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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정보/마음

여덟째 마당- 삶을 위한 명상

by Healing New 2020. 6. 28.

    이 세계는 집합의식의 반영
  지금 당신의 정원에서 장미꽃 한  송이가 피어나려고 합니다. 그 꽃  한 송이가 피어나는 
데에는 어떤 요인들이 작용하게 될까요?
  당신의 노력? 물론입니다. 장미나무를 심고 가꾼 당신의 노력이 장미꽃을 피우는 데에 가
장 중요한 요인이 되었을 테지요. 그러나 과연 그것뿐일까요?  잘 살펴보면 여기에는 더 많
은 요인들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장미나무의 묘목부터 살펴봅시다. 그 묘목은 어미나무로부터 절지한 것이고, 그 어미
나무는 또 그것의 어미나무에게서, 이렇게 따져가다보면  지구상의 맨 처음 장미나무에까지 
소급해 올라갈 수 있겠지요.
  그리고 당신에게 묘목을 건네준 묘목상 주인, 그 집주인을 이 세상에 있게 해 준 그의 부
모, 당신의 부모도 빠뜨릴 수 없겠지요. 그 부모의 부모까지. 결국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사람, 존재했던 사람들이 모두 직, 간접적으로 이 장미꽃 하나에 관여하고 있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장미나무가 뿌리박고 있는 흙은 지구와 따로 분리되어 있지 않은 하나
의 땅입니다. 싹을 틔우고 자라기 위해 필요한 공기, 햇볕, 물....... 그 밖의 알 수  없는 여러 
요인들에 의해 장미꽃이 지금 꽃망울 을 터뜨리려 합니다. 온 자연계 전체가 끝없이 겹치고 
겹쳐서 이 순간에 한 송이 꽃망울로 나타나는 것이지요.
  이 말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장미꽃 한 송이에도 온 우주의 정기가 응축되어 있다는 말입
니다. 장미꽃 하나가 곧바로 우주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결코 생각의 비약이 아닙니다. 사실
을 사실대로 보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옛 성현들은 "모든 티끌마다 우주가 가득하네"라고 노래했습니다. 사실 하나의 작
은 먼지일지라도 그것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우주 전체가 빠짐없이 동참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한 아기가 태어나고 있다면 거기에는 부모의 결합뿐만 아니라 온 우주가 가 관여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강도니 뇌물수수니 하는 사건들이 언론에 보도되면 나와 그 범죄는 무관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범인을 욕하고 비판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들 모두가 틀림없이 그 범
죄에 연루되어 있습니다. 직, 간접적인 관련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아프리카에서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사람, 미국에서 에이즈로 죽어가는 사람, 지금도  지구 
어느 곳에서 벌어지고 있을지 모르는 전쟁이나 환경파괴 하늘의 오존층 파괴, 그런 모든 위
기 상황들은 내게도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들에 우리가 모두 관여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직접적이고도 근원적인 원인은 바로 대중들의 집합의식, 다시 말해 집단신념의 결
과입니다.
  개인의 현실적 경험의 배후에는 그 사람의 신념이 결정적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처럼 
어떤 집단이 함께 경험하는 공동 현실에는 그 구성원들의 집합의식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칩
니다. 모든 집단들의 각각의 공동 현실은 각 집단의  구성원들이 형성한 대중의식의 평균치
가 그대로 반영되고 있는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란 개별적 의식의  편린들이 창조해낸 신념들이 모여서  체계가 세워지고, 그 
체계가 진화하여 온 신념체계의 반영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현실세계의 배후에는 반드시 신념이 자리잡고 있으며, 그러한 신념이 현실세계를 움
직이는 중심동인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어떤 개인이 상황 속에서 최초로 지어낸 신념이 삶에서 유용한 역할을 하면 주변 사람들
의 주의를 끌게 되고, 이것이 전파되면서 더욱 세련되게 다듬어져 하나의 지식의 자격을 얻
게 됩니다. 이렇게 형성된 신념체계(지식)는 사람들 사이에 거래가 되기도 하고 더러는 집단
간의 대립의 원인이 되어 충돌이나 전쟁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오늘날 세계적인 환경오염, 경제위기, 집단간의 분쟁과 전쟁의 배경을 잘 살펴보면 그러한 
공동현실에 부합되는 집단신념이 반드시 자리하고 있습니다.
    집합의식의 두 얼굴
  한반도의 남북분단이 반세기가 넘도록 지속되고 있는  데는 온 세계가 다 이에  관련되어 
있겠지만 그 가운데서도 남북의 대중들의 집단신념이 가장 직접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
을 것입니다. 양체제는 한결같이 자기체제의 정통성과 우월성을 주장하고 있으며 그러한 신
념을 완강한 공격성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그 신념의 저변에는 양쪽 거의 다 병적인 수준의 
공포와 피해의식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두려움과 피해의식은 무엇인  척하기와 같은 부정을 
낳아주며 이것은 상대적인 우월감으로 위장되면서 잔혹한 공격성으로 표현됩니다.
  한국인들의 내면에 감추어진 이러한 집단적인 피해의식과 공포는 장구한 시련의 역사  속
에서 증폭되어 왔다고 보여집니다.
  같은 민족끼리의 분열과 대립이라는 뼈아픈 고통 속에는 공포와 피해의식으로부터 벗어나
도록 가르치고 있는 생명의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겉으로는 자존심과 우월의식, 속으로는 공포와 피해의식이라는  이와 같은 집단적인 이중 
감정의 필름이 완전히 소멸되기 전에는  현실의 스크린은 모양만 바꾸어가면서 분열과 대립
의 모습을 계속해서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  
  만약 호남이 없다면 곧 나라가 없다라는 충무공의 글귀는  호남지방의 많은 가정집, 공공
기관 등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습니다. 호남사람 치고 이 글귀를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
을 것입니다.
  임진, 정유 양난을 통해서 온 나라가 외적들에 의해  유린되고 있을 때 "호남이 아니었더
라면 나라를 구하지 못했을 것이다." 라고 충무공은 진심으로 생각했을  것이고, 따라서 
호남인의  구국항전의 높은 기개를 찬탄하여 이런 글을 지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호남인들은 이 글을 호남의 자랑으로 여기고 있고 또한 이 글의 정신이 후대
들에게도 면면히 이어져야 한다고 믿고 있는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호남인들 그리고 일부  비호남인들의 대중의식 가운데에는 이 글귀의 내용과 같
이 나라와 세상이 위태로울 때는 호남이 아니면 이를 구할 수 없을 것이라는 집단신념이 새
겨져 있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호남인들은 호남을 의향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하고 세상이 어려울 때는 다른  지역
에 비해 상대적으로 의로운 헌신성을 발휘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호남은 의향이며 호남이 아니면 나라를 구할 수 없다는 대중의식은 나라를 구하는
데 어느 정도 기여를 했겠지만, 이것은 한편 지난 역사 속에서 주로 호남지역에 집중되었던 
기가 막힌 고통을 불러들이는 데도 일정한 정도의 작용하였을 것입니다.
  지난 한 세기를 돌아다보면 우리 민족 모두에게 혹독한 수난기였지만 그 과정에서도  거
의 모든 비극은 호남지역에서  일어났고 따라서 자연히  호남민중들이 가장 엄혹한  시련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1백년 사이에 호남지역에서 일어났던 참혹한 시련의 주요 사건을 돌이켜 보면, 
 1894년 동학농민운동
 약 15년 후 의병호남 대토벌
 약 20년 후 광주학생 항일운동
 약 20년 후 여수 순천군인사건
 이어서 그 연장선상에서 지리산 토벌
 약 25년 후 5.18 광주민주항쟁
  지난 1세기에 걸쳐 일정한 주기로 반복되고 있는 뼈아픈 사건들은 지금 입으로 쉽게 나열
하고 있지만  당시 고통을 경험했던 민중들, 특히 피해 당사자와  가족들이 겪은 비극의 참
혹성은 세계 어느 나라의 역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어떠한 역사적 사건이나 그 사건이 있게 되기까지에는 그 책임이 무겁고 가볍고의 차이가 
잇고 그 원인이 직접적인가 간접적인가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여기에는 알게 모르게  수많은 
요인이 얽히고 설켜서 관여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그 사건을 직접 경험하
는 당사자들의 집합의식이 그 사건의 배후에서  가장 큰 원인인자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호남인들, 특히 호남의 자라나는 세대들은 "호남은  의향이며 호남이 아니면 나라를 구할 
수 없다" 는 신념을 이제 더 이상 자랑으로 여기며 끼고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호남은 의향이며 호남인은 정의로운 민중이다." 라는 신념을 계속 떠맡기로 한다면 그 신
념은 외부에 정의롭지 못한 세력을 동시에  창조하게 될 것이고 따라서 호남인들은  언제나 
자기가 창조한 불의의 세력과 맞서 있어야만 합니다.
  호남인이건 비호남인이건 "호남인 의향이다"라는 집단신념을 끝끝내 버리지  않는다면 대
중의식 속에 잠재하고 있는 "호남인은 외롭다." 는 반쪽 신념(욕망)과 이  신념이 밖으로 투
사한 "호남의 외부에는 의롭지 않은 세력이 있다."라는 다른 반쪽의 세력의 신념(저항)의 내
부투쟁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그러한 신념의 양면성에 속아넘어가 끊임없이 현실 속으로 호
남이 의향임을 과시하는 비극적 사건들을 끌어들이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하나의 함정이요 덫입니다.
  이제 호남인들은 다같이 충무공의 거룩한 뜻을 역사 속에 묻어 두고 그 글을 벽에서 내려 
장롱 속에 깊이 넣어 두어야 합니다. 모든 인류가 조화롭게 하나로 어우러지는 길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무릎 꿇고 노예로 사느니 일어나 싸우다 죽겠노라"
  이 섬뜩한 신념을 누가 맨 처음 지어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신념을 버리지 않기로 한
다면 무릎 꿇는 노예가 되던지 일어나 싸우다 죽던지  둘 중의 하나를 경험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집합의식 속의 신념들을 잘 탐색하여 다루게 될 때 무릎 꿇는 노예의 경험
도 싸우다 죽는 경험도 피할 수  있게 됩니다. 이제 호남의 비극은 영원히  그 막을 내려야 
합니다.
  지구상의 여기저기에는 지금 잠재적인  위기상황이 도시라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들은 
인류의 집합의식의 반영입니다.
  위기상황들을 물리적 대응으로만 타개하려는 종래와 같은 사상과 이데올로기는  근본적인 
효과가 없습니다.
  이제 이것은 더 이상 우리가 따라야 할 길이 아닙니다.
