한 일체의 경험은 의식을 가진 존재들의 신념의 결과이다. 
  어떤 분이 이것을 읽고 전자는 유물론에  근거하고 있고 후자는 관념론에 근거한  관점이  
아닌가 라고 평가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누가 맨 처음 유물론과 관념론이라는  철학체계를 창조해놓고, 세계를 이해하자면 
이 가운데서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고 강요하기 시작했는지 모르겠지만, 우주와 생명의 본질
을 참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물론이나  관념론의 한계 너머로 가야만  합니다. 유물론과 
관념론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한계를 가진 창조입니다. 한계도 끝도 없는 우주와 생
명을 한계 있는 창조로서 잴 수가 없습니다. 
  우주와 생명은 철학적 사고너머에 있습니다. 유물론이나 관념론 같은 철학적 사고를 도구 
하여 우주와 생명을 탐구하려는 것은 무리입니다.
  달밤에 내가 북쪽으로 가면 달은 나를 따라서 북쪽으로 오고 내가 남쪽으로 가면 달도 나
를 따라 남쪽으로 옵니다. 내가 빨리 가면 달도 빨리 가고 내가 멈추면 달도 멈춥니다. 달은 
나만 따라다닙니다. 이것은 나의 감각이 지어낸 착각입니다. 실제로는 달은 북쪽으로나 남쪽
으로 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사람들이 엄연한 진실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것들이 이런 식의  착각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유물론과 관념론의 논쟁이라는 것도 잘 살펴보면 갑은 달이 북쪽으로 간다고 주장하고.
을은 달이 남쪽으로 간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대부분의 철학체계는 마치 연극이 중간에 들어간 관객이 한 두 장면을 보다가 그만둔 경
우와 같이 시작도 끝도 알 수가  없습니다. 결론은 잘 모른다 입니다. 세계와 인간의  본질
은 애당초 한정된 머리로 따져서 헤아릴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우주와 생명의 알맹이 본성은 어떠한 한계도 하원도 없으며 시간과 공간도 없으며 물질적 
질량도 물리적 에너지도 없으며 도대체 있다. 없다는 표현 너머에 있으며 머리로 헤아릴 수 
없는 그 무엇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허무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보는 대로 물리적 우주와 생명체들을 지어내는 
무한한 가능성의 근원입니다. 이것은 사고와  토론에 중독되어 가지고는 알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당신은 분석할 수도 측정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그 무엇을 분석하고 측정하고 상상할 
수가 있습니까?
  우리가 우주와 생명의 본체를 투철하게 하고자 한다면 철학, 심리학, 물리학, 의학과 같은 
상대유한적인 신념체계들의 벽을 뚫고 나가야만 합니다. 
  무엇을 아는 데는 지적으로 알기와 직접경험하기가  있습니다. 장미꽃 향기가 어떠하다는 
것을 지적으로 알기와 그 향기를 직접 맡아보기와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사과 맛을 머리
로 알기와 직접 먹어보기의 차이는요?
  경험하기란 경험자가 경험대상과의 분리를 그만둘 때  가능해집니다. 그것은 어떤 기대나 
판단이나 한정을 가지지 않은 상태에서  경험자의 지각이 경험대상과 온전히  하나되기 입
니다. 
  생명의 본성에 대한 탐구자가 탐구대상과 자신을 분리하여 이원화시킬 때는 머리로  알기
만 이루어집니다. 우주와 자연에 대한 관찰자가 관찰대상인 우주가  나와 따로 있다는 생각
을 가지고 잇는 한에는 경험하기가 안됩니다.  나라는 생각, 내가 따로 있다는 생각의  거품 
속에 갇혀있는 한 탐구자가 아무리 위대한 학자라고 하더라도 그의 탐구결과는 우주와 생명
의 도리에서 빗나가버립니다. 그는 결코 경험하기를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철학과 같이 지적으로 알기라는 것은 생각의 거품이 다른 생각의 거품들을  생각하기 입
니다. 나라는 자아의식이 다른 자아의식들을 탐구하기입니다. 지적으로 알기는 한정된  자아
의식으로서 알기이며 경험하기는 한정 없는 순수의식으로서 알기입니다. 
  어느 분이 이 책을 읽는 도중,  "당신의 이야기는 비약이 심하다. 이것은  비과학적인  사
변이며 신비주의가 아닌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곧 바로 "네, 당신 말씀이 맞습니다"라고 답
하겠습니다.
  우주와 생명은 기존의 낡은 세계관의 틀에서 비약해야만 알  수가 있습니다. 우주와 생명
의 본성은 과학 너머에 있으며 그 알맹이는 원래가 신비부사의한 무한가능성입니다. 
  "그래도 당신 이야기 가운데는 비상식적인 것이 많다"고 한다면, 나는 또 "맞는 말씀입니
다"라고 하겠습니다.
 우주와 생명은 우리가 붙들고 있는 상식 너머로 갈 때만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가정이나 학교나 사회에서 보고  배운 주입된 신념들-물질은 내가 보는 그
대로 존재한다. 나는 객관세계와 분리되어 있다. 나는  몇십 킬로그램의 몸뚱어리이다. 나는 
태어났으니 언젠가는 죽고야 만다- 과 같은 허구의  최면에서 깨어나지 않는 한 우주와 생
명은 끝끝내 알 수가 없습니다. 
  최면에 걸려있는 동안은 죽음의 문에서 죽음의 문으로 이어지는 캄캄한 여행을  계속해야
만 합니다. 나라는 생각의 협소한 거품 속에 갇혀 웅크리고  있는 동안은 우주는 나와 분리
된 채 나의 밖에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나라는 생각의  거품을 깨버리면 우주와 나의 분리
는 사라지며 우주는 나와 더불어 하나의 생명입니다. 나라는  생각의 거품을 걷어내고 거기
에서 빠져 나오는 일이 가능합니다. 
 
    내 생명은 시공을 초월한 무한가능성
  나와 객관세계가 이와 같이 모양을 띠고 나타나게 되는  근본 바탕, 근원이 무엇이겠습니
까? 내 몸이나 온갖 물체들, 끊임없이 일어나는 생가들, 죽음  후에도 남는 다는 영혼들. 이
런 것들이 어디에서 창조되어 나오는 것일까요? 한마디로 물질과 정신현상이 비롯되는 근본 
뿌리가 무엇인가 하는 말입니다.
 이런 상상을 해보면 어떨까요?
 지금 당장 이 우주가 몽땅 파괴되어 내 몸이나  지구, 태양,  모든 별들, 모든 물체가 일시
에 다 사라졌다고 가정합시다. 텅 빈 허공뿐입니다. 물질적 존재뿐 아니라 일체의 정신적 현
상들도 다 사라져 버렸다고 상상합니다. 온갖 판단, 신념, 기억, 일체의 생각들도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마지막 생각인 '나', '내가 있다'는  생각까지도 없습니다.  남아있는 것은 무엇
입니까?
  무엇이 남아 있습니까?
  알 수 없는 텅 빈 허공뿐인가요?
  지금 텅 빈 허공뿐이라는 것을 누가, 무엇이 알고 있는 것입니까?  
  의식입니다.
  이 허공을 지켜보고 있는 앎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있으며, 판단, 생각이  없
는 오직 알고 있음인 곧 순수한 의식입니다.
  이물질 우주가 모두 사라져 버리더라도 그 사라짐을 알고 있는 허공 같은 의식의 세계가 
모든 것의 근원이자 뿌리입니다.
  이 근원의 질료로부터 당신의 몸, 별들, 물체들, 물리적 에너지, 판단과 생가들, 나라는 생
각이 지어져 나옵니다. 
  이 허공 같은 의식의 세계가  당신의 생명의 고향이요 근원입니다.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몸이 당신이 아니라 이 허공이 진짜 당신입니다. 따라서 당신이 우주의 중심, 세계의 중심입
니다.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이 우주의 중심일 것인가 하며 자신을 축소시키고 움츠리며 빠져나가
려 해도 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절대진리라고 말해도 됩니다. 그래도 당신이 이것을 
부정한다면 그것은 거짓 겸손입니다. 허공  같은 순수의식인 생명의 근원은  시간도 한정된 
공간도 어떤 차원도 없습니다. 물질적 질량도 물리적 에너지도 없으므로 어떤 과학기술로도 
측정, 측량할 길이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습관적으로 익혀온  무엇이 있다, 없다는 기준이나  감각 너머에 있으므로 
상상할 수도, 더구나 언어로 표현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함에도 이것을 한정지어 정의를  내
리고 이름을 붙이고 문자로 표현하게 되면 곧 바로 그것에서 빗나가 버립니다. 
