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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외 정보/헤비타트

이런, 미친 생각이 효과 있잖아!

by FraisGout 2020. 9. 20.

  헤비타트 운동은 미친 생각이다.  자칭 그리스도인이라는 상당수의 회의론자들은 이윤
도 챙기지 않고 저소득층에게 집을  팔며, 이자도 물리지 않고, 정부기급 없이 전세계적
으로 건설사업을 벌이고, 거의 무급으로 수천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몇 주일, 몇 달, 몇 
년씩을 할애해 일을 한다는 것들이 모두 미친 생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
의 계명와 약속에 튼튼한 기반을  두고 있는 하나님의 아이디어들이다. 그리고 노아, 여
호수아, 다윗, 기드온에게  하신 말씀처럼 아무리 그  당시에는 황당하고 미친 소리처럼 
들려도 결국은 훌륭한 결과를 낳는다.
이러한 회의론자들을 더욱더 헷갈리게 하는  것은 헤비타트의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전세
계 어디에서나 통한다는  사실이다. 문화와 언어와 경제체제의  차이가 보편적인 진실을 
가릴 수는 없다.그 진실은 바로  모든 사람은 쾌적한 보금자리를 원한다는 것이다. 그리
고 지역이 어디든  상관없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생각대로 함께  뭉쳐 집을 짓고자 하면 
그 노력은 언제나 헛되지 않았다. 몇 가지 예를 짤막하게 소개하겠다.
우리와 함께 인디애너폴리스까지 걷기 운동에 참가했던 페루 엔지니어인 제논 콜크 로하
스는 1981년 태양열 에너지 프로젝트 때문에  뉴 멕시코로 갔다. 그때 어떤 친구가 헤비
타트 운동을 이야기해 주었고 제논은  조국의 동포들을 위한 협동주택 사업의 비전에 감
화되었다. 그 이후 그 비전은 점점  더 커졌다. 티티카카 호수(세계에서 수심이 가장 길
어서 배도 띄울 수 있을 정도인  이 호수는 해발 2마일이 넘는다고 한다)변 남부 페루의 
안데스 산맥 위헤 있는 푸노시가 그 출발점이었다. 그 뒤로 이 운동은 인접한 마나조 마
을로 확산되었으며, 후에는 역시 인접도시인 훌리아카로 이어졌다. 이 지역에 사는 수백 
명의 주민들이 평생  처음으로 쾌적한 집을 갖게 되었고,  사업은 아직도 계속 성장하고 
있다.
1984년에 미시간 주 그랜드 래피즈 출신의 자원봉사자 켄 밴 다이크는 푸노 시에서 일어
나고 있는 일을 다음과 같이 편지로 써보내 주었다.
키가 작고 탄력이 넘치는 어거스틴 랑크는 꼭 춤추는 곰을 연상케 합니다. 어느 날 그가 
꼭 뭔가 볼 일이 있는 것처럼 제  책상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는 우리 창고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지요. 그런데 그가 갑자기 활짝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스터 케니, 오늘 우리 집에 지붕을 올린대요!"
그는 누군가에게 그 흥분된 마음을 털어놓고 싶었던 겁니다.
푸노 헤비타트 지회에는 약 100여  세대가 있스빈다. 그들 모두 어떤 식으로든 헤비타트
의 정신을 구현하고 있습니다만, 자주 봐서 그런지 제게는 어거스틴의 가족들이 아주 특
별합니다. 5년 동안 아내와 5명의  자식을 거느린 어거스틴은 물도, 배변시설도 없는 방 
두 칸짜리 어도비벽돌집의 단칸 셋방에서  살았습니다. 가끔씩 어거스틴은 집을 떠나 다
른 지방에 가서 일을 찾기도 했습니다. 
1983년 그들은 헤비타트에 가입했고, 어거스틴은  우리와 함께 일하러 이 곳으로 왔습니
다. 여섯 달 동안 어거스틴과 가족들은 건설현장에 있는 어도비 오두막에 살면서 건축자
재와 집을 지켰습니다. 우기 중에는 마루에 물이 가득 찹니다. 임시 창고건물로 쓰고 있
는 그들의 집 골조를 올릴 때, 랑크 가족은 뒤편 침실로 이사를 했습니다. 11월 하순 영
원히 자기 집이 될 집으로 이사하면,  그들은 이 단지에서 헤비타트 집을 수혜받는 열일
곱 번째 가족이 됩니다.
랑크의 집은 470평방인치 넓이로, 침실이  둘 딸려 있고, 식당겸 거실공간이 있으며, 부
엌과 목욕탕이 있습니다. 목욕탕은 한동안 창고로 쓸 계획입니다. 아직 집에는 하수도와 
상수도 시설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샘물을 받아 쓰는 20,000갤런짜리 물탱크가 
있어서 거리와 공동화장실에 파이프로 물을 댑니다. 푸노의 빈민지역치고는 환경이 엄청
나게 개선된 셈이지요.  언젠가는 상수도, 하수도, 전기,  학교와 놀이터, 상업지구까지 
건설할 생각입니다. 우리는 미래를 위해 15에이커에 달하는 이 단지의 언덕들을 고르고, 