  개인과 세계의 문제들은 그것들이 맨 처음 비롯되는  원전인 의식에서 풀어야 한다는 것
을 사람들이 차츰 깨우치고 있습니다.
  개별의식과 집합의식을 탐구하여 신념을 통제하고 조절함으로써 현실을 통제하고  조절해 
갈 수 있는 길들이 여기저기에서 보이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100마리 째의 원숭이 
  혹시 1백 마리 째의 원숭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일본 큐슈에서 조금 
떨어진 코시마라는 섬에  원숭이들이 집단으로 서식하고 있었습니다.  
  1952년부터 일본의 학자들이 이 섬의 원숭이들에게 먹이를 주면서 어떻게  학습해가며 그
들의 의식은 어떻게 진화 되가는가를 관찰했습니다.
  그들이 나눠준 먹이에는 진흙이 묻은 생  고구마가 있었는데 이것을 처음 본  원숭이들은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를 몰라서 궁리만 하다가 드디어 한 원숭이가 물에 씻어 먹는 방법을 
알아냈습니다. 이 원숭이는 자신이 발견한 방법을 다른 원숭이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차츰 
많은 원숭이들이 이 방법을 알게 되었지요. 시간이 지나면서 어떤 원숭이가 그 고구마를 민
물이 아니라 바닷물에 씻어 먹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바닷물에 씻어 먹으니 맛이 더 좋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원숭이들도 차츰 바닷물에  씻어 먹는 법을 배워 갔는데  놀라운 일은 그 
숫자가 1백 마리에 이르자 갑자기 하루만에 섬 전체의 원숭이가 이 방법을 알아버린 것입니
다. 더 신기한 일은 서로 만날 수도  교류할 수도 없는 다른 섬의 원숭이들, 심지어는  내륙 
지방의 원숭이들까지도 일시에 고구마를 바닷물에 씻어 먹기 시작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또 다른 얘기가 있습니다.
  영국에 살고 있는 박새가 우유병의 뚜껑을 주둥이로 쪼아서 우유를 먹는 방법을 알게 되
자 얼마 후 곧 바다 건너 전 유럽에 이것이 전파되어 온통 박새들이 우유병을 쪼아먹는  것
이 발견되었습니다. 
  박새의 행동 반경은 겨우 15km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영국의 박새가 바다 건너 대
륙까지 날아가 그 방법을 가르쳐 준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에 속합니다. 
   자연계에는 이와 유사한 사례들이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무척 많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런 정보들은 어떻게 전달되는 것일까요?  우리는 이런 사례들을 통해서 
의식을 가진 존재들끼리 시공을 초월하여 어떤 통신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의식에 변화가 일어날 때 그것은 곧 하나의 파장이 되어 다른 사람의 의식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생각이 온 우주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말은 그래
서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다만 현재의 생물학의 수준이 이와 같은 생체간의 연결고리를 미
처 증명하지 못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집합의식과 창조에너지
  사람들의 의식이 빠른 속도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과 생명의 본성에 대한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들 중의 어떤 사람들은 분명히 미래의 '생명의 문명'에 대한  밝은 전망을 바라보고 있
습니다. 기존의 낡은 문명의 축을 흔드는 일들이 지구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은 실은 
인류의 진화된  집합의식의 투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신념체계들의 차이를 넘어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다양한 움직임들이 지금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의 생명으로  통합될 수 있는 생명의  문명을 창조하려는 
기본적인 목적이 인류의 집합의식 속에 하나의 싹으로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 모양과 표현은 다르더라도 같은 방향, 곧 생명의 본성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여러 가지 
형태의 움직임이 함께 어우러져 가고 있는 모습이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종교나 철학, 사상, 이념, 제도 이런 한정된 신념체계들의 벽을 뛰어넘어야만 마침내 하나
의 생명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지구 위의 여러 곳에서 영성과 의식을 진화시키는 다양한 방법들이 개발되어 나오고 있습
니다. 이런 것들은 모든 인류의 집합의식을 하나의 생명의식으로 진화시키는 데 나름대로의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어떤 방법을 통하든지 간에 '하나의  생명의식, 곧 생명의 근원'을  깨닫게 되는 사람들이 
늘어나서 그 숫자가 일정한 수준에 이른다면 1백 마리째  원숭이의 경우처럼 우리들의 집합
의식에 폭발적인 진화가 일어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사회 개혁과 대중 구원은 눈에 보이는 물리적 세계의 차원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
다. 그러므로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주먹을 불끈 쥐고 대중 앞에  나가 목소리를 높여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도한 국회의원이  되고 장관이 되고 무슨 감투를  써야만 사회를 위해 
일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사회를 위해 봉사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감투를 쓰려고 애쓰다
가 대개는 허물만 잔뜩 저지르고 맙니다.
  그 사람이 입으로는 별소리를 다 하더라도 바른 지도자인가 아닌가는 이기심을 떠났는가, 
나나 내 가족, 내 정파의 이익을 앞세우는 대서 벗어났는가, 탐욕과 분노가 없는가를 잘  살
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지도자로 자처하고 나선 사람들 중에는 자신도 편안하게 하지 못하고 대중도 편안하게 해 
주지 못한 채 결국 에너지만 낭비해 버리고 마는 경우를 많이 보아 왔습니다. 따라서  만인 
앞에 얼굴을 내미는 지도자가 되려고 지나치게 애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대중을 구원하고 세상을 밝게 하기 위해서 대중들의 등뒤에서 남의 눈에 띄지 않게 큰 역
할을 하고 있는 진짜 지도자들도 많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당신조차도 진실
한 사랑과 관용의 파장을 우주 전체로 내보낼 때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지도자인 것입니
다.
  서산대사와 진묵대사는 당대의 위대한 성인이요 지도자로 추앙 받던 분들입니다.
  서산대사는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켜 눈에 보이게 사회참여를 했지만 진묵대사는  산문
밖에 한 걸음도 안 나왔습니다.
  나라와 백성이 도탄에 빠져 잇는데 이를 외면한 채 아무 것도 하지 않았으니까 얼핏 겉만 
보면 진묵대사는 무책임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이것은 
하나밖에 모르는 짧은 소견입니다.
  우주는 한 덩어리의 생명이므로 누구나  어떤 식으로든지 직간접적으로 사회에  참여하고 
잇습니다. 우리는 대체로 눈에 보이는 겉모습만 가지고 이러니  저러니 시비를 하고 있지만 
세계와 우주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
니다.
  우주와 생명의 근원적인 힘, 그 창조의 에너지를 당신은 지금 눈으로 볼 수 있습니까? 
 사회참여란 생명의 본성에 안주하여 생명의 도리에 맞도록 참여해야만 그것은 올바른 사회 
참여라고 할 수 잇습니다. 이런 입장에 설 때라야 제대로 책임질 수 있습니다.
  자신과 더불어 모든 대중이 생명의 본성에 가까워지도록 하고 결국 생명의 본성에 합일되
는 쪽으로 인도하는 것만이 최상의 사회 참여인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의 많은 정치 지도자들은 자기 나라의 문제, 세계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잇는 
총체적이고도 포괄적인 대안을 찾지 못해 방황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나라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이 험난한 IMF 시대를 경제학자들의 이론만으로 
해결이 가능하다고 보여집니까?
  세간의 학문이나 지식들이  아무리 그 깊이가  심오하다 하더라도 '우주는  하나의 생명'  
이라는 근본도리에서 벗어나 있으면 별로 힘이 되지 못합니다.   상대적인 차원의 지식들은 
대개는 얼마 안 가 쓸모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 동안  애쓴 것들이 모두 헛수고가 되기 
일쑤입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다."라는 표현은 흔히 쓰이고 있지만 적절치 않습니다. 우주의 근본
도리에 정통한 성인이 아닌 이상 만물의 영장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사물을 바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릇된 편견을 지니기 쉽고 그래서 늘 갈팡질팡합니다.
  어떤 학자가 이런 이론을 내놓으면 여기에 경도 되고, 어떤  사회 개혁자가 저런 말을 하
면 거기에 혹하여 이리 휩쓸리고 저리  휩쓸리는 식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또 
이런저런 말을 끌어 모아 자기 식대로 체계를 세워 그것을 가치 기준으로 삼고 그것만이 옳
다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주가 평등 무차별한 하나의 생명이라는 것을 바로 보지 못하는 어떤 이론이나 가치관도 
상대적인 약간의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그것이 참다운 진리는 아닌 것입니다.
  우주에는 범부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차원의 세계가 복합적이고도  중층적으로 
연결되어 하나의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정치를 알 건 모르건, 경제를 알 건 모르건 그런  문제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일념으로 
생명의 근본도리를 추구하는 그 마음이 중요합니다. 그 마음이  바로 세상을 밝혀주는 강력
한 에너지가 됩니다.
  이 세계의 모습은 대중들의 집단신념의 반영입니다.
  한 집단이 함께 겪는 공동현실의 배후에는 대중의식 속의 집단신념이 하나의 에너지 장으
로써 틀림없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지구상의 살인무기를 하루아침에 모조리 폐기한다면 모든 전쟁이 끝이 날까요? 약간은 도
움이 되겠지만 결코 그렇게는 안 될 것입니다.
  싸우겠다는 의도와 신념을 가지는 순간 무기는 곧 바로  개발됩니다. 인류의 집합의식 가
운데 싸우고자 하는 생각과 신념이 소멸되기 전에는 소용없는 일입니다.
  범죄, 마약, 굶주림, 질병 등과  같이 많은 사람이 함께 겪는  고통의 배후에도 그럴 만한 
집단 신념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고통들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물리적인 노력도 잘 해야겠지만 고통을  지어내는 
집합의식을 잘 탐사하고 이를 다루는 일이 꼭 병행되어야 합니다.
  최선의 길은 대중의식의 중심을 '하나의 생명의식'의로 가꾸는  일입니다. 성자와 같은 순
수의식의 존재들이 대량배출 됨으로써 이러한 존재들이 대중의식에 파장을 미쳐 그것을  정
화시키는 것이 가장 강력하고도 근본적인 해결방법입니다.
  그래서 엘리트일수록 대중구원의 서원자일수록 군더더기를 털어 버리고 순수의식의  존재
가 되는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어떤 기업주가 근로자들의 집단적인 저항을 단지 물리적인 수단만으로 무마하려고 한다면  
이것은 원시적인 방법입니다.
  정부가 국민들의 욕구불만을 단지 물리적 조건을 개선시켜 주는 것만으로 해결하려고  한
다면 이것은 비효율적인 대응방법이며 이것만을 통해서는 욕구불만이 결코 해결되지 않습니
다.