  묘사 불가능함입니다. 
  묘사 불가능함이라는 말 또한 그것을 한정지어  정의를 내린 말이므로 이것 또한  빗나간 
소리입니다. 이처럼 알 길이 없고  표현할 길이 없는 허공 같은  의식세계로부터 내 몸이나 
천지우주가 모양을 나타내며, 여기로부터 나라는 생각, 온갖 판단과 상념들이 나오고 있으니 
참으로 미묘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과거의 앞, 미래의 뒤, 모든 공간들의 앞 뒤, 무수한 차원의 현실들의 일체의 배경
인 통일성입니다.
  이것은 무한 지혜의 본성이며 무한 능력의 근원입니다. 여기에는  죽음이 없는 무한 생명
력과 한없는 행복, 순수한 아름다움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한마디로 지고의 사랑이자 자비심 
덩어리입니다. 모든 생명체와 창조물들의 본성인 신성의 정기입니다. 
  이것은 모르는 것이 없고 못하는 거이 없고 없는 곳이 없는, 그리하여 신, 하나님, 부처와 
같은 영성의 개념이 나오게 되는 근원입니다. 따라서 이것을 신이라고 부르건, 하나님이라고 
부르건, 부처라고 부르건, 창조자라고 부르건, 생명의 근원이라고 부르건, 또는 순수의식, 우
주의식, 절대의식, 절대자 ,유일자, 도, 하늘, 진리......무엇이라고 부르건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순수의식이라고 하는 것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당신의 마음 가운데 있습니다. 
  마음 가운데 어디에 따로 있다기보다는 당신 마음의 가장  저변, 마음 밑바닥이 순수의식
입니다. 
  이 의식의 상태는 좋다. 싫다와 같은 판단이 없으며 내가 있다는 생각까지도 없습니다. 나
와남의 구분도, 신과 나와의 구분까지도 없는,  어떠한 기대난 의도도 없는 그렇지만  깨어 
있으며 알고 있는 의식의 상태입니다. 
  순수의식은 생각이나 말로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내가 순수의식 속에 녹아들어서 순
수의식 그 자체가 되어버리는 경험을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순수의식이 지닌 특성의 하나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의식을 시간과 공간 너머로 확장시킬 수 있다면, 즉 시공을 초월하는 느낌 속에 잠길 수 있
다면 어렴풋이라도 순수의식을 짐작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시간 너머로 가기
  우리 몸은 피부로 한정된 공간을 지니고 있고, 나서 죽을 때까지 몇 십 년 동안이라는 한
정된 시간 안에 있습니다. 몸이란 다른 물체들과 마찬가지로  시간과 공간이 실존한다는 근
거 위에 존재합니다. 만일 시간과 공간이 실존하지 않는 다면 몸도 실제로 있다고 할 수 없
겠지요.
  시간과 공간이 사실로서 실존하는지 탐색해 보는 일에 호기심이 가나요?  우리에게는 대
체로 1년, 10년, 100년과 같이 한정된 시간의 길이가 꼭 사실처럼 있어 보입니다. 
  과연 한정된 시간이 확실히 있을까요?
  다음 내용을 옆 사람이 천천히 읽어주거나 녹음기에 녹음한 것을 들으면서 연습하는 것이 
좋습니다. 
  눈을 가볍게 감고 편안한 자세를 취합니다. 
  아랫배로 천천히 호흡을 합니다.(약 1분간)
 1. 이제 호흡에 대한 생각은 잊어버리고 지나간 1신간을 느껴보십시오.(느끼는 시간은 약30
초 내지 1분간이 적당함)
 2.이제 지난 하루의 길이를 느껴봅니다.
 3.이제 지난 한달 동안을 느껴봅니다. 
 4.이제 지난 1년 동안을 느껴봅니다. 
 5.이제 지난 10년 동안을 느껴봅니다. 
 6. 이젠 지난 100년간의 길이를 느껴봅니다. 
 7. 이제 지난 천년 동안의 길이를 느껴봅니다. 여기서부터는 필요하다면 조금 상상을  보태
도 됩니다.  
 8. 이제 지난 1만년의 길이를 느껴봅니다. 
 9. 지난 1백 만년을 느껴봅니다. 
 10.지난 1억 년을 느껴봅니다. 
 11.지난 100억 년의 길이를 느껴봅니다. 
 12. 이제 지난 1조년의 길이를 느껴봅니다. 
 13. 다시 그것의 백 배를, 또 백 배를.........
 14. 눈을 계속 감은 채로 자, 이제 과거라는 시간이 시작되는 시점을 찾아봅시다. 여기서부
터 과거가 시작되었다고 결정할 수 있는  시점이 있습니까? 
 15. 눈을 계속 감은 채로 한도 끝도 없는 과거너머의 시간 없음을 느껴보십시오.(약1분간)
  이제 천천히 눈을 뜨십시오. 어떻습니까? 마음이 편안해지고  의식이 넓게 확대된 느낌이
었습니까? 거기에 과거라는 한정된  시간이 존재하고 있었습니까?   위의 연습내용을 단지 
읽고 생각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경험을 해본다면  특별한  느낌을 얻을 것입니다. 
여기서 얻은 느낌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미래의 시간에 대해서도 같은 방법으로 경험해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눈을 가볍게 감고 아랫배로  천천히 호흡을 합니다.(약 1분간)
 1.  이제 호흡에 대한 생각은 잊어버리고 다가올 한 시간을 느낍니다.
 (약30 초 내지 1분 동안)
 2. 이제 다가올 하루 동안을 느낍니다. 
 3. 다가올 한달 동안을 느낍니다. 
 4. 다가올 1년 후를, 10년 후를 느껴봅니다. 
 5. 100년 후를, 천년 후를, 여기서부터는 필요하다면 조금 상상을 보태도 됩니다. 
 6. 1백만 년 후를 느낍니다. 일 조년 후를 느껴 봅니다. 그리고 다시 그 백 배의 시간의 길
이를 , 또 그것의 백 배의 길이를...........
한도 끝도 없는 미래도 쭉 나아가 무한한 미래 너머의 시간 없음을 잘 느껴보십시오.
 7. 눈은 계속 감은 채로 자, 미래가  끝나는 시점이 언제입니까?  여기서 미래가 끝난다고  
결정할 수 있는 시점이 있습니까? 지금 경험하고 있는 그 느낌을 잘 기억해 두십시오.
  이제 천천히 눈을 뜨십시오. 어떻습니까? 거기에 미래라고  하는 한정된 시간이 존재하고 
있었습니까?
  
  과거라는 시간의 인상을 내가 지금 떠올리기로 결정하지 않는 한 과거는 존재하지 않으며 
미래라는 시간의 인상을 지금 지어내지 않는 한 미래는 나에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내 마음 가운데 과거를 허용하는 수준만큼 과거는 나에게 영향을 미치며, 내가 허
용하지 않는 한 과거는 나에게 존재하지도 영향을 미치지도 않습니다.
  과거에서 시간이 시작하여 현재로 흘러오는 것이 아니라 지금이 과거의 시작이자  미래의 
시작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 할 것 없이 시간은 영원한 지금일 뿐입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말한다면 한정된 시간이란 없는 것입니다. 과거는 지나가버려서 지금 없
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아 지금 없습니다. 현재 또한 한순간도 머무르지 않으므로 지금  잡
을 길이 없으니 현재도 없습니다. 
  시간의 있음이란 오직 지금이라는 순간순간의 흐름일  뿐입니다. 순간순간의 지금 가운데 
내가 과거라는 생각, 현재라는 생각, 미래라는 생각을 지어 낼 따름입니다. 과거에서 미래로 
가는 중간 시점인 현재 속에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이라는  진행형의 순간 속에 
과거, 현재, 미래라는 생각을 품고 있을 뿐입니다. 
  한정 없는 시간이라는 바다 위에 과거, 현재, 미래라는 물거품이 들쭉날쭉 뛰놀고 있는 것
과 같습니다. 그러니 시간이란 나의 의식이 지어낸 하나의 생각, 하나의 인상에 지나지 않습
니다. 