  환경파괴나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서 일일이  몸으로 부딪치며 물리적 수단만을  통해서 
해결하고 있다면 이것은 비능률적인 방법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환경오염을 이야기할 때 공기오염, 수질오염, 토양오염 같은 눈에  보이
는 물질세계의 오염만을 문제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실은 분노나 탐욕심 같은 의식세계의 오
염이 온 우주를 오염시키고 있는 근본원인입니다. 
  물질세계의 환경오염은 의식세계의 정신오염의 반영입니다. 따라서 물리적 환경의 정화나 
자연보호도 잘 해야겠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탐욕과 분노와 같은 의식의 오염을 정화시
키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마른논에 물을 담기 위해서는 양동이에 물을 떠서 일일이 옮겨 부을 수 있는가 하면  물
꼬를 돌려놓음으로써 수로의 물이 자연스럽게 논으로 들게 할 수도 있습니다. 무슨 일을 능
률적으로 성공적으로 처리하는 데는 전략과 꾀를 쓸 필요가 있습니다.
  대중이 원치 않는 공동현실을 바꾸어 놓기 위해서는 그러한 공동현실을 지어내고 있는 대
중의식 속의 집단신념을 돌려놓는 것이 가장 훌륭한 전략입니다.
  대중들이 함께 경험하고 있는 고통스런 상황들, 지구상의 여러  가지 위기적 상황들의 배
후에는 불관용, 부조화의 집합의식이 에너지 원천으로서 작용하고 있을  것이므로  이를 정
화하여 관용과 조화의 신념으로 바꾸어 놓는 것이 효율적이고도 근본적인 해결 방법입니다.
  의식이 진화된 사람들은 대중의식과 하나되어 대중의식을 어느 정도 변화시키는 일이  가
능합니다.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을지라도 지금도 그러한 역할을 하는 존재들이 틀림없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특별한 존재들에게만 가능한  것은 아니며 누구나 의식
이 개발된 정도에 따라서 개체의식이나 대중의식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의식의 힘을 현실의 변화에 활용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의견을 탐사하고 개발하는  방법을 
익혀야 합니다. '생명의 근원과 하나되기'가 그 하나의 방법입니다.  이것은  대중의식의 근
원과 만나게 해주고 대중의식을 도울 수 있게 해줍니다.
  아바타 프로그램에는 '우주 다루기'  와 '집합의식 다루기'라는 과정이  있습니다. 각자의 
개인적인 갈등을 해결한 후에 대중들의 집합의식을 돕고자 할 때 이 방법을 활용할 수 있다
는 것입니다.
  누구나 자기가 지닌 신념 중에서 가장 기초적인  신념이 "나는 무엇이다."라는 신념을 덧
붙여 놓은 것이 각 개인들입니다.
  "나는 무엇이다."라는 생각들을 자꾸자꾸 많이 붙여  놓을수록 나는 순수의식으로부터 더 
멀리 갈라지게 되며 뚜렷한 개인들, 즉 수많은 개체의식들이  사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분명하게 체험됩니다. 이 차원에서 볼 때는 분리된  개체의식이란 없는 것이며 개체의
식이란 실은 집합의식의 조각들, 부분들일 뿐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의 의식이 진화되어 이런 차원의 집합의식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그 차
원에서 집합의식을 탐사하고 그것을 바꾸어 놓는 방법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원하지 않는 어떤 일을 경험하게  될 때는 그가 그것을 경험하기 위해서 무엇
을 믿고 있었는가를 찾아내 이를 바꿀 수 가 있듯이 대중이 원하지 않는 어떤 공통적인  현
실을 경험하게 될 때는 그것을 경험하기 위해 대중들은 무엇을 믿고 있었는지 그 집단신념
을 찾아내서 이를 바꿀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내가 비록 방안에 않아 있다 하더라도 생명의 본성과 합치된 사무친 마음을 가지고 있다
면 그 에너지의 파장은 세계와 우주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전쟁, 재난, 굶주림, 질병 같은 물리적인 세계의 고통의 배경에는 탐욕, 분노, 투쟁심 따위
로 오염된 의식세계가 버티고 있습니다.
  자연계에 혼재하고 있는 이런 오염된 상념체들이 정화되지 않는 한 인류는 이런 고통들로
부터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나라와 민족의 차별성을 초월하여 오로지 생명의 근본 진리만을 추구하는 순수한  존재들
이 내보내는 진실한 마음의 파장이 바로 세상을 변혁시키는 중심에너지인 것입니다. 깨끗한 
마음, 대중을 한없이 사랑하는 자비심, 생명의 본성과 하나되는 마음, 이러한 마음들이 강력
한 치유에너지가 되어 흐트러진 이 세상을 바로잡아 줄 수 있습니다.
  서산대사가 옳은가? 진묵대사가 옳은가?
  그 우열을 가릴 바 없이 다 옳습니다.
  다만 후대인 들의 의식수준이 위대한 성인들의 높은 뜻을 짐작하기 어렵고 대중구원의 공
덕의 높이를 헤아릴 수 없을 따름입니다.
    참된 지도자란...
  숲 속의 원숭이들이 호수 가운데 비친 보름달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달은 물에서 건져서 높은 나무에 매달아 두자. 그러면 어두운 밤에도 아무 불편 없이 
다닐 수 있을 거야."
  우두머리 원숭이가 먼저 호수 가운데로 늘어진 나뭇가지를 타고 물 속으로 접근했습니다. 
그러나 호수 속의 달을 건너기에는 너무 거리가 멀었습니다. 다음 원숭이가 그의 꼬리를 잡
고 매달렸습니다. 숲 속에 있던 많은 원숭이들이 꼬리를 이어 줄을 만들었습니다. 마침내 우
두머리 원숭이가 호수 가운데 잇는 달 가까이  다가갔을 때 원숭이 떼들이 무게에 못 이겨   
 
 
그만 나뭇가지가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달을 건지려던 원숭이들은 모두 물에 빠져 떼죽음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원숭이들이 어리석은 것은 사실이지만 실은 이보다 더 어리석은 사
람들이 우리 주위에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특히 스스로를 지도자라고 자처하는  사람 중에 
이런 어리석은 경우가 않습니다.
  장님이 장님들을 인도하다가는 모두 물구덩이에 빠뜨릴 수 있는 것처럼 지혜와 능력은 없
으면서 지도자가 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 때문에 모두가 고통  속에 빠져버릴 수 있습니다. 
이 비유 담은 사리분별도 제대로 못하는 지도자가 자기 분수도 모르고 대중과 세상을 구한
답시고 경거망동하는 것을 경계하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대중을 행복으로 인도하는 지도자가 되겠다고 할 때 우선 그 사람 자신이 먼
저 편안하고 행복해지기에 유능해야 합니다.  지도자가 되고 싶으면 우주와  생명의 도리를 
먼저 알아야 하고 자신을 먼저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지도자의 자격이 있는가 없는가는 자신을 돌아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지금'나'라
는 생각과 이기심에서 벗어났는가, 그리고 내 마음속에서 요망과 저항이 떠났는가를 스스로
에게 물어보면 잘 알 것입니다. 자칫하면 없는 달을 건지려다  물에 빠져 죽는 원숭이가 될 
테니까요.
  '나'라는 생각과 이기심을 못 떠나 보내고서는 그가 아무리 학식이  많고 경륜이 높다 하
더라도 사물의 본질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안목과 지혜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조차
도 사물을 제대로 못보고 거꾸로 보는 주제에 "나를 따를라, 내 말을 들으라" 고 한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몇 년 전 (건강의식) 이라는 미국의 한 월간잡지에 어는  심리학자가 다음과 같은 의견을 
피력한 적이 있습니다. 
  "누군가가 국민의 대표가 되기 위해 공직에 출마하려는 욕망을  가질 경우 , 그러한 욕망
은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충동, 또는 어떤 이기적인 결함을  위장하려는 충동에서 비롯되기 
마련인데 그런 사람은 공직을 수행할 자격이  없는 것으로 판정 받는 사회구조에  도달해야 
한다.
  대학이나 사회 각 분야의 전문기구들로부터 유능한 두뇌들을 데려다가 지도자가 되거나 
나라를 경영할 수 있는 자질을 판정해 주는 시험을 치르게 한다.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원하는 만큼 자주 시험을 치를 수 있으며, 그 점수에 근거하여 대통령이나 국회위원이나 무
슨 대표자가 될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판정한다. 자격권에 드는 사람은 모두 컴퓨터에 입력
시켰다가 무작위로 한 명을 선출한 다음 그가 만일 그 공직에서 일하기를 원하다면 정해진 
액수의 급료를 주고 일하게 만든다..... 정부의 전체 조직을 무작위 선출에 의해 알맞는 자격
자를 선택하여 만들면 모든 정치적 대립투쟁과 술수는 사라질  것이다."  물론 이런 견해가 
다소 황당한 면도 있고 그 실현 가능성에 있어서도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부분이 있지
만 선거제도를 없앨 수 있다는 점에서는  크게 공감이 갔습니다.  우리 나라만 보더라도 선
거를 치르는 과정에서  대중의식이 얼마나 심각하게 오염되는가를 충분히 경험해 오고 있으
니까요.
  선거 때만 되면 한국 최고의 지성이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분들까지 그 대권이라는 것을 
한 번 잡아 보려고 우왕좌왕 허우적거리는 것을 보면 정말 가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치인이건 경제인이건, 교육자이건, 무엇을 하는  사람이든 생명의 본질, 인간성의  근본, 
그리고 지향해야 할 최고의 가치를 모르고서는 무엇하나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일체 존재는 나와 더불어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생명임을 확실히 알고 투철하게 느낄 수 
있을 때 대중을 진정으로 구제하는 마음이 나올 것이고 지도자로서의 지혜와 능력이 저절로 
흘러나올 것입니다.
  남에게 베풀고 사랑을 나누고 사회봉사를 한다는 사람들도 생명의 근본 도리를 모르고 그 
일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결코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 '나' 라고 하는 찌꺼기가 거기에 남
아 있는 한 그것은 사이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인류의 역사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지도자들이  나타났다 사라져 갔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대중의 구원과 사회 개혁을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전쟁이나 사회적 죄악
이나 도덕적 타락은 결코 줄어들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예전보다 사회는 더 혼탁해졌습
니다. 지금이야말로 관점의 대전환이 요구되는 때입니다. 
  플라톤은 철인이 정치가가 되어야 하고 정치인은  반드시 철인이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철인이란 철학을 전공하는 철학자라는 뜻이 아닙니다.'우주가 바로 하나의 생명'이라
는 근본 도리를 바로 알고 깨달은 성인을 말합니다.
    행복한 삶, 밝은 세상
  우리는 길거리에서 대기오염의 정도를 측정한 표지판을 흔히 볼  수 있는데, 의식의 오염
을 측정할 수 있는 계기를 개발하여 활용할 수 있다면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자연계의  의
식의 오염정도는 어느 수준일까요?
  만일 세계의 공간 속의 관용과 자비심의 양을 측정하는 저울과 대립과 투쟁심의 양을 측
정하는 저울이 따로 있다면 어느 쪽 저울의 바늘이 더 높이 올라가 있을까요?  인류 각자가 
날마다 먹는 마음은 조금도 에누리없이 이러한 두 개의 바늘 중 어느 쪽인가를 조금씩 높여
주는 쪽으로 작용하고  있겠지요. 지금 대부분의 인간들은  관용과 자비심의 양을 높여주는 
쪽보다는 대립과 투쟁심의 양을 높여주는 쪽으로 보탬이 되는 삶을 살고 있다고 볼 수 있습
니다.
  지난 1백년 동안의 산업문명의 발전은 20세기 이전의 일류문명 발전의 총화보다도 더 크
다고들 말합니다. 산업문명이 가져다준 보상은 물질적 풍요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가져다 준 
폐해는 생명에 대한 훼손과 인간성의 상실입니다.
  현대적인 기술개발은 돈벌이와 지나친 소비를 강요하여 왔고 증권과 은행으로 발전했습니
다. 세상은 가진 자와 가지고 싶어하는 자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무분별한 환경파괴, 핵무기를 비롯한  살인무기의 개발, 끊임없는  전쟁과 집단간의 충돌, 
도대체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란 사람수의 많고 적음을 떠나서 가정이나 직장이나  사회단체
나 어느 곳이나 원만한 화합과 조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갈등보다 더 깊은 갈등이 있습니다. 마음의 갈등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과의 끊임없
는 투쟁 가운데서 살고 있습니다.
  그가 무엇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가 없는가와 관계없이 참으로 행복하고 편안한 사람은 거
의 없습니다. " 삶이란 도대체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 것인가?"와  같은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인류는 그 동안 인간성의 존중, 경제적 풍요와 평등,  민주주의와 평화의 실현, 도덕성 회
복과 같은 위대하고도 화려한 이념과 사상을 가슴에 안고 의지와 힘을 합쳐 불의를 무너뜨
리고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일을 계속해 왔습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사회가 제대로 건
설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누구든지 개인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위대한 이념과  사상을 끼고 다니면서 불의와  악을 
비난할 수 있으며 자신이 대중과 세상을 구한다고 믿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일은 인류 역
사 가운데 흔히 있어 왔습니다.
  누구나 인류를 구제한 수 있는 이념이나 사상이나 그럴 듯한 신념체계를 만들어낼 수 있
으며 그것을 실행에 옮길 수도 있습니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은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
다. 그러나 반만년 동안 인류가 거듭해 온 실패는 종래와 같은 이념과 사상, 종래와 같은 실
행방법으로는 어떠한 효과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밝은 세상으로 가는 길을 가로막는 큰 장애는 사상, 이념, 제도, 종교 등의 차이에서 오는 
대립과 반목, 개인간, 집단간 이해관계의 첨예한 대립입니다. 
  이러한 대립과 반목의 배경은 신념의 차이, 관점의 차이입니다. 내 관점과 내 신념만이 옳
다고 고집하는 불관용입니다. 하나의 사물을 바라보는 데는 서로 다른 관점이 있을 수 있고 
따라서 서로 다른 신념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밝은 세상으로 가
게 하는 출발점입니다.
  세속적인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 때문에 서로 반목하고  대립하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
도 세상을 밝게 해주는 등불의 역할을 한다는 종교들까지도 자기종교만 옳고 ,같은 종교 내
에서도 내 교파만 옳고, 같은 교파 내에서도 내 방식만  옳다고 주장하며 다른 종교나 교파
를 비방하는 모습들을 우리는 흔히 봅니다.
  정파간의 대립과 충돌이 불행을 안겨주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종교간, 교파간의 편견이 
부른 갈등과 대립반목이 역사적으로 많은 불행을 초래했습니다.
  종교까지도 편견과 아집에 사로잡혀 대립하고 반목할 바에는 그런 종교는 차라리 없는 것
만도 못할 것입니다.
  어떤 종교인이 자기 종교만 옳다고, 자기 교파만 옳다고 주장하고 있다면 그것은 지금 자
기가 믿고 있는 종교의 가르침의 본질을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폭로하고 있는 꼴입
니다.
  '하느님은 계란 전부를 하나의 바구니에 넣지 않는다.'라는 서양 속담이 있습니다. 이 말
은 어떤 절대적 진리가 특정 종교나 철학  같은 어느 하나의 신념체계에만 들어 있고 다른 
신념체계에는 진리가 없다는 식의 편견을 경계하는 가르침입니다.
  우주와 생명의 근본자리, 진리의 본체는  완벽한 신성이며 거기에는 '나'라는  생각도, 내 
편도 네 편도 없으며 어떠한 판단이나 선악시비도 없습니다.
  하나님과 부처와 알라신이 하늘 어디에  따로따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명 호들은 우주와 생명의 하나의 근원, 하나의  진리에 대한 서로 다른 대명사일 뿐입니다.
  산중턱까지밖에 못 간 사람들이 보는 견해는 십인십색이나 산 정상에 올라간 사람들이 보
는 견해는 십인일색입니다. 진리와 신성을 체험하고 있는 수준도 이와 꼭 같을 것입니다.
  종교간, 교파간의 표현의 차이, 겉모습의 차이에서 오는 편견과 아집을 뛰어넘어 하나의 
진리로 통합하는 길이 그리고 사상, 이념, 제도의 차이에서 오는 갈등과 반목을 뛰어 넘고 
개인간, 집단간의 이해관계의 대립을 해소하여 하나의 생명으로 회복하는 길이 밝은 세상으
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나의 문제, 세상의 문제들은 그것들이 맨 처음 시작되는 원점 곧 사람의 의식으로부터 풀
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차츰 늘어나고 있습니다.
  정치, 경제, 법률, 제도, 교육, 의료와 같은 현실적인 대안들은 흙탕물의 하류에 빠져 전전
긍긍하고 있는 꼴입니다. 흙탕물의 원류인 상류를 정화하지 않는 한 하류는 결코 정화되지 
않습니다. 원류와 상류가 곧 의식입니다.
  이제 사람들은 자신들이 느끼고 있는 불안과 불행,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들이 결코 밖에
서 해결할 수 없음을, 그리고 '물질의 풍요를 통한 몸의 행복'이라는 환상적인 경험이  참된 
만족을 가져다주지 못하며 결국은 망한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깨닫고 새로 깨어나는 사람들의 수가  충분한 수로 늘어날 때  '행복한 삶'에  대
해 그 동안 지녀왔던 꿈들이 다름 아닌 생존에 따른  공포와 불안감이 지어낸 환상이었다는 
것을 바로 알게 될 것입니다.
  깨어남이란 내가 지금 움켜쥐고 있는 생존방법 말고도 다른 선택의 가능성들이 또 있다는 
것을 통찰하기입니다.
  밝은 세상이란 '모든 존재의 하나의 생명'이라는 '생명의 문명'이 가치의 중심이 되는 세
상입니다.
  남과 세상을 고치려 들기 전에 먼저 나의 의식이  '모든 존재는 하나의 생명'이라는  '생
명의 문명'이 가치의 중심이 되는 세상입니다.
  남과 세상을 고치려 들기 전에 먼저 나의 의식이 '모든 존재는  하나의 생명' 임을  자각
하는 일이 밝은 세상으로 가는 첫걸음입니다.
  이기적이고 경쟁적인 산업문명은 가속도를 제어하지 못한 채 마지막 한계선을 향해서  달
려가고 있습니다. 기존문명이 퇴조하고 잇는 조짐이 여기저기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자연계와 현상세계의 어떠한 것도 변하지 않는 것은 없으며 모든 사물은 한 순간도 머무
름 없이 변화해 마지않습니다.
  이제 어떤 사람들은 돈과 물질세계에 대한 환상으로부터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하고  있으
며 자신의 삶에서 참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성찰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
려 깊게 숙고하며 관조하고 있습니다.
  삶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을 통해서 그들은 생명의 근원에 더욱 가까이 다가서게 될 것이
고 그렇게 될 때 불안과  두려움이 차츰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밖에서 행복을 쟁취하고자 
하는 욕구가 줄어들게 되고 경쟁을 통해 승리를 차지하려는 욕망이 줄어들게 됩니다. 인정
받을 필요도 무엇을 부러워 할 필요도 없게 됩니다. 세상을 오직 관용과 자비심으로만 보게 
됩니다.
  행복한 삶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모두 하나의 생명이다'라는 생명의 본성을 온전히 느끼고 체험하는 삶입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생명은 하나'라는 새로운 문명의 패러다임이 기초가 되는 사회입니다. 이것뿐입니다.
  따라서 행복한 삶과 밝은 세상으로 갈 수 있는 길은 좋든 싫든 단 하나의 외길. '나'를 떠
나 하나의 생명감으로 통합하는 것뿐입니다. 곧 '생명의  근원과 하나되기'를 체험적으로 성
취하는 것 말고는 어떠한 다른 길도 없습니다.
    내가 밝아지면 세상도 밝아져
 세상을 밝게 하려면 우선 내가 밝아져야 합니다. 내가  밝아진다 함은 모든 존재가 하나의 
생명으로 투철하게 자각됨을 말하는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삶 속에서 완벽하게  정직해지
는 것, 분리와 한정짓기를 그만두는 것, 모든 판단과 분별시기를 그만두는 것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첫째로 정직해지기입니다.
  정직이라는 주제만큼 삶 속에서 자주 거론되는 주제도 드물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나 대중 앞에서 자기의 정직함을 주장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입니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고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지도 않은 채 습관적으로 자신의 정직함
을 강변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자신의 부정직을 가리고 정당화하기 위한 속임수로서 끊임없이 정직히 주장되기도 하지만 
이러한 부정직에서는 충분한 이유-삶에서의 혹독한 시련과 좌절의 경험-가 있다는 것을 알
게 될 때 우리는 그러한 부정직을 참으로 동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정직이란 살아남기의 두려움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끈적끈적한 접착제  같은 것입니다. 