    공간 너머로 가기 
  우리에게는 대체로 내 몸이 차지하는 공간, 내 집이 차지하는 공간, 지구가 차지하는 공간
처럼 한정된 크기의 공간이 꼭 사실처럼 있어 보입니다. 과연 이렇게 한정된 크기의 공간이 
참으로 존재할까요?
  이번에는 공간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한번 알아봅시다. 
  먼저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눈을 감습니다. 그리고 아랫배로 천천히 호흡을 합니다. 
 1. 이제 호흡에 대한 생각은 잊어버리고 당신의 몸에 대해 저절로 떠오르는 인상을 느껴보
십시오.(느끼는 시간에 제약을 받을 필요는 없으나 대강 1분 정도면 됩니다. 가장 좋은 방법
은 처음에 선명했던 인상이 완전히 사라질 때쯤 다음 단계로 가는 것입니다. )
 2. 이제 당신이 있는 방의 전체적 인상을 느껴보십시오. 방안의 이곳저곳을 애써서 또 올리
려고 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인상의 윤곽을 느끼면 됩니다. 
 3. 이제 다시 당신이 있는  동네의 전체적 인상을 느낍니다.(여기서 느낀다는  것은 무엇을 
생각하고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떠오르는  인상에다 흥미롭게 주의를 보내는  것입니다.) 
 4. 이제 당신이 있는 도시의 전체적 인상을 느낍니다. 
 5. 이제 당신의 나라 전 지역에 대해 저절로 떠오르는 인상을 느낍니다. 
 6. 이제 다시 이웃 일본, 중국, 아시아, 오세아니아, 아메리카, 유럽,  아프리카, 남극과 북극 
등으로 주의를 확대하여 세계의 전체적 인상을 느낍니다. 
 7. 이제 지구를 하나의 풍선이나 공처럼 여기며 당신 앞에 띄워 놓고 눈은 계속 감은 채로 
바라봅니다. 
 8. 이제 당신의 태양계를 느낍니다.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 달,  금성, 화성 등 행성들이 함
께하는 태양계의 전체적 인상을 느낍니다. 이때 필요하다면 조금 상상을 보태도 됩니다. 
 9. 이제 다시 더 확대하여 은하계에  대한 전체적 인상을 느낍니다. 이 은하계는  태양계와 
같은 별들이 약 천 억 개 가량 모여 있는  별들의 집합체입니다. 은하계는 나선형으로서 마
치 원반이나 빈대떡 모양으로 가운데가 볼록하고 변두리는 얇삭한 형태라고 합니다. 은하계
의 직경은 약 10만 광년으로서 은하계의 한쪽 끝에서 반대쪽 끝에 도달하려면 빛의 속도로 
10만년 동안 날아가야 합니다. 빛은 1초 동안에 지구 둘레를 일곱  바퀴 반을 돌 만큼 빠른
데 이 빛이 10만년을 날아가야 끝이 보이는 은하계입니다. 애쓰지 말고 당신이 생각하는 은
하계의 인상을 자연스럽게 떠올려 느껴봅니다. 
 10. 자, 이제는 당신의 우주 전체에 대한 인상을 떠올려 느낍니다. 이 물리적 우주는 천 억 
개 이상의 은하계의 모임입니다. 천문학이 추정하는 우주의  넓이는 약 1,500억 광년입니다. 
우주의 한쪽 끝에서 반대쪽 끝까지는  빛의  속도로 1,500억 년을 날아가야 합니다. 상상이 
되시나요? 아무튼 떠오르는 대로 당신의 우주를 통째로 느껴보십시오. 
 11. 이제 다시 물질우주의 한계너머로 날아가 봅니다. 의식이 날아가는 속도는 빛의 속도보
다 더 빠릅니다. 물질우주를 뒤로하고 멀리 나아가 바라봅니다. 별들이 저 멀리  가물가물하
게 보이나요? 이제 더 멀리 이동합니다. 별들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텅 빈 허공뿐입
니다. 이제 이것이 무엇이라는 생각, 좋다, 싫다는 생각도  접어두고 내가 허공 가운데 있다
는 생각까지도 의도적으로 내려놓은 채 이 끝없이 맑은 허공세계가 느껴지는 대로, 허공 그
것이 되어 맘껏 느껴 보십시오. 
  자, 어떻습니까? 한정된 크기의 공간이 존재합니까?
  이제 잠시 참으로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은 무엇인가? 느껴보십시오.
 12. 천천히 눈을 뜨면서 현실로 돌아옵니다.
(연습 끝)
  어떻습니까? 지금 편안하십니까?
  이 연습을 통해 시공을 초월한 순수의식을 조금은 짐작할 수 있었나요?  순수의식과 완벽
하게 하나되는 경험이란 이 정도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환희롭고 행복하다고 합니다. 시
간과 공간의 실체를  살펴봄으로써 당신은 어떤 느낌을  가지게  되었습니까? 절대시간, 절
대공간이 존재합니까?
  시간과 공간은 다만 상대적인 것이지 절대적으로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나아가서 절대시
간, 절대공간의 전제 이에 있는 절대물질도 있지 않으며 내 몸 역시 절대적 존재라고 할 수
가 없습니다. 
 
    순수의식- 일체 생명이 나오는 곳
  어떠한 한계도 없는 순수의식의 차원에 있을 때는 신가도 공간도 물질도 내 몸도 나라는 
생각까지도 없지만, 내가 따로 있다는 한계 내의 의식, 즉 자아의식의 차원에 있을 때는  시
간, 공간, 물질, 내 몸, 나라는 생각 등 한계 있는 창조가  꼭 실제처럼 있어 보입니다. 
  이 허공 같은 순수의식으로부터 문득 나라는 생각, 내가 있다는 생각이 떠오릅니다.  마치 
허공 중에 한 개의 비누방울이나 거품이 떠오르듯이. 이 생각이 나와 객관 세계가 분리되어 
따로 있다는 신념이 일어나는 최초의 계기입니다. 
  나란 이처럼 순수의식의 허공 가운데  물방울처럼 문득 떠오른 하나의  생각일 뿐입니다. 
한없는 순수의식의 바다 위에 나라는 생각의 파도 하나가 불쑥 떠올라 그 한정된 파도 하나
를 나로 여기며 수많은 다른 파도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 파도들이 자아의식 또는 개별
의식들입니다. 
  이 물질우주 안에서 나와 구별되어 보이는 수많은 남들, 대상들은 순수의식의 바다(참 나, 
생명의 근원)위에 떠오른 나의 다른 모습들이자,  나이 분신들입니다 순수의식의 전체적 차
원에서 볼 때 이들은 본래 분리하려 해도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통일된 생명입니다. 나라
는 파도, 너라는 파도가 분리되어 존재한다는 생각은 착각이며 환상입니다. 내가 따로  있다
는 생각이 내 몸과 물질이라는 환상을 지어내는 최초의 단서입니다. 그러나 본래의 나는 한
정 없는 순수의식의 존재이며 시공을 초월한 무한가능성입니다. 
  자신과 물리적 우주가 같은 근원에서 나온다는 진리를 모르는 무지가 나와 이 세계사이의 
갈등과 반목을 가져옵니다. 모든 '나'들이 이것을 바로 깨닫는  순간 세상 가운데 있는 모든 
투쟁과 고통은 일시에 소멸될 것입니다. 
  순수의식은 순수의식 스스로를 대상으로 놓고 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순수의식 가운데
서 스스로를 의식하고자 하는 하나의 충동, 즉 스스로를 대상으로 놓고 보고 싶어하는 생각
의 일렁거림이 문득 일어납니다. 마치  고요한 바다 위에 파도 하나가  불쑥 올라와 바다를 
바라보고 싶어하듯이. 순수의식 스스로를 대상으로 여기고  그것을 관찰하고자 하는 주체를 
지어내는 생각, 그것이 나라는 생각을 지어내는 최초의 순간입니다. 관찰자인 나와 관찰대상
인 그것을 분리시킵니다. 
  이처럼 나라는 생각이 문득 떠오르자마자 이것이 나이고 저것은 내가 아니라고  자동적으
로 한정짓습니다. 한정 없는 순수의식의 바탕에 내가 따로 있다는 생각의 울타리 한계를 그
어 놓습니다. 나라는 것이 알고 보면 이와 같은 하나의 생각일 뿐입니다. 