생존에 대한 두려움이 큰 만큼 부정직은 커지며, 부정직이 큰 만큼 자존심은 완강해지고 공
격성은 포악해집니다. 그러니 정직이야말로 참으로 용기의 문제입니다. 자신의 내면에  깊숙
이 박혀 있는 그 두려움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는 용기 말입니다.
  "그대는 그대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을 정면으로 대할 수 있는 용기가 있는가?" 이것은 삶 
가운데서 가장 가혹한 질문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자신의 부정직한 행위를 똑바로  쳐다보면
서 "내가 부정직하게 된 것은 두렵고 무서워서 그랬다."라고 자백해버린다면 얼마나 홀가분
하고 마음이 편해지겠습니까?
  자신이 살아오는 동안 애써 감추어 놓고 자기 혼자만이 알고 있는 공포와 불안은 얼마만
큼이나 될까요?
  자기가 감추고 잇는 두려움을 찾아내는 것이 정직한 세상을  만드는 기초가 됩니다. 용기
를 가지고 자신의 부정직 뒤에 숨어있는 공포의 신념은 찾아내기만 하면 됩니다.
  이러한 용기가 회복될 때는 더 이상 자신의 정직함을 주장할 필요도 없게 됩니다.
  부정직은 보통 '무엇인 척하기'와  '무엇이 아닌 척하기'로 표현됩니다.  날마다 밥먹듯이 
하고 있는 이 습관적인 척하기는 내면의  공포와 숨겨놓은 의도를 위장하기 위한  목적에서 
나온 것입니다.
  자신은 날마다 척하기와 아닌 척하기에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쓰고 있는가? 척하기의 중
독은 마치 스폰지가 물을 빨아 버리듯 자신의 생명에너지를 온통 고갈시켜 버립니다. 그 결
과는 스트레스와 분노와 심신의 질병입니다.
  세상의 부정직을 자기 탓으로 돌려서 자신의 내면을 바로 보지 않는 한 세상의 부정직은 
끝끝내 거기에 있을 것입니다.
  "소인은 모든 일을 남의 탓으로 돌리고, 군자는 모든 일을 자기   탓으로 돌린다."라는 공
자의 말씀은 참으로 맞는 말씀입니다. 이  간단한 말속에 세상을 밝게 하는 이치가 모두 들
어 있습니다.
  세상의 부정직을 고치기 위해서 그것을 폭로하거나 처벌하는 따위의 우격다짐으로 다스리
는 것은 매우 원시적이고 유치한 방법입니다. 그와 같은 방법을 써서 부정직을 사라지게 한
일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최선의 방법은 세상의 부정직을 관용과 이해로 바라보면서 각자가 자신의 정직함을  회복
하고 정직한 모습의 본보기를 세상에 보여주는 것입니다. 척하기에  빠져 있는 사람들의 냉
소와 핀잔에 대해 어떤 반응도 하지 말고 말입니다.
  각자가 더욱 정직해질수록 대중의 집합의식도 더 정직해지기 시작할 것이고 이것이  밝은 
세상의 밑거름이 됩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행동,  말, 생각이 대중의 집합의식을 정직한 
쪽으로 가게하고 있는가? 이것이 늘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
  둘째로 내가 밝아지기 위해서는 분리와 한정짓기를 그만 두어야 합니다.
  내가 자신을 세계와 분리시켜 편협한 에고의 틀 속에 스스로를 가두어 놓고 있습니다. 한
정된 틀에 갇혀 있으므로 자연히 외롭고 두려운 마음이 생깁니다.
  큰사랑과 동정심으로 세상 속의 나를 바라보면서 한정된 나를 풀어내야 합니다. 구속에서 
풀리지 않을 때 나는 '척하기'의 중독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며, 따라서 "나는 무엇이다"라고 
스스로를 정의하고 한정짓는 일을 계속하고 있어야 합니다.
  분리와 한정짓기의 완벽한 소멸이 나로 하여금  무한한 힘을 부려쓰게 하고 행복한  삶과 
밝은 세계를 창조하는 강력한 리더쉽을 부여받게 해줍니다.
  셋째로 내가 밝아지기 위해서는 이기심으로부터 일어난 욕망을 줄여야 합니다. 분리된  
'나'가 자기 이익을 계산할 때 자연히 욕망이 일어납니다.
  세속적인 행복에 나의 이기심과 욕망의 주의가 묶이게  되면 근원적인 지복으로 가는 기
회를 놓치게 됩니다. 돌멩이나 석붙이에 눈이 팔려  황금이나 다이아몬드 같은 최고의 
보석을 구하지 못하는 어리석음과 같습니다.
  지복이란 세속의 행복과는 비교할 수 없는 최상의 행복이며 완벽한 충족성과 영원한 지속
성이 보장된 무한한 행복입니다. 이기심과 욕망이 지복으로 가는  길을 가로막는 근본 장애
입니다. 이기심과 욕망에 갇혀 있게 되면 직관의 문이 닫혀 버립니다.
  직관이란 행복한 삶과 밝은 세상으로 들어서게 하는 지혜의 관문입니다.
 이기심과 욕망이 줄어들 때 비로소 직관의 통찰력이 회복되고 밝은 지혜가 열리기 시작합
니다.
  넷째로 내가 밝아지기 위해서는 모든 판단과 분별시기를 그만두어야 합니다.
  무엇이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 곱다 밉다와 같은 일상적인 판단과 시비는 생명의 근본
에서 볼 때 모두 빗나간 것입니다.
  인류의 장구한 역사 가운데 사람들이 내린 현실적인 판단들이 생명의 본성과 우주의 도리
에 맞는 것이란 거의 없었습니다.
  판단과 분별시비에 젖어 있는 동안 나는 생명의 본성에서  멀어지게 되며, 그만두고 있는 
만큼 나는 생명의 본성에 가까워지게 됩니다.
  어떤 대상이 나쁘고 악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내가 함께 관여하여 공동창조한 결과이며, 
사실은 나의 현실에 비치는 모든 일들은 전적으로 내  책임입니다. 내가 판단과 분별시비에
서 벗어난 만큼 분리감이 줄어들고 하나의 생명감이 회복되어 생명의 밝은 본성에 가까워지
게 됩니다.
    밝은 세상을 위한 삶의 모델
  어떤 사람이라도 세계를 보는 관점에 있어서 자기의 관점만이  옳다고 믿을 수 있습니다. 
어떠한 관점이나 신념도 더욱 위대하고 정의롭게 보이도록 꾸며대고 세련시킬 수 있습니다. 
지난 5천년 동안의 인류의 역사 가운데는 화려하고도 정의로운 신념들로 꽉 차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정의의 신념들은 위대한 문명과 위대한 세계의 건설이라는 슬로건 아래 집
단간의 피흘린 투쟁의 무기가 되어 결국은 어느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무감각한 동물적 행
위를 정당화시키는데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바로 그 정의로운 신념의 깃발 아래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갔습니다. 이것
은 이제 더 이상 인류가 되풀이해야 할 일이 아닙니다.
  세상에 대한 개인적인 책임감을 회복하는 것 말고는 말입니다.  분명히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은 우리들 각자는 어떠한 인종주의도 민족주의도  어떠한 한정된 이데올로기도 아닙니다. 
각자는 어떤 물리적 존재도 어떤 아이덴티티도  무엇이라고 표현될 수 있는 존재도  아닙니
다. 각자는 이러한 모든 것을 지어내는 영원한 배경이자 창조의 근원입니다. 그러니 모든 존
재는 하나의 생명입니다.
  아무리 상대가 나쁘고 악하다고 생각되더라도 그를 증오하고 공격하자마자 상대에게 피해
를 주기 전에 곧바로 자신의 가슴을 상하게  하며 자기의 마음 가운데 고통의 씨앗을 심어 
놓게 됩니다.
  이런 식의 대립과 투쟁의 방식을 통해서 사회 개혁을 할 때는 피차간에 이익됨이 없습니
다. 설사 이런 방식을 써서 개혁이 조금된다 하더라도 그 결과는 별 것도 아닙니다.
  사회개혁을 위한 피비린내 나는 과거의 역사를  살펴볼 때 진실로 어떤 이익이  있었으며 
과연 남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어떤 대상이든 겉모습이 악독하게 보이더라도 그  본질을 바로 보면 나와 조금도  차이가 
없는 귀한 생명입니다.
  누구나 따뜻하고 부드럽게 대해주면 좋아하고 강압적으로 꺽으려고 하면 기필코 반발합니
다. 피차간에 충돌하다 보면 결국 사회를 정화하고 개선하는  쪽으로 쓰여질 에너지가 맞서 
싸우는 쪽으로 낭비되고 맙니다.
  남는 것은 대중의식 가운데 증오와 투쟁심의 양만 증대시켜 놓은 꼴이 되며 그렇게 될 때 
그러한 어두운 대중의식이 새로운 불씨가 되어 사회는 모양만 바꾸어질 뿐 두고두고 반목대
립과 싸움만 계속됩니다.
  아무리 악독한 상대라고 할지라도 상대를 바로 움직이려면 좋은 말과 부드러운  표정으로 
대하고 지극정성으로 자비심을 보일 때 바른 쪽으로 움직여집니다. 조금 더디고 힘들더라도 
이렇게 해야만 어려운 고비를 풀어갈 수 있습니다.
  인류 역사상 대립과 피흘린 투쟁을 통해 얻은 결과는 어느 땐가는 반드시 불행으로 연결
되고 말았습니다. 강도나 독재자나 어떤  악독한 대상이든지 당신은 원래  신성의 근원이요 
위대한 성자이니까 당신을 존경한다고 합장하면서 공경하는 방법, 이것이 우습게 보일지 모
르나 제일 확실하고도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우선 나부터 생명의 본성대로 말하고 행동하고 살면서 다른 사람도 그와 같이 살도록 권
유하는 것, 그렇게 하여 집합의식을  정화시키는 일, 이것이 최선의 길입니다.  아무리 성과
가 없고 힘들더라도  그 실행이 힘들더라도 이것 말고는 다른 묘안이 없으며 이것만이 나와 
전체를 영원한 행복으로 이끌어 주는 길입니다.
  가난이나 병고와 같은 고통들의 배후에는 우리 눈에 안 보이는 수많은 복합적인 원인들이 
다차원적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지금 어떤 사람이 가난하게 되었다면 우선 사회적 모순이
나 제도적 불평등이 가난하게 된 한편의 이유가 되겠지요.  그러나 가난한 사람에게는 자신
의 심층의식 속에 심어 놓은 고통의 신념, 곧 가난을 경험할  만한 어떤 원인 인자가 꼭 있
을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을 만나더라도 배신하는 사람만 만나게 되고, 무슨 일을 하더라도 
꼭 손해나는 일만 가려서 하게 되고, 늘 여기저기서 뜻밖의 재난을 당하기 일쑤입니다.
  이런 책임이 사회나 정부나 부자한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루아침에 모두를 똑같이 평등하게 만들어 놓는다 해도 절대로 그대로 유지되지  않으며 
만인이 다같이 행복을 느끼지는 못합니다. 사회보장제도가 잘 된  나라 사람들은 고통이 없
고 다 행복한가 하면 결코 그렇지가 않습니다. 알코올 중독, 마약 중독, 자살과 같은 불행한 
일들이 복지제도가 취약한 나라보다 월등하게 많아서 아무리 제도적으로 잘 하려고 해도 일
률적으로 행복하게 만들 길이 없습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전체 국민의 모든 삶을 사회가 보장한다는 스위스에서도 몇 년 전 고
등학생 수십 명이 집단 자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유는 삶에 대한 희망이 없다는 것이었
습니다.
  사람들이 겪고 잇는 가난이나 여러 가지 고통의 원인은 매우 복잡하고 다차원적이어서 아
무리 뛰어난 학자나 정치가라도 이를 제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사실은 우리가 바로 본다면 지금 가난하고 괴로운 것이 꼭 나쁜 것만도 불행한 것만도 아
닙니다. 오늘의 고통이 미래의 행복의 시가 될 수도 잇습니다. 마이너스 요인을 꼭 부정적으
로만 해석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인생은 의식을 진화시키고 영적으로 성숙하게 하여 생명의 본체를 바로 알게 하는 학교라
고 할 때 이런 고통들이 오히려 복스러운 공부거리가  됩니다. 그래서 인간만사는 새옹지마
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부자가 되는 것이 꼭 좋기만 할까요?
  옛 가르침에 부자나 왕은 3생 원수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자나 왕은 교만한 마음이 생기기 쉽고 남도 무시하고 더러는 남의 생명을 해치기도 합
니다. 왕이나 부자 자식들은 자칫하면 방종하고  그릇된 길로 가기 쉽습니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도 이런 사례를 많이 보고 있지 않습니까?
  인생의 참 목표는 생명의 본성을 자각하여 우주의 도리대로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부자나 왕이 되면 대개는 이런 길에서 멀어지게 되고 그 자식들은 더욱 멀어지게 되고 맙니
다. 이렇게 살다가 죽는 날에는 인간세상의 고통으로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지옥과 같은 고
통을 받기가 쉽습니다.
  과거생에 어지간히 선업을 쌓고 좋은 일을 했던 결과로 이번 생에 부자가 되고 왕이 되었
는데, 이번 생에 우쭐대고 참된 길로 못가다 보면 다음 생에는 큰 고통의 나락에 떨어질 것
이므로 3생 원수라는 얘기입니다.
  마땅히 정부나 경제인들은 민주적이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기업주들도 근로
자들을 경영에 참여시키고 이익을 고루 나누어 불만의 소지가  없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 그렇게는 안되고 있다고 해서 불만을 품고 지나치게 대립하고 투쟁하는 것은 삼
가야 합니다. 자금 어떤 사람이 부자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오래 가지 못합니다.
 요즘 명예퇴직자나 실직자들이 많아지고 있어서 퍽 안타까운 일입니다만 그렇더라도  너무 
비관할 필요는 없습니다.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사람이 사는 돈이나  직업이나 
직장이 없으면 당장은 괴롭겠지만 눈을 크게 뜨고 보면 그런 것들이 삶에서 별것도 아닙니
다.
  못 먹고 못 입고 조금 못 살아도 내 생명에는 별 손해가 없는 것입니다. 근본행복을 추구
하다 보면 이런 정도는 저절로 다 보상이 됩니다. 인생의 전 과정을  놓고 볼 때 마땅히 추
구해야 할 목표는 생명의 근본 진리와 만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만나야만 언젠가는 사라질 이 허망한 육신이 허물어진다 해도 죽지 않는 길을 얻
을 수 있습니다. 사실은 이것이 찾는 것과 같이 급하고도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어느 누가 일류학교에 가고 못 가고, 더러는 상급 학교에  진학을 못 한다해도 걱정할 것
이 없습니다. 그런 것은 삶에서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실은 학교공부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내 인생의 근본문제를 해결하는 공부인 생명의 진리
를 잘 알아서 그 본성을 자각하기만 하면 그만인 것입니다. 이 길은 차원이 높아서 또는 눈
에 보이지 않는 신비스런 목표여서 가정이 화목하고 행복하게 되는 길, 사회가 안정되고 민
족이 화해하는 길, 인류복지와 세계평화를 얻는 길과는 상관없지  않은 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사실은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나 민족의 화합을 위해서나 세계평화를 위해서나 이 길
만이 가장 확실하고도 효과적인 결과를 보장해 줍니다..
  부자한테나 폭군한테나 가난한 사람한테나 투쟁가한테나 누구한테나 너와 나는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생명이며 우주가 바로 평등무차별한 하나의 생명이라는 것을 바로 알고 자각하
게 하는 것만이 문제를 정확하게 풀어주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제대로 따르려면  '나'라는 생각이 끊어져야 비로
소 이웃도 내 몸 같이 사랑 할 수 잇고 진심으로 위할 수 있는 마음이 우러나올 것입니다.
  생명운동, 환경운동, 자연보호운동, 한마음 운동, 민족동질성 회복 운동 같은 사회 운동을 
하더라도 이기적인 '나'를 떠나 생명의 본성을 바로 알고 할 때 제대로 될 수 잇습니다.
  우리가 보통 생명을 이야기 할 때는 눈에 보이는 현상계의 생명만을 염두에 두기 쉬우나, 
따로따로 분리되어 보이는 현상계의 생명들이란 하나의 생명의 근원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에
너지의 서로 다른 표현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대개 서양의 이원론적 사고방식에 젖어 있어서 신과 나, 객관과  주관, 
너와 나, 선과 악, 흑 과 백, 좌뇌와 우뇌 따위로 모두를  둘로  나누어 보는 경향이 있습니
다. 따라서 하나가 좋게 보면 다른 하나를 나쁘게 보기가 쉬워서 조화를 이루거나 통합되기
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현상만을 집착한  나머지 모든 대상을 물질로만 이해하
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니 물질이 많으면 좋고 적으면 나쁘고, 어떻게든 물질을 많이 생산해서 많이 쓰는 것이 
좋다는 생각에 젖어 있어서 물질만을 행복의 척도로 보는  경향이 팽배해 있습니다. 따라서 
남이 물질을 많이 가지고 있고 내가 적게 가지고 있으면 질투심을 느끼고 똑같이 가지고 싶
어합니다. 사실을 물질을 조금 많이  가지나 적게 가지나 별 문제도  아닌 것인데 물질에만 
눈이 어두워 있다 보니까 서로 더 가지려고 싸우고 심지어는 죽이기까지도 합니다. 
  물론 정치나 경제를 경영하는 지도자들은 재화의 효율적인 생산과 균등한 분배를 위해 최
선을 다해야겠지만 그러나 우리의 삶에서 이런  것에만 집착하게 되면 참으로 중요한  것을 
놓치고 맙니다.  
  물질보다도 내 생명의 본성을 바로 알고 여기에 접근하는 것이 몇백 배 몇천 배나 더  귀
중하고 가치가 있는 것인데 말입니다. 
  인생의 행복은 물질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습니다. 생명의 본성대로 살고자 할 때는 사실 
이런 것이 큰 문제 거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유치원부터 대학가지 보고 배운 것이 물질에  대한 집착을 가지도록, 경쟁
심을 가지도록, 더 많이 지배하도록 하는 따위의 생명의 도리에 어긋난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 동안 좋다 나쁘다식으로 끊임없이 분별시비하도록 세뇌되었습니다.
  가정이나 학교에서나 사회에서 보고 배운  것들이란 대개가 나를 행복하게  해주기보다는 
고통의 짐만 잔뜩 짊어지게 만들어 놓은 것들뿐입니다.  잠재의식 속에 깊게 주입되어진 이
러한 고통의씨앗을 지우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지금까지의 우리의 교육이라는 것이 이처럼  행복으로 가는 교육이라기 보다는  고통으로 
가는 교육이었다고 할 수 잇습니다. 잠재의식 속에 심어져 있는 고통의 씨앗을 소멸하기 위
해서는 이원론적인 분별시비, 물질지상주의와 같은 집합의식을 근본적으로 허물어버려야 합
니다.
  그렇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나는 영원히 죽지 않는 완전무결한 생명이다."라는 깨달음과 
함께 "나는 바로 이 세계의 근원이며 따라서 이  세계에 대한 모든 책임이 나에게 있다."는 
자각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자각 자체가 모든 인류의 하나의 큰 선물이 될 것이고 이
러한 집합적인 자각의 에너지가 강력해질 때 미래의 선진적인 문명의 중심이 바로 서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집합적인 자각이 세상 가운데서 하나의 생명감을 증폭시킬  것이고, 그렇게 될 때 
비로소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사람을 내 몸처럼 돌보고 싶은  진심이 우러나오게 되며, 환경
보호나 세계평화를 위해서도 한 마음으로 참여하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끼리의 차이란 다만 가지고 있는 신념의 차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고 종교나 철학, 
사상과 이념 같은 신념체계들의 장벽을 초월하여  하나의 생명감으로 조화를 이루게 될  때 
그러한 조화가 생명의 문명과 밝은 세상을 창조하는 반석이 됩니다.
  자신이 생명의 근원임을 자각하고 생명의 본서에 맞게 살아가는 진화된 존재들이 그러한 
조화의 정점에 서서 집합의식이 함께 진화하도록 중심적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조화를 향해 나아가는 삶, 곧 생명의 문명과 밝은 세상을 지향해 가는 진화된 
존재들의 삶의 모델은 이러한 것이 아닐까요?
  1. 나는 이기심과 경쟁심을 갖지  않으며 따라서 남과의 경쟁에서  내가 이긴다는 목표를  
갖지 않는다.
  2. 나는 욕망을 줄임으로써 작고 소박한 것에 만족하며 어느 것도 부러워하지 않는다.
  3, 나는 세상의 부정직과 타인의  악을 분노로써 대하지 않고  오직 관용과 자비심으로만  
바라본다.
  4. 나는 이기적이고 경쟁적인 문명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으며 오직  나의 뜻대로 그리고  
의도적으로만 행위한다.