  이  '나'가 한정된 존재감을 느끼면서 자연히 너와 나의 분리감을 지어내고 차츰 시간, 공
간, 에너지, 물질, 자연의 형태와 운동 같은 한정된 차원의 존재들을 지어냅니다. 이것이  이 
물리적 우주가 창시되는 원인입니다. 순수의식의 무한한 순수에너지가 '나'들의 필터를 거치
면서 한정된 물리적 에너지로 바뀌고 그것이 물질 입자화 되어  이 세계의 모습으로 나타납
니다. 
  이 말이 믿어지지 않습니까?
  우리는 다음과 같은 가정을 세울 수 있습니다. 이 가정은  이러한 이치에  생소한 사람들
에게만 가정일 뿐, 옛부터 순수의식 그것과 하나된 존재들은  한결같이 경험하기를 통해 통
찰함으로써 이것을 명백한 진실로 드러내 보이고 있습니다. 
  스스로를 분리시킨  내가 이제 대상을 보며 가지는 생각은 그것이 좋다(욕망), 싫다(저항)
입니다. 이것이 나라는 첫 번째 생각에 이어 뒤따르는 두 번째 생각입니다. 이 좋다, 싫다는 
생각이 현실 세계에서'나'들이 쓰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생각하는  마음이 현실을 향해 내보
내는 주의에너지입니다. 나의 필터를 거치기 전의 마음이 순수의식  곧 순수한 주의 에너지
입니다. 순수의식에서 나온 주의가 나를 통과할 때 무엇이 좋다는 판단과 섞이면 욕망의 마
음으로, 어떤 판단도 섞이지 않으면 순수한 마음이 됩니다. 
  크게 나누어 욕망, 저항, 순수라는 세 가지 성질의 마음이 물리적 현실을 지어내는 기본에
너지입니다. 이 세 가지 마음은 결코 아무런 힘이 없는  허무가 아니며 주파수와 파동을 지
닌 창조에너지이자 정보가 담긴 물질입자입니다. 의식은 곧 파동이며 파동은 곧 물질입자입
니다. 
  이러한 마음의 창조에너지는 의지만으로 조절되고 변화 될 수 있으나 그것이  물질입자로 
응결된 후에는 그것을 조절하고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의지와 물리적 노력의 양쪽이  요구됩
니다.  이를테면 몸에 질병이 굳어져 있을 때 의지의 힘으로 마음의 치유에너지를 동원하는 
일과 함께 몸에 대한 물리적 치료도 요구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상 세 가지 성질의 마음 즉, 세 가지 성질의  주의에너지가 강하게 집중될수록 더욱 뚜
렷한 현실이 됩니다. 
  순수의식의 주의 에너지에 욕망이나 저항이 섞임으로서 물리적인 창조에너지가 되고 이 
에너지가 물질현실의 기초가 되는 파동입자가 됩니다. 
  좋다는 신념이 좋아하는 그것을 욕망하여 끌어당기는 양성 전기적 성질을 띤 물리적 에너
지가 되며, 싫다는 신념이 싫어나는 그것을 저항하여 밀어내는 음성 전기적 성질을 띤 물질
적 에너지가 됩니다. 욕망이나 저항과 섞이지 않은 순수한 주의는 양성도 음성도 아닌 중성
의 성질을 띤 물리적 에너지입니다. 판단하는 마음과 순수의식이 서로 다른 점은,  판단하는 
마음은 대상을 욕망 또는 저항으로 지각하여 물질현실을 응결시키지만, 순수의식은  굳어진 
현실을 녹여서 텅 빈 공으로 되돌려 놓는다는 것입니다. 
  '나'가 순수의식과 판단하는 마음 사이에  끼어 있는 렌즈, 필터입니다. '나'가  순수의식
과 물질우주 사이를 연결하는 다리입니다. 이처럼 나와  우주는  같은 근원인 순수의식으로
부터 함께 나옵니다. 순수의식의 빛이 나라는 생각의 필름을 통과함으로서 몸이나 물질현실 
같은 그림자를 지어냅니다. 나와 우주는 그것들의 근원인 순수의식과 더불어  분리할 수 없
는 하나의 생명입니다. 
    기- 그 생명에너지
  지금 지구상의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을 보이고 있는 주제 가운데서 기만한 것도 드물 것
입니다. 기를 하나의 리얼리티로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와 함께  그것의 실용화에 대한 정보
가 담긴 책들이 많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기는 의식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창조에너지이며 이것은 굳어진 물질 같은 형상으로 바뀌어
질 수 있습니다. 의식이 물질입자로 굳어지는 과정에서 기는  물리적 에너지로서 교량 역할
을 합니다. 의식이 기가 되고 기가 물질로 됩니다. 
  기는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에너지 즉  자연치유력이며 이것이 물질입자화 되어  몸의 
모양을 나타냅니다. 즉 눈에 안 보이는 마음이 눈에 보이는  몸으로 될 때 기는 에너지로서 
중간다리 역할을 합니다. 마음이 기가 되고 기가 몸이 됩니다. 
  우주와 생명의 근원인 순수의식으로부터 순수한 주의가 흘러나오며 이 순수한 주의는  나
의 렌즈를 통과하여 대상을 향해서 보내집니다. 이 순수한 주의는 '나' 속에 있는 욕망의 신
념과 저항의 신념의 필터를 통과하면서 욕망의 주의와 저항의  주의로 바뀌게 됩니다. 순수
한 주의 가운데 일부는 욕망과 저항의 신념과 섞이지 않은 채 순수성이 유지되어 보내집니
다. 
  나를 통과한 세 가지 성질의 주의 즉 욕망의 주의, 저항의 주의, 순수한 주의는  이제부터 
각각 나름대로의 정보를 가진 에너지 파동이며 물질입자입니다. 욕망의  주의는 +전기적 성
질을 띤, 저항의 주의는 -전기적 성질을 띤,  순수한 주의는 중성의 전기적 성질을 띤 물질 
입자입니다. 이세가지 성질의 주의가 물질우주와 현실을 창조하는 창조에너지입니다. 
  주의란 곧 마음이요 의식입니다. 주의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것은 다만 추상적인 어떤 
것이거나 아무런 힘이 없는 허무가 아닙니다. 주의는 구체적  주파수를 가진 에너지 파동이
자 물질의 작은 알맹이입니다. 이것은 다만 추상적인 어떤 것이거나 아무런 힘이 없는 허무
가 아닙니다. 주의는 구체적 주파수를 가진 에너지 파동이자 물질의 작은 알맹이입니다.  이
것은 물질의 기본단위인 원자를 구성하는 양성자, 전자, 중성자와 같은 소립자들의 모태입니
다. 주의가 그대로 물리적 에너지이며 주의가 그대로 물질입자입니다. 
  주의가 바로 기입니다. 
  마음. 주의, 기, 우주적 정기, 창조에너지, 생명에너지, 자연치유력, 프라나.....
  이들은 모두 같은 뜻의 말입니다. 
  우주에 충만한 기, 우주에너지라는 말이 자주 쓰이고 있는데, 이 우주에너지란 특별한  절
대자가 높은 하늘 어디에서 지금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우주 가운데 의식을 
지닌 모든 존재들이 공동창조한 결과입니다. 나의 현실적 삶은  이 우주에너지와 자신이 지
금도 지어내고 있는 에너지의 상호작용 가운데  잇습니다. 순수의식에서 흘러나오는 순수한 
기가 나의 신념의 필름을 통과함으로서 그 신념의 의도나 성질에 따라 기가 변화되고 그것
은 그 신념의 청사진에 부합되는 물질 현실로 입자화되어 모양을 나타냅니다. 
  
  대체로 한 개인이 통제하고 부려 쓸 수 있는 기의 양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욕망과 저항이 없고, 내가 있다는 생각마저 사라진 상태 즉 완벽한 순수의식의 
차원에 있게 된다면 마치 무한한  기의 바다에 잠기는 거소가 같아서 그가 부려 쓸 수 있는 
기의 양은 무한합니다. 성자들이 보여주는 위대한 초능력의 배경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한정 없는  순수의식의 차원이 아닌 한정된 자아의식의  틀에 갇혀 욕망, 저
항에 사로잡혀 있다면 내가 통제하고 부려 쓸 수 있는 기의 양은 매우 적은 양으로  한정됩
니다. 