  5. 나는 모든 사람, 모든 사물을 나 자신의 일부로 간주하며 모든 존재를 나와 더불어  평  
   등하게 대한다.
    행복의 조건
  몇 해 전 어느 의과대학 정신과에서 한국의 중년층 주부들을 대상으로 행복도에 대한 설
문조사를 한 일이 있습니다.
  본인 스스로 느끼고 있는 행복감이 어느 정도인가를 조사한  것인데, 재미있는 결과는 학
력이 높을수록, 재산이 많을수록, 남편의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상대적으로 행복도가 낮았
다는 것입니다.
  행복이란 밖에서 성취될 수가 없습니다. 행복이란 본래 성취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설사 행복이 밖으로부터 성취되었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반드시 불만족이 따르게 되고  나아
가서 그것은 곧 불행으로 이어집니다.
  어떤 학문분야든지 인간의 행복을 추구하고 있지 않은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들 중 어느 것도 인간의 행복과 안락을 확실하게 보장해  주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란 것들이 내 생명의 근원에서 참으로 지향하고 있는 행복의 본질을 바로 
통찰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재산, 지위, 명예, 이성 따위의 추구를 통해서 행복을 얻으려 하나 그런 정
도를 가지고는 만족스런 행복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그 사람의 마음의 맨 밑바
닥은 언제나 완전무결한 행복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재산, 지위 따위로는 절대로 완전한  행복을 없기 때문에 결국은 또  다른 것을 추구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지구 땅덩어리를 통째로 다 가지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런 정도의 상
대적이고 제한된 범위를 가지고는 만족이 안 됩니다. 완벽한  행복이 되려면 충족도가 완전
무결해야 되고 지속성이 시간적으로 영원해야 합니다.
  원래 내 생명은 무한하여 한정되어 있지 않고 완벽하여 부족한 점이 없으므로 완전한 행
복을 추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완전한 행복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는 한 항상 불안과 불만족
이 뒤따르게 됩니다.
  "이것만 이루어지면 꼭 행복해질 것이다"라고  기대했던 목표가 이루어 진  다음에 "이제 
이것으로 만족하고 더 바랄 것이 없다"라고 생각되었습니까?
  행복하기 위해서 무엇을 한정 지으면(예컨대 이것이 이루어지면  행복할 것이다) 곧 행복
에서 빗나가고 맙니다. 왜 한정지어 가지고는 행복이 안 되는가  하면 내 생명의 본성은 한
정지어지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는 본디 한정 없음입니다.
  한정을 놓아 버리는, 한정을  지워버리는 순간 행복해집니다. 그러므로 한사코 한정 없는 
상태로 가야 합니다.
  한정 없는 상태란 무엇인가?
  생명의 근원인 순수의식의 상태입니다. 이것이 바로 가장 소중한 행복의 덩어리이자 영원
히 변치 않는 행복의 고향입니다. 누구라도 그의 내면에는  생명의 고향인 순수의식으로 돌
아가고자 하는 향수가 짙게 깔려  있습니다.
  당장 잘 먹고 잘 입고 아름다운 이성과 사귀며 즐기는 것이 잘 사는 것 같지만 이런 것을 
통해서는 끝끝내 만족이 되지 않습니다. 내 생명의 근원인  순수의식에 온전히 안주하기 전
에는 항상 불안하고 불만족스럽습니다. 순수의식이란 다만 어떤 논리가 아니며 무한한 가능
성이란 충만한 생명 그 자체입니다. 
  일상적인 세간살이란 이쪽으로 가는 데 필요한 수단이자 방편이어야 하며 물질적인  삶이 
행복의 목표가 되어서는 끝끝내 행복에는 도달하지 못합니다. 
  행복은 마음 박에서 성취되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자신의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사실은 나 자신이 더 없이 행복의 근원이자 행복 그  자체입니다. 따라서 나는 항상 행복
의 파장에 자신을 맞추어 행복의 느낌 속에 잠겨 잇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이 확실하게 될 
때는 외부적인 풍요나 행복의 모습은 저절로 여기에 모여들게 되고 자신에게 따라다니던 고
통도 내가 행복의 파장 가운데 있기만 한다면 행복의 에너지로 리사이클링(재활용)됩니다.
 따라서 행복하고 풍요로워지기를 바란다면 무턱대고 밖으로부터 행복과 풍요를 쟁취하려들
기 전에 자신의 마음 가운데 행복과 풍요를 받아들여 담을 수 있는 그릇, 즉 행복의 수용체
를 먼저 만들어야 합니다.
  이 수용체를 만들어 놓지 않은 상태에서는 행복과 풍요가 들어오더라도 그냥 흘러가 버립
니다. 이 수용체를 만드는 일이 자신을 무한한 행복과 지고한 사랑의 느낌 가운데로 잠기게 
하는 것, 나의 심신의 전체가 행복과 사랑의 덩어리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밖에 있는 세속적 쾌락을 떠나면 떠날수록 세속의 쾌락과는 비교할 수 없는 깊고도 큰 행
복이 밀려온다고 합니다.
  세속의 쾌락이란 이러한 행복에 비하면  조족지혈도 못 됩니다. 우리가  행복을 얻으려면 
황금 같은 보석을 얻어야 할텐데 겨우 쇠붙이나 돌맹이 정도를 행복이라고 알고 거기에 안
주해 버리기 쉽습니다.  
  마땅히 근본 행복을 얻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행복같이 보이는 것들은 대개가 행복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얼마 안 
가 곧 행복을 억압하는 쪽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에서 고통같이 보이는 것
도 바로 보면 고통이 아니라 그것은 곧 고통을 해소하는 쪽으로 작용합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세속적인 행복이니 고통이니 하는 것들의 배후에는 깊고도 미묘한 이치가 
작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눈에 고통으로 보이는 질병, 사고, 가난 등에는 대개  내 생명의 근원이 나로 하여금 
생명의 본성으로 돌아오도록 가르침을 주는 생명의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통처럼 보이는 것이 꼭 고통이라고만 할 수는 없고 행복처럼 보이는 것이 꼭 
행복이라고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생명의 본성에 가까울수록, 내 의식이 창조자  의식에 가까울수록 편안하고 행
복해지며 내 마음이 생명의 본성에서 멀어질수록, 내 의식이  피조물 의식에 가까울수록 불
안하고 불행해집니다.
  몸에 병이 생기고 사고를 당하고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것도 그 뿌리에서 보면 생명의 본
성과 멀리 떨어져 살았던 결과입니다. 따라서 여기에서 벗어나는 길은 어쨌든 생명의  근원, 
생명의 본성 쪽으로 한 발자국이라도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리한 새가 바람따라 
가는 길입니다. 
  개인도 행복하게 해주고 세상도 밝게 해주는  개인적인 삶의 조건은 다음처럼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1. 마음 밖에서 행복을 구하지 말라.
 2. 마음을 항상 생명의 본성에 맞추라.
 3. 생명의 본성에 맞는 삶을 살아가라.
  첫째로, 근본행복은 마음 밖에서는 성취될 수 없고 오직 마음 안에서만 구할 수 있습니다.
  재산, 지위, 명예 따위와 같이 밖에서 얻어진 행복 같은 것은 곧바로 행복을 억압하는  조
건으로 변하고 맙니다. 마음 안에서 순수한 행복감이 충만할 때 실은 행복의 외부적 조건도 
마치 빛이 있는 곳에 그림자가 따르듯이 저절로 따라옵니다. 
  둘째로, 행복의 무궁무진한 보고인 생명의 본성에서 한 시도  마음이 떠나지 말아야 합니
다. "모든 존재는 하나의 생명이며 나는 그러한 생명의 근원이다"라는 순수의식의 자각상태
를 지속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되면 자연히 분별시비가  줄고 고요해지며 관용과 자
비심이 커지게 됩니다. 이러한 자각상태가 바로 최상의 행복입니다. 
  셋째로, "모든 존재는 하나의 생명이며 나는 그러한 생명의 근원이다. 그러므로 온 세계는 
내 책임이다."라는 근원적인 자각상태에서 살아버리면 어떠한  고통의 씨도 생명의 빛에 끼
어들지를 못합니다. 어두운 문명구조 속에서 움츠려들어 노심초사할 것이 아니라 백 퍼센트 
생명의 본성대로 용기있게 살아갈 때 기성문명도 밝은 쪽으로 변화하게 될 것입니다. 
  자연히 항상 웃는 얼굴과 사랑스런 말씨로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주고 언제나 타인의 이익
과 공동이익을 앞세우며 어려움에 처한 사람의  수준에 내가 맞추어 어려움을 함께  나누는 
삶을 살게 됩니다. 
    결코, 결코 좌절하지 말라
  우리는 누구나 따로 떨어져 있다는 분리된 의식의 조각들 위로 솟아올라 그것들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고 통합되어 있는가를 확실히 이해하고 통찰함으로써 생명의 근원에 가까워지거
나 근원 그 자체가 될 수 있습니다.
  갈수록 넓어진 의식을 통해서 생명과 창조의 세계를 탐사하고 경험함으로써 현실세계에서 
강력한 영향력의 중심이 될 있습니다. 바로 그 중심에 서  있는 사람은 각자가 따로 떨어져 
있다는 무지와, 그리고 욕망, 저항으로부터 오는 고통을 풀어주는 지혜와 능력을 가지게  되
며 미래의 밝은 공동체 사회의 기초가 됩니다.
  헛된 꿈이란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로 남아있을 때만  헛된 꿈입니다. 일단 현실세계
에서 이루어지면 훌륭한 사실이 됩니다.
  미래에 밝은 세상을 창조할까 말까는  모든 존재의 집합의식이 결정할  일입니다. 위대한 
헛꿈으로만 영원히 남을지 생명의 문명과 밝은 세상으로 나타날지는 집합의식의 간절한 믿
음의 정도와 대중들의 공동 노력의 끈질긴 정도에 달려 있습니다.
  생명의 문명이란 "우리는 하나의 생명이다"를 다 함께 인식하고 경험하는 세상입니다. 생
명의 문명과 밝은 세상, 너무나 원대하고도 의욕적인 과제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말을 
귀로 듣는 것만으로도 그만 입을 벌리거나 고개를 젓고 말겠지요. 
  "그것은 망상이다. 그런 일은 인간 세상에서는 불가능해!"  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깊게 
박혀 있는 신념은 "문명과 세계의  창조는 가능하지 않다" 입니다. 바로 이 "가능하지 않다"
라는 집합의식이 개선된 세상을 가로막는 최대의 걸림돌입니다.
  만약 당신이 한 때 잘못된 세상을 개선하여 밝은 세상을 만드는 꿈을 가지고 그것의 실현
을 위해서 애쓴 적이 있었다면 그 시절에 같은  길을 갔던 옛 동료들을 다시 한 번  찾아가 
보십시오.
  그들에게 지금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요? 
  아마도 그들은 대개 몸만 살아남아  자기가 한정 지은 공간  속에 안주하여 내린 결론은 
"밝은 세상은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는다."입니다.
그들은 오래 전에 벌써 옛꿈을 다 잊어버리고 절망과 좌절의 덫에 걸려 철들고 성숙한 어른
답게 깊은 잠에 빠져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더욱 철이 깊이 들수록 밝은 세상을 꿈꾸는 사
람들에게 전해주는 선물이란 바로 그 죄절의 덫입니다. 그들이 버릇처럼 하는 말이란 "현실
은 좀체로 변화하지 않는다"입니다.   
  밝은 세계를 지향하는 어떤 사람을 만날 때 그들이 하는 말이란 이런 식입니다.
  "여보게, 세상은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네. 나도 한 때는 불같은 이상주의자였고 애도 
많이 썼지만 이상과 현실 사이에는 항상 간격이 있기 마련이었네." 그들은 역전의 용사로서
의 자신의 무용담을 팔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상사회의 실현은 절대로 가능하지 않다."는 
패배주의의 좌절을 전염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밝은 문명과 밝은 사회의 실현은 절대로  간여하지 않다고 믿는다." 이  신념이 밝
은 세상을 가로막는 최대의 장애물입니다.  이 세계를 좋은 세계로  만들어  보려다 실패한 
많은 사람들의 좌절과 패배의식이 이 장애물의 높이를 더욱 높아지게 하고 잇습니다.
  사람은 누구한테나 세상을 좋게 만들어 보고 싶어하는 근본적인 목표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내가 없다고 믿는 신념과 남이 옳다고 믿는 신념이 대립하게 되
면 갈등이 생기게 되고 그 갈등의 과정을 견디지 못할 때는 무엇이 옳다는 신념 그  자체가 
짐이 되어 결국 나에게 남는 것은 오직 살아 남아야겠다는 절박한 충동뿐입니다. 따라서 생
존이란 사람에게서 삶의 근본목표나 동기는 아닌 것이며 다만 나의 용기가 고갈됨으로써 자
신의 꿈이 후퇴할 때 남기고 간 쓰레기 같은 부산물인 것입니다.
  당신이 만일 어떤 사람의 좌절과 절망을 용인하게 되면 그것은 곧 자신의 마음에 미래의 
좌절과 절망의 씨를 심게 됩니다. 
  밝은 세상을 위한 가장 큰 기여는 당신이 그것을 꼭 이루어진다고 믿는 마음까지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뛰어난 도구와  힘은 당신의 믿음입니다. 그 믿음
과  파장이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대중의 집합의식에 커다란 에너지로서 보탬이 
될  것입니다. 오직 그 믿음에 대한 0%의 의심을 가지고 있다면 말입니다.
  좌절해 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좌절과 절망이 어떤 개인이나 집단에게 몰려오더라도 그것을 돌파할 수 있는 유일한 해답
은 요지부동의 믿음과 불퇴전의 결의와 물러서지 않는 끈질김입니다.
  다음에 기록한 사람의 인생의 역정을 보면 좌절과 절망을 돌파할 수 있는 이러한 해답이 
사실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잇습니다.
 22세, 사업에 실패
 23세, 주 의회 의원선거에서 패배
 24세, 다시 시작한 사업에서 또 실패
 25세, 주 의회 의원에 당선
 26세, 애인의 사망으로 좌절
 27세, 신경쇠약 증세로 건강악화
 29세, 하원 의장선거에 출마하여 패배
 31세, 대통령 유권자 선거에 출마하여 패배
 34세, 국회의원 선거에서 패배
 37세,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
 46세, 미국 상원의원 선거에서 패배
 47세, 미국 부통령 선거에서 패배
 49세, 미국 상원의원 선거에서 또 패배
 51세, 미국 대통령의 당선
  이처럼 길고도 지루한 좌절을 딛고 마침내 성공을 이룩한 장본인은 다름 아닌 에이브러햄 
링컨입니다.
  이 기록이 전하는 메시지는 누구든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밀고 나가면 무엇이
든지 이루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것은 선거를 통해서 대통령에 당선되거나, 무슨 
감투를 얻는 것과 같은 따위의 일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떠한 어려움, 어떠한 폭풍이 몰아쳐 오더라도 결코, 결코, 물러서지 않고 좌절하지 않는  
결의와 끈질김이 생명의 문명과 밝음을 세상을 탄생시키는 근본동력입니다.
  당신은 무엇이든지 이루어낼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당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은 오직 하나 "이루어  낼 수 있다"뿐입
니다.  

    일상의 가운데서
  음식의 단식, 생각의 단식
  안타깝게도 오늘날 우리가 먹는 많은 음식과 숨쉬는 공기는 화학 물질로 오염되어 있습니
다. 이러한 오염이 우리의 건강에 위협적으로 작용되어 있습니다. 어떤 생태주의자들은 이렇
게도 설명합니다. "현대농업은 주로 화학비료에 의존하고 있는데 화학비료는 토양을 산성화, 
황폐화 시켜서 지력을 감퇴시키고 농작물에 대한 병충해가 만연해지고 농약사용의 증대라는 
환경파괴의 악순환을 초래한다. 그러므로 이롸  같은 바자연적인 사슬을 깨뜨리지  않는 한 
아무리 좋은 농약과 의약품을 개발해 낸다고 하덜라도 농작물의 병충해와 인류의  고질병은 
해결될 수가 없다." 현대인들은 지금 화학물질의 오염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개
인적, 집단적으로 무엇인가 자구책을 써야만 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화학비료와 농약에 
오염되지 않은 곡물, 채소, 과일 같은 유기 농산물을 취하고, 화학물질이 포함된 가공식품은 
될수록 피하도록 하여 결국은 전사회가 이러한 생태주의적 구조에 도달하도록 노력할  필요
가 있습니다. 내가 그 동안 관찰하고 경험한 바로는 몸에 축적된 화학물질을 배설시키고, 정
화시키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정기적인 단식입니다. 내가 다른  나라의 단식 전물 의학자
들로부터 단식의 과학적 원리와 실행방법을 익힌 후 지난 십여 년 동안 많은 분들에게 단식
을 안내하고 있고 나 자신도 가끔 단식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단식을 할 때는 나의 일상활
동을 하면서 하는 데도 별로 불편함을 느끼지 않고 있습니다. 음식에 대한 그리움은 있지만 
심신은 더 경쾌해집니다. 단식은 일절 아무 것도 먹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물이나 차를 
충분히 마시면서 행합니다. 다양한 종류의 단식법이 있지만 그 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방법
은 효소 단식입니다. 여러 가지 약초나 채소를 발효시킨  효소원액을 물에 희석시켜 조금씩 
마시고 생수나 감잎차를 곁들여 늘 마시고 있으니까 하루에 2리터 이상의 물을 먹는 셈입니
다. 공복감이 생기면 섬유세제(예를 들어 '콜론파이버'와 같은)를 먹기도 하고 죽염을 소량씩 
섭취합니다. 이런 식의 단식은 엄격히 말하면 단식이라기보다는 절식이라고 하는 편이 맞겠
지요. 아무튼 나는 단식을 고행이나 극기 훈련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색다른 여행이나 탐험
쯤으로 생각하며 즐겁게 합니다. 단식기간도 처음부터  꼭 며칠간이라고 확정하지는 않으며 
3일이나 5일이나 또는 일주일, 그때그때 느낌이나 상태에 따라서 탄력성있게 조절합니다. 그
러나 나에게는 일주일정도가 가장 적당하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내가  다른 분에게 권할 때
도 단식에 대해 스트레스를 받아 가면서 까지는 하지 말고 본인이 무리없이 할 수 있을  때
까지만 하도록 일러줍니다. 단식은 끝난 다음이 중요합니다. 단식 후에 분출하는 식욕을  조
절할 자신이 없어서 회복식의 원칙을 못 지킬 것 같으면 처음부터 단식을 안 하는 것이  좋
습니다. 주의를 요하는 회복식의 기간은 최소한 단식기간 만큼 해야 합니다. 기간도 7일  정
도이겠지요. 단식을 끝낸 직후 2내지 3일간은 미음을, 그후 약 3일간에서 4일간은  부드러운 
죽을 그리고 이어서 적은 양의 밥을 먹는 식으로 점진적으로 본인의 상태에 무리함이 없이 
늘려 가면 됩니다. 단식이 끝난 후 약 한 달 가량은 술, 담배, 고기와 자극성이 있는 향신료 
등은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단식이야말로 과식, 폭식의 버릇을 소식으로 바꿀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단식기간에는 누워서 쉬는 것보다는 무리가 되지 않는 한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산길이나 숲 속을 산책하는 것은 아주 좋은 일입니다. 나는 이  기간에 
전통기공인 '온살도리'를 하루에 2시간씩 합니다. 또 매일 목욕을 하는데 온탕 냉탕을 1분씩 
교대로 왔다갔다하는 이른바 '냉온욕'을 하지요. 이런 식으로 하다보면 단식 기간에 힘이 빠
지는 일이 없고 심신이 더욱 경쾌해지며 일상적인 업무에 조금도 지장이 없습니다. 나는 이
와 같은 방법으로 단식을 매년 두 차례정도 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말한 ' 생활의료 2단계 
기 다스리기' 와 '3단계 몸다스리기'를 나는 위와 같은 식으로 합니다. 우리 가족들도 단식을 
좋아합니다. 아내는 아바타 프로그램 안내교사와 문인화 화가로서 바쁘게 지내고 있는데 가
사 일까지도 다 돌보면서 즐겁게 단식을 합니다. 열일곱살짜리  아들도 지난 여름방할 동안
에 7일간의 단식을 했습니다. 나는 가족들에게 단식을 강욯하지 않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할 수 있다면 해 보라는 식이지요. 내가 가끔 단식하는  것을 보고 가족들도 자연스럽게 따
라서 하는 것 같습니다. 실은 누구나  단시의 묘미를 한 번 맛보고 나며  정기적으로 안 할 
수 없게 되는 것 같습니다. 내 가족들이 하고 있는 장식이라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나 
안심하고 단식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단식은 처음 할  때는 단식 전문가로부터 안내를 받
을 필요가 있게지만, 두 번째부터는 혼자서도 충분히 잘 할 수 있습니다. 일상 생활을  원만
하게 처리하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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