  순수한 기의 양이 충분하게 뒷받침되지 않은 조건에서는 어떤 일을 하려고 해도 잘 이루
어지지 않습니다. 자신이 부려 쓸 수  있는 에너지가 고갈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럴  겨우 
자기 밖에서 주의를 구걸하거나 강요해야만 삶을 지탱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무엇을 이루고 못 이루고는 주로 자기 뜻대로 동원하고 조종할 수 있는 주의 
입자의 양에 달려 있습니다. 자기 삶에서 무엇을 이루어낼 수  있는 창조의 비결은 부려 쓸 
수 있는 순수한 기를 충분히 보존하여 이 순수한 주의에너지를 창조의 목표에다 집중적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자기의 통제하에 있는 주의의 양이 고갈되어  버리는 이유는 대개 주의가 욕망과  저항에 
묶여 있어서 주의 에너지가 낭비되어 버린 탓입니다. 이처럼  주의가 고갈될 경우 질병이나 
다양한 형태의 삶의 고통, 범죄와 같은 반사회적 행동의  모양으로 나타나 결국 밖으로부터 
주의를 빨아들여야만 합니다. 따라서 자신의 주의가 욕망과 저항에  빠지지 않도록 하고 주
의가 순수한 중성을 유지하도록 하는 것이 자기 삶을 자유롭게 하는 비결입니다. 
  주의를 순수한 중성으로 유지하려면 욕망과 저항을 떠나 모든 것을 큰사랑으로  무조건적
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순수의식의 본성은 무조건적인 사랑이요 관용이기 때문입
니다. 기를 증강시키는 방법 가운데는 각종 호흡법이나 여러 가지 기공수련 등이  잇습니다. 
이런 방법들도 분명히 기를 증강시키는 좋은 효과가 있겠지만,  기를 회복하는 최고의 방법
은 자비심과 관용의 회복입니다. 이것이  전제되지 않은 어떤 기공수련도  수도꼭지를 잠근 
채 물을 빠는 것처럼 기의 갈증을 근본적으로 풀어주지 못 할 것입니다. 
  내가 어떤 대상을 보더라도 지나치게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 마음을 가질 때  나의 
주의는 중성으로 회복될 순수의식과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욕망과 저항 쪽에
서 소모되고 있었던 기가 순수한 에너지로 회수되어 나의 통제하에 부려질 수 있게 됩니다.
  자신이 순수의식의 차원과 하나되거나 가까워질 때 풍부한 기, 풍부한 창조력의 관리자가 
됩니다. 그러나 극히 제한된 자아의식의 차원에서 욕망과 저항에 끌려 다니게 되면 항상 에
너지의 고갈 상태에 있게 되므로 그는 기에 굶주린 사람들이 벌이는 기의 쟁탈전 가운데 있
어야 합니다. 돈, 권력, 명예, 인기와 같은 것은 기가 고갈된 존재들이 추구하는  인공적으로 
합성된 기입니다. 인조된 에너지는 그 효과가 오래가지 못하며 결국 기의 목마름을 더운 부
채질할 따름입니다.    
  기의 목마름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자아의식의 한계를 넘어 순수의식으로 돌아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없는 창조력 , 한없는 생명력의  주인이 되는 길이며, 심신의 질병
이나 삶의 온갖 고통에서 풀려나는 최상의 길입니다. 
 
    신념이 경험을 부른다
  내 마음의 원판 필름에 새겨져 있는 여러 신념, 상념, 감정들 가운데서 특별히 어떤  것에 
마음의 초점이 모아지면 자연히 그곳으로  주의가 보내집니다. 주의가 많이  가는 것일수록 
자기가 강하게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 주의가 신념의 필름을 통과하면서 신념의 정보를 스
크린에 확대하여 비추게 될 때 나타나는 모습이 바로 경험하는 현실입니다. 
  나의 신념은 마치 텔레비젼이나 라디오  수신기의 동조회로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내가 
선택한 채널의 주파수만 통과시키고 그 주파수 이상이나  이하의 것은 모두 걸러냅니다. 이
렇게 되면 나는 내가 선택한 주파수의 화면과 소리를 보고 듣게 됩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무엇을 너무 좋아하여 욕망의 주의를 보내면 욕망의 대상에 보낸 주의
의 힘이 그 대상을 경험적 현실로 끌어들입니다. 그동안 인류가 이루어 놓은 과학, 예술  같
은 창조들은 이러한 원리와 메커니즘의 결과입니다. 욕망과 마찬가지로 무엇을 싫어하여 저
항하면 그 저항의 주의가 에너지화하여 싫어하는 창조를 현실로 끌어들입니다. 인류가 겪어
온 전쟁, 범죄, 질병 같은 일체의 고통들은 인류의 집단적 저항신념이 불러들인 결과입니다. 
역설적인 이야기이지만 전쟁, 범죄, 질병 등에 저항의 주의를 많이 보내면 보낸 만큼 이들은 
더욱 증대될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지금 질병이라는 현실을 경험하고 있다면 그에게는 질병을 지어낸 신념
이 꼭 있을 것입니다. 
  나의 주변에 모이는 사람, 대상, 일들은 나의 신념 곧 나의 에너지 파장에 감응하여  모여
든 것입니다.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 대상, 상황들은 일 백 퍼센트 나의 반영입니다. 
  옛 비유담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호숫가에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그것이 암컷이라고 할 때,  물 속에 비친 제 그림자
를 수컷으로 알고 감응하여 열매를 맺는 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사실로 있답니다. 이것은 
나무의 욕망이 경험되는 사례이지만 저항이 경험되는 사례로서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개 한 마리가 호숫가에 앉아 있습니다.  물 속을 들여다보니 물 가운데서  개  한 마리가 
자기를 쏘아보고 있습니다. 기분이 상해서 발길질을 하니 물 속의 개도 따라서 발길질을 합
니다. 화가 나서 으르릉 대며 짓어대니 물 속의 개도 화가 나서 공격해 오고 있습니다. 너무 
화가 나서 상대를 물어뜯을 셈으로 물 속에 뛰어들어  결국은 죽고 말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반목과 투쟁이 모두 이런 식이라는 것이지요. 
  누가 지금 지독하게 밉게 보인다고 합시다. 대개는 저 놈이  미운 짓을 하니까 내가 밉게 
보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최초의 원인제공을 상대가 하고 있으니까 내 잘못이 아니
라는 식이지요. 상대가 미운 짓을 하는 현실을 내가 경험한  결과 내가 미워하는 신념을 가
지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신념이 경험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경험이  신념을 가져온다는 
생각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와 같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내면을 잘 살펴보고 신념들을 뒤져보면 거기에는 무엇인가를 싫어하고  배
척하고 저항하는 신념, 상념, 감정이  꼭 있을 것입니다. 순수의식의  차원에 있는 존재처럼 
저항의 신념이 모두 사라졌다고 할 때 아직도 그 미운 대상이 밉게 보일까요?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천사와 같은 모습으로부터 악인과 같은 모습까지 두루 다 지니고 있습
니다. 한쪽 끝에서는 천사라는 가장 좋은 배역,  의상, 연기를 준비해 놓고 있으며, 다른  쪽 
끝에서는 악인이라는 가장 나쁜 배역, 의상, 연기를 준비해 놓고 있습니다. 이 양 극단 사이
에 무수한 종류의 역할을 빈틈도 없이 준비해 놓고 기다립니다. 나의 각본이 지정하는 배역
에 따라 상대는 의상을 입고 무대에 서서 연기를 보여줍니다. 각본이 나의 신념이며 상대가 
맡은 배역과 연기가 내가 경험하는 현실입니다.   
  상대가 밉게 보이는 순간 내 마음 가운데 어두운 신념이 있음을 바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내가 끼고 있는 검은 색안경을 벗고 바로 보면 대상은 참으로 귀하고 그리운 존재인 것입니
다. 살인 강도나 독사나 어떤 악독한 대상도 검은 안경을  벗고 보면 악독한 존재가 아닙니
다. 밉게 보이는 사람이야말로 악역을 맡아가면서 나의 어두운  면을 되비쳐주는 고마운 대
상입니다. 어떤 사람에게서 허물이 보이면 그 사람에게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잘못 보는 
내 마음에 허물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 허물을 비쳐주는 선생님이시여. 감사합니다."
라고 해야 합니다. 나의 적이야말로  스승입니다. 너는 나를 머금고  있는 너/나이며 , 나는 
너를 머금고 있는 나/너입니다.
  경험이 신념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신념이 경험을 가져옵니다.
  그렇지만 가끔 경험이 신념을 가져오는 일이 틀림없이 있어  보입니다. 예를 들면 출근시
간에 이 길로 가면 교통체증이 심하다는 경험을 한 후 나는 이 길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신
념을 가지게 되었다와 같은 경우입니다. 신념과 경험과의 관계를 정확하게 정의한다면, 모든 
것의 근원인 순수의식의 차원에서는 신념이 일체의 경험을 가져오지만  "내가 있다"는 한정
된 자아의식의 차원에서는 신념이 일체의 경험을 가져오지만 "내가  있다"는 한정된 자아의
식의 차원에서는 경험이 신념을 가져오는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이 우주와 세계는 순수의식으로부터 모양지어져 나옵니다. 이것은 환상이 아닙니다.  환상
은 세계로부터 의식이 나온다, 사람의 뇌의 작용에서 의식이 나온다는 생각입니다. 요즘  세
계적으로 두뇌를 연구하는 붐이  일어나고 있는데, 두뇌의 생화학적  작용을 아무리 분석해 
본다 한들 거기에서 순수의식은 발겨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물질세계는 자연법칙과 물리적 
운동의 원리에 따라 생성 변화 발전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나'들의 자아의식의 창조에
너지가 물질입자화되어 굳어진 결과입니다. 곧 이 물질우주는 고형화한 자아의식입니다.  
  따라서 의학, 생물학, 물리학, 정치학, 경제학 등 모든 학문적 분야를 계속  탐구해 들어갈 
때 마지막에는 틀림없이 의식이라는 주제와 만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식과 신념체계에 대
한 탐구로부터 출발하여 학문의 연구를 시작한다면 근본원리를 훨씬 빠르게 발견할 수 있다
고 생각합니다. 나의 몸,  뇌, DNA는 자아의식의  신념에너지가 입자화되어 모양을 나타낸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경험하는 이 세계는 인류의 집단신념의 결과입니다.  사실 이 물리적 우주는 
우주 가운데 있는 의식의 존재들. 그들이 몸을 가지고 있든 없든 간에 사람으로부터 동물이
나 미물들까지를 포함하여 생각을 지어내고 있는 일체의 존재들이 함께 창조하고 있습니다. 
  어떤 집단의 구성원들이 함께 겪는 공동현실은 그 구성원들의 신념의 평균치가  에너지화
한 결과입니다. 예를 들어 인류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경쟁적인 산업문명, 환경파괴,  전쟁, 
난치병의 유행 같은 것이나, 어떤 지역에서의 경제위기, 교통문제, 대기오염 등의 원인을 추
적해 가면 틀림없이 그것을 가져올만한 집단신념이 자리잡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하니 당신이 무엇을 믿고 있는가가 당신의 삶과 이 세계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칩니다. 
당신은 무엇이 있는지 믿을 수 있고 믿는 대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믿을 까는 당신
이 결정할 일입니다. 이제 당신은 경험하기를 원치 않는  신념을 찾아내 지우거나 경험하기 
원하는 신념을 새로 지어내는 방법을 배워갈 수 있습니다. 
 어떠한 현실도 결코 당신의 마음  밖에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앞으로도  결코 당신의 마음 
밖에서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세계는 커다란 두 개의 에너지 축에 의해서 움직여지고 있습니다. 그 하나의 축은 "내 
생명의 근원은 무한한 에너지로 충만되어 있다." 그리고 다른 하나의 축은 "나는 믿는 대로 
경험한다"입니다. 이 두 개의 명제가 현실세계를 모형지어  창조해내는 씨줄과 날줄이며 평
면도 상의 x축과 y축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 두 개의 에너지 축을 원만하게 활용할 수 있게 
될 때 그는 자기 삶에서 마술을 창조할 수 있습니다. 그는 그가 상상할 수 있는 무엇이든지 
이 우주에 창조할 수 잇게 됩니다. 이러한 일이 당신에게도 가능합니다.      
 
    우리 생명의 근본 목표
  생명의 근원과 하나되기는 우리가 몇 만 생을 되풀이하여 산다하더라도 기필코  이루어야 
할 내 생명의 근본 목표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가야 할 단 한의 길, 어떠한 선택의  여지도 
없는 외길입니다. 나머지 이런저런 세상일들이란 이 길을 바로  가는데 도움이 되는 수단일 
뿐입니다. 생명의 근원과 하나되기란 내 생명의 근원인 순수의식의 차원으로 온전히 돌아가
기입니다.  생명의 본성대로 일 백 퍼센트 사는 존재가 되기입니다. 
   생명의 근원과 하나되기가 왜 가야 할  외길이며 삶의 근본 목표일까? 이것이 지향하는 
궁극의 목표는 어디에 있는가?
  한마디로 불사의 길을 얻는데 있습니다. 
  죽음이란 어떤 사람도 피할 수 없는 숙명인데 어디에 죽지 않는 길이 있단 말인가? 죽지 
않는 길이 있는 것은 환상이 아니라 환상은 바로 '내 생명은 꼭 죽고야 만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양이 있는 것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죽음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참 생명, 
생명의 실상은 모양이 없습니다. 실상의 생명이 모양을 나타내면 가상이며 허상입니다. 그림
자 같고 꿈 같은 것입니다. 우리 몸처럼 모양이 있는 것은 생명의 빛, 생명에너지의  파동이 
지어낸 허상이자 그림자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내 몸의 죽음이 바로 내 생명의 죽음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내 몸의 죽
음=내 생명의 죽음이라는 등식을 믿기로 고집하는 한, 낳고 죽고  낳고 죽고를 끝없이 되풀
이하는 경험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등식은 진실이 아닙니다. 내 생명의  본성은 
원래가 죽음이 없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러합니다. 다만 생명의 근원과 분리된 내가 따로 있
다는 착각에 가려 그걸 바로 보지 못할 따름입니다. 
  '나', '내가 따로 있다'는 한정을 비롯하여 내가  자신에게 결박지어  놓은 한정들을 모조
리 다 풀어버리는 것이 생명의 근원과 하나되기, 즉 순수의식으로 돌아가기입니다.
  지금 인류의 절대다수는 불행과 고통  가운데 있습니다. 참으로 행복하고  편안한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어느 누가 나는 지금 행복하다, 편안하다고 말한다면 정말로 그러한지 맟
추어 볼 만한 기준이 여기에 있습니다. 
  당신은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났는가? 죽지 않을 영생을 얻었는가? 이 질문에 조금이라도 
망설임이 있다면 아직은 아닌 것입니다. 당신에게 지금 욕망과 저항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가? 당신은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는 지혜와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
가? 당신이 어떤 상황에 놓이더라도 걱정과 두려움이 없겠는가? 모든 사람, 모든 존재를 볼 
때 내 몸을 사랑하듯 조건없는 자비심이  일어나는가? 이러한 질문에 주저함이 없이  "그렇
다"라고 대답할 수 없다면 당신에게는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자신이 지금 행복하다고 자처하고 있다면  스스로를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행보한 
척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행복하도록 노력해야지의 수준에 있는 것은 아닌지, 정직하게  살
펴 보아 무엇에도 걸림이 없는 편안함에 이르지 못했다면 참으로 안심입명이 되는 길을 가
야만 합니다.     
  사회 경제적 불평등, 정치적 억압, 인종차별, 자원부족, 환경파괴, 군비경쟁 같은 외부적인 
요인이 현실적으로 인류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큰 원인이지만, 그리고 이런 문제들은 인류가 
함께 노력해서 꼭 풀어야 할 과제이지만, 그보다도 인류가  고통을 경험하는 근본원인은 욕
망과 저항의 집단 신념입니다. 이런 집단 신념의 뿌리는 나라는 생가, 내가 따로 있다는  생
각입니다. 먼저 나라는 이기심을 나부터 다루어야 하며 이것이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할 과
제입니다. 
  고통 가운데서도 굶주림, 전쟁, 질병  같은 것이 가장 무서운  고통이라고들 하지만, 실은 
가장 무서운 고통의 원인은 이 '나', '내가 따로 있다'는  환상의 믿음입니다. '나'라고 하는 
것이 고통의 총대명사입니다. 인류의 근본 고통을 해방시키기 위해 깨어나는 문명의 전사들
이 쳐부수어야 할 최고의 타겟은 인류를 꽁꽁 묶고 있는 그 이기적인 '나'입니다. 
  이것은 무지의 소산입니다. 우리는 무지와  무식을 구별해야 합니다. 어떤 삶이  박사이고 
교수라고 하더라도 나를 못 떠나고 있으면 무지이고, 어떤 사람이 학교도 못 나오고 일자무
식이라고 하더라도 나를 떠나 나가 없는 차원에 있다면 그는 무지가 아닙니다.
  '나'가 없는 일자무식의 지혜를 태양에다 비유한다면 '나'를 못 떠난 박사의 지식은 반딧
불만도 못한 것입니다. 어떤 위대한 학자가 '나'를 못 떠난  채 '너 따로 있고 나 따로 있다
'는 차원에서 인류의 번영과 행복을 도모하는 화려한 이론을 지어냈다 하더라도 그것은  근
본적으로 도움이 안됩니다. 아무리 위대한 과학자, 의학자라 하더라도 분리된 '나'를 통해서
는 나무의 잎만 보고 뿌리는 못보고 맙니다. 선진적인  과학기술과 이론으로 분석하고 비추
어본다고 할지라도 생명의 본질고 성품은  끝끝내 드러나지 않을 것입니다.  근본을  볼 수 
있는 능력은 나를 버리고 나 없는 차원인 생명의 본성과 온전히 하나되는 경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세상에 떠돌아다니는 많은 정보와 지식들,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입으로 옮기는 얄팍한 
지식들은 사실 힘이 없습니다. 이것들은 대부분 얼마 안 가서 휴지 조각이 되고 맙니다.  머
리로 헤아리기가 아니라 가슴에 사무쳐 체험한 앎, 직접  경험하기를 통해서 얻은 지혜만이 
참 행복을 가져다주는 생명력이 있으며 생사를 해결하는 힘이 있습니다. 
  "나는 아무개다, 나는 몇 살이다, 나는 남자다 또는 여자다, 나는 동양인이다 또는 서양인
이다, 나는 잘났다 못났다, 나는 운이 좋다 나쁘다, 나는 무엇을 좋아한다  싫어한다, 무엇이 
나에게 중요하다 그렇지 않다, 나는 선생이다, 교수다,  박사다, 사장이다, 내 재산은 얼마이
다, 내 고향은 어디이고 이런  집안 출신이다, 나는 어느 학교를  나왔고 내 경력은 이렇다, 
누구는 내 친구이고 누구는 내 경쟁자이다, 나는 이런 비밀을 가지고 있다....."  
  '나'에다 덧붙여 놓은 한정된 생각들을 모두 나열하는 데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
까요?
  이 '나'라는 생각에다 무수하게 많이  한정지어 붙여 놓은 생가들의  총화가 곧 스스로가 
자기라고 여기는 자아상입니다. 나는 누구이다는 생각과 동일화 시켜놓은 아이덴티티  입니
다. 내가 있다는 생각의 뼈대에다가 수많은 나는 무엇이다. 라는 생각의 살덩어리들을  덕지
덕지 붙여서 '나'라고 하는 조각품을 창조해 낸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많은 생각의 뭉치들을 항상 지니고 다니며 관리를 하고 있어야 하니 삶이란 도
대체 얼마나 고달프고 괴로운 것입니까?  이것은  마치 달리는 열차 속에서도 무거운 짐을 
지고 끙끙대는 꼴과 같습니다. 이것을 몽땅 내려 놓으면 얼마나 편하고 후련하겠습니까? 내
가 짐을 내려 놓는다고 해서 달리는 열차가 멈추지는 않을테니까 말입니다.    
  나는 무엇이다라고 한정을 짓게 되면 근원의 나인 한정 없는 순수의식의 바탕에다 한정된 
경계선을 그려서 내가 그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나란 근원의식이 임시로 사용하는 하나의 생각일 뿐이며 그 생각을 통해서 다음 생각들을 
탐사하고 경험하는 도구로 이용하는 것입니다. 내가 따로 있다고  고집하는 것은 바다 위에 
솟아오른 하나의 파도나 허공 중에 떠다니는 물방울을 끝까지 보존하고자 하는  몸부림입니
다. 
  어떤 사람이 원한다면 자신의 근원의식을  자꾸만 작게 나누어 매우 작은 물방울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마치 누에가 스스로 작은 고치 속에 잠기듯. 나는 이것이고 나는  저것
이 아니다라는 한정을 계속 지어갈 때 생명의 근원과 따로 떨어져 있다는 환상 가운데 머물
게 됩니다. 이것이 나의 자아상을 지어내는 방식입니다. 
  이렇게 되면 나는 한정 없는 근원으로서의 느낌을 잃기 시작하며 의식도 지각능력도 오므
라들게 됩니다. 분리된 나와 생명의 근원과의 통로가 좁아지게 되고, 근원에서 보내지는  생
명에너지는 점점 고갈되어 갑니다. 나는 결국 근원과 너무 멀리 떨어지게 됨으로써 그 근원
이 바로 나라는 사실을 까맣게 망각하게 되고 맙니다. 그러니 늘 불안하고 두렵기만 합니다. 
내가 어떤 한정된 위치나 실질 속에 따로 있다는 환상이 끈질길수록 몸이 죽어 몸이 사라진 
뒤에도 그 환상을 못 버리고 환상의 상념체로 떠다니기도 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매우 작게 한정지은 의식의 차원에 머물기로 결정한다면 온 우주가 자
기의 밖에 있어 보입니다. 모든 것이 다 자기 품속에 안고 있을 만큼 확대된 의식의 차원에
서 머물기로 결정한다면- 이를테면 공간 너머   가기 연습을 할 때 경험했던   텅 빈 허공 
같은 의식의 상태처럼---우주는 자기의  품안에 있게 됩니다.  온  우주는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생명으로 보입니다. 사람의 마음이란 확대하면 천지우주를 감쌀 만큼  넓어질 수 있
고 좁히자면 바늘구멍보다 더 좁아질 수 있습니다. 바로 보면 천지우주는 나의 근원의 마음
인 순수의식 가운데 있는데 말입니다. 
  우주 속에 내가 있다는 것이 신기한 일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우주가 있다는 것이 신기한 
일입니다. 
  나는 물질적인 몸이 아니고 생각하는 마음이 아니며 떠돌아다니는 영혼이 아닙니다. 나는 
이러한 것들이 지어져 나오는 배경입니다. 모양도 실질도 한계도 없는 그 배경이 바로 나입
니다. 이 배경은 시공도 차원도  물질도 아니지만 그러나 이것은 영원히  살아 있는 영생의 
생명 그 자체입니다.  
 
    생명의 본성대로 사는 길
  생명의 현상과 생명의 실상을 구분하여 말하고 있으나 이 둘은 바로 하나이며 분리할 수 
없는 일합상입니다. 물질과 정신은 둘이 아니며 몸과 마음은 둘이 아닙니다. 쇠붙이와  나무
라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성질의 재료가 합해져 가구가 되는 것처럼 물질과 의식이라는 서로 
다른 두 가지가 모여 내 생명이 된 것이 아닙니다 물질 그대로 의식이고 의식그대로 물질입
니다. 몸 그대로 마음이며 마음 그대로 몸입니다. 근원에서 바로 보면 온 우주는 오직  의식
이요 마음뿐입니다. 내 마음의 안과 밖이 따로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 . 마음과 몸이 따로 
인 것처럼 여겨지는 것은 말이 빚어낸 착각입니다. 
  근원의 생명은 모든 존재들 가운데 빈틈도 없이 골고루  머금어져 있는 무엇입니다. 이것
은 논리적 차원 너머에 있습니다. 이것은 개별적 존재들 가운데 내포된 것이 아니므로 낱낱
으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러함에도 분리된 세속의 나는 따로  떨어져 보이는 다른 대상들
을 싫어해서 배척하거나 좋아해서 욕망해야 합니다. 대상들로부터 자기 이익을 쟁취하기 위
해 끊임없이 계산하고 있지만 만족은 끝끝내 얻어지지 않습니다.  항상 불안하고 외롭고 두
려움 가운데 잇게 됩니다. 따라서 분리된 세속의 나는 아지랑이를 좇다가 지쳐 넘어진 사슴
처럼 환상에 속아 에너지만 낭비해 버리게 됩니다.   
  이 분리된 나가 환상에서 깨어나기 시작하면서 사실을 사실대로 바로 보기 시작할 때 세
계를 판단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욕망과 저항의  투쟁 속에 휩쓸리지 않으며 
모두를  동정과 이해로만 바라봅니다. 그에게는 거절하는 마음도 바라는 마음도  없으므로 
부족함도 소유욕도 없습니다. 그가 스스로에게 들씌워 놓은 한계와 제약들을  벗기 시작할 
때 분리감도 사라져갑니다. 우주 전체를 품에 안고 있는 느낌을 회복하게 됩니다.  조용하게 
참고 견디며 세상을  있는 그대로 사랑으로만 바라봅니다. 그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때
는 온 세상 모든 존재의 공동이익을 위해서만 합니다. 무한한 지혜와 한없는 자비로 충만한  
존재가 되어갈 때 그에게는 분리된 내가 따로 있다는  생각이 소멸되기 시작합니다. 그에게
서 무한한 지혜란 모두를 하나의  생명으로 보는 무조건적인 받아들임이요.  한없는 자비란 
모두를 내 생명으로 여기는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내가 따로 있다는 생각의 찌꺼기가 남김없이 사라질 때  나는 물방울이기를 그만 둡니다. 
물방울이 사라지므로 허공이 곧 나입니다. 천지우주가 바로 내 생명입니다. 
  우주로서의 나, 근원으로서의 나는 이제 어떠한 한계도 제약도 없습니다. 이제 죽음이  없
는 영원한 생명 그 자체입니다. 세상의 행복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지복입니다.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는 지혜이자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일체의 걱정과 두려움이 사라지
므로 고요함과 편안함 그대로입니다. 오염됨이 전혀 없는 무한한 순수함과  아름다움입니다. 
한마디로 생명의 빛입니다. 이러한 존재의 차원에 들고 싶은가요? 그것이 가능합니다.  이미 
우리의 본성은 이러한 차원 가운데 있습니다. 다만 망각하여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생명의 근원과 하나되기 위해서는 먼저 생명에 대한 바른 견해와 안목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는 감각기관들의 한계 즉 사실대로 바로 보니 못하는 한계가 빚어낸 
허상과 착각의 세계입니다 생명의 근원과 하나되기는 이러한 그릇된 지각의 한계를 뛰어 넘
어 사실을 사실대로 바로 볼 수 있는 능력을 회복하기입니다.  이 우주와 세계의 참모습 곧 
실상을 실상대로 꼭 그대로 보고 경험하는 차원에 들어가기입니다. 
  우리 나라 정월 대보름 때는 횃불이나 불깡통 돌리기 놀이를 하는 풍습이 잇습니다. 불깡
통 돌리는 모양을 보고 있으면 불동그라미만 실제처럼 있을 뿐 불깡통은 안 보입니다. 사실
로는 불깡통만 있는 것이고 불동그라미 모양은 우리 눈이 지어낸 허상이자 착각현상인데 말
입니다. 사람들 몸이나 불깡통에 해당하는 생명의 근원이 눈에는  안 보인다 하더라도 참으
로 그것만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현대는 물질만능, 과학만능 시대라서 눈에 보이는 것만 진실이고 눈에 안 보이는 것은 미
신 취급당하는 분위기가 있지만 무엇이 눈에 안보이기거나 과학적 증거가 제시되지  않는다 
하여 사실로 있는 것을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겉모습이나 결과에만 눈이 팔려 
참모습이나 원인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공중에 연기가 솟아오를 때 연기만 보이고 불은 안 보인다 하더라도 불이 없는 것은 아닙
니다. 전깃불만 보이고 전류를 보내고 있는 발전소가 안 보인다 하더라도 발전소가 없는 것
이 아닙니다. 바다 표면에 떠 있는 수많은 파도와 물거품을 보면서 파도가 높다 낮다,  물거
품이 크다 작다는 생각에 빠져 한없이 넓고 깊은 바다 전체를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생명의 실상을 실상대로 보기란 불동그라미를 지어내는 불깡통을, 연기를 피워내는  불을, 
전등불을 볼 수 있게 하는 발전소를, 파도들의 근원인 전체 바다를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몸을 지어내고 있는 생명에너지의 근원이 우리 눈에 여실히 안 보인다고 하더라
도 꼭 있는 것이니까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이 허상이고 눈에 안 보이는 생명에너지가  실상입니다. 우리 눈이 보는 
것은 대체로 거꾸로 보고 있습니다 
  사람의 몸이나 자연계의 만물들을 지어내는 근원이란 별개로 잇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근
원, 하나의 뿌리입니다. 다도해상의 수면 위에 보이는 여러 섬들이 따로 떨어져 별개로 보입
니다. 이것은 바닷물에 가려서 별개의 섬들로 보일 뿐이지  바닷물 밑바닥에서는 같은 개펼
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러 섬들이란 개펄 위에 여기저기 솟아있는 언덕 같은 것으로서 실
은 하나의 땅덩이입니다. 
  이 사람 몸이나 저 사람 몸이나 동물이나 식물이나 돌이나 무엇이나 따로따로의 섬과 같
아서 모양만 다를 뿐 그 밑뿌리는 하나의 생명 덩어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바닷물에 가려 
개펄이 눈에 안보이듯이 생명의 근원이 눈에 안 보인다 하더라도 명백히 하나의 생명 덩어
리로 존재합니다. 눈에 안 보이는 생명의 근원이  진짜 나이며 눈에 보이는 내 몸, 저  사람 
몸, 동물, 식물 등 모든 존재들은 내 생명의  근원에서 솟아난 나의 분신들입니다. 그러므로 
우주 전체가 근본적으로 하나의 생명입니다. 
  우주는 하나의 생명이다라는 견해를 놓치지 않는 것은 순수의식의 차원에서 세계를  바라
보고자 노력함인데 이 순수의식이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서 매우 추상적으로 느껴집니다. 
그래서 옛부터 순수의식의 차원에서 우주가 하나의 생명임을 투철하게 체험한 성자들이  한
결같은 표현을 참고 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온 우주는  생명의 빛으로 충만되어 있다는 표
현이 그것입니다.  태양 빛 같은 가시광선이 아니라 고요하고도 영롱한 맑음인 마음의 빛이 
천지에 빈틈없이 충만해 있음을 한결같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온 세상이 하나의 생명이라는 생각을 떠나지  않으니 누구를 보든지 큰사랑으로 대할  수 
잇게 되고 생명의 빛의 충만 가운데 있으니 늘 큰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방법
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최상의 처세술이며, 환자에게는  자연치유력 가운데 잠길 수 
있는 최고의 자기 치유법입니다. 
  우리가 생명공부를 지성으로 하여 의식이  정화되고 생명의 광명에 가까워질수록  모두가 
하나의 생명으로 느껴지며 의식은 크게 확대됩니다.  분별시비가 줄어들고 모두가 사랑스럽
고 귀하게 느껴집니다. 이렇게 되니 고통은 점점 줄어들고 행복감이 커집니다.
  반대로 우리 의식이 광명과 멀어질수록 물질세계에 대한 집착이 강해지고 의식은  오므라
들며 모두가 분리되어 있으므로 항상 두렵고 불안합니다. 
  생명의 빛에 가까워진 만큼 정비례하여 편안하고 행복해지며 여기에서 멀어진 만큼  고통
스럽고 불행해집니다. 
  '미련한 새는 바람을 거슬러 올라가고, 지혜로운 새는 바람 따라 간다'는 가르침이 있습니
다. 생명의 빛 쪽으로 가게 되면 생명의 본성과 같은 방향이므로 순풍에 돛단 듯 무리 없이 
쉽게 살아 갈 것인데 생명의 빛과 등지게 되면 생명의 본성과 어긋나게 되어 항상 힘에  겹
고 고통스럽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우주는 하나의 생명이며 온통 생명의 빛으로 가득하다"는 신념이 아무런 힘이 없는 허무
한  생각이 아니라 무한한 생명에너지를 창조해냅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가슴에 사무치게 
이 느낌을 유지하고 있다면 무서운 암 세포도 그를 위협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에
게 있어서는 암세포까지도 그와 더불어 조화를 이루는 하나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온 우주가 하나의 생명으로 여실하게 체험된 순수의식 그 자체가 된다면 죽 않는 영생의 
존재가 됩니다. 죽음이 있게 되는  원인은 내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순수의식의  차원에서는 
이런 생각이 없으므로 죽음이나 낳음이 나타날 이유가 없습니다. 
  이차원은 세상의 행복과는 비교할 수 없는 무한행복이며  모든 것을 다 알고 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입니다. 모든 두려움이 다 떠나 버린 티없이 맑고 순수한 아름다움입니다.  무조
건적인 받아들임과 자비심 그 자체입니다. 
  온통 지고의 사랑 덩어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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