거리를 구획하고, 어린 가로수 묘목을 심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 가족은 자명종 시계를 쓸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매일 아침 동틀 때면 손수
레 소리에 눈을  뜨게 되니까요. 헤비타트 가족들이 벌써  새로운 공동체를 지으러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업에 참가하는 사람 중에는 게으름뱅이가 없습니다. 당신처럼 헤비
타트의 비전을 믿고 실현하려는 수많은형제 자매가 있을 뿐입니다.  
'망치의 신학'이 엉터리처럼 들리는가? 그러나 효과는 훌륭하다. 
뉴 멕시코 주 글렌우드의 아트 러셀이 지역 헤비타트 본부를 발족하러 1982년 아이티 듀
메이에 갔을 때, 그가 처음으로 고향에  보낸 편지를 받고 나는 사전을 뒤져야 했다. 그
는 그 지역  주민들이 사는 딱한 집들을 "연주창에  걸린" 집들이라고 묘사했던 것이다. 
그 말뜻을 사전에서 찾아보니   '1)임파선의 결핵질병과 유사한 2)도덕적으로 타락한'이
라고 쓰여 있었다.
몇 달 뒤 듀메이를 방문했을 때,  나는 아트의 표현이 정확히 들어맞는다는 사실을 깨달
았다. 집들은 끔찍스러웠다. 사실 듀메이 주변지역의 가난은 너무 지독해서, 새 집에 맞
는 자격조건을 갖춘  사람을 거의 한 명도 찾을 수  가 없었다. 따라서 입주할 가족들을 
제비 뽑아야 했다. 이름을 써서 상자에 넣고 휘저었다. 그리고 첫 50가구에 입주할 가족
들을 호명했다. 자원봉사와 지원물자가 추가로 아이티에 도착하면서 이 소박한 집들은 1
주일에 한 채꼴로 꾸준히 늘어났다.  그래서 우리는 2차로 다른 50세대의 입주가족을 한 
번 더 뽑았다. 
입주한 가족들의 평균소득은 1년에 500달러에 불과했다. 회의론자들은 그런 소득 수준으
로 집을 산다는 건 얼토당토 않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듀메이에서는 수십 세대가 자
기 집을 살 수 있었다. 그들의 집은 건축비용 1500달러에 야외 배변시설로 100달러의 배
용이 더 들었다. 그들은 20년 할부로 1년에 약 80달러씩만 부담하면 된다.
이러한 최소한의 비용부담조차 이들에게는  엄청난 노력을 요구하지만, 그들은 성공적으
로 해내고 있다. 연주창 같은 곳에서  튼튼하고 안전한 집으로 옮길 때마다 듀메이의 새
로운 입주자들은 수많은 감사기도를 올렸다. 
로저와 바바라 스넬러 부부, 그리고 그들의 어린 딸들은 인디아 남부 카맘에서 코라반다 
아자리아 라자네코라라오(다행히도 우리들은 그냥  '아자리아'라고 부르면 되었다)와 한 
팀이 되어 새로운 헤비타트 사업을 시작했다. 예전에 평화봉사단의 급수, 위생, 보건 프
로그램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로저와 바바라는 1983년 인디아의 첫 헤비타트 사업에서 2
년간 자원봉사를 하기로 결정했다. 
아자리아는 캠브리지에서 교육을 받은 남부 인디아 교회의 복음주의자로서 마을 목사들, 
병원환자들, 그리고 양로원과  힘을 합쳐 일했다. 그는  헤비타트의 이야기를 듣고 자기 
고향에도 기독교 주택보급사업을 도입해 가난한 아이들을 돕기로 결심했다. 
카맘에는 20만 명 이상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헤비타트가 집을 짓기 시작한 지역에서, 
주민들은 연평균 300달러의 소득을 올렸다.  가족들은 소득액에 따라 방 두 칸에 차양이 
달린 현관이 있는 830달러짜리 집이나, 방 세 칸에 차양이 달린 현관이 있는 1450달러짜
리 집 중에서 선택할 수 있었다. 
일단 사업이 진행되기 시작하자, 바위를  운반하고 벽돌을 만드는 일에는 비단 입주예정
자들만 매달린 것이 아니었다. 이 새로운 모험에 대한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퍼지면서 
다른 공동체와 동역관계가 형성되었다. 남부  인디아의 세인트 메리 교회 주일학교 10대 
학생들이 와서 터를  닦는 일을 도왔다. 그리고 8명의 대학생들이  나타나 더 깊이 터를 
팠다. 또 하루는 일단의 카맘 보이스카웃들이 나타나 트럭이 갈 수 없는 언덕 위까지 50
야드에 달하는 인간 사슬을 형성해 모르타르를 나르기도 했다. 필요가 너무나 절실한 이 
땅에서 비전이 날로 확산되는 것을 지켜보고 있으면 정말 가슴이 뛴다.
데이빗 로우가 첫 16채 헌정식을 위해 1985년 카맘을 방문했을 때, 그 역시 흥분하지 않
을 수 없었다. 새로 지은 집들은 아름다웠고, 튼튼해 보였다.
헌정식에서 한 정부관료가 데이빗에게  다가와 헤비타트는 어떻게 그렇게 저비용으로 좋
은 집을 짓는지 비결을 물어왔다. 데이빗은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는 모르타르에 사랑을 섞는답니다."
 이 말에는 부연설명이 필요했다.  그리스도인이 힌두국가의 이슬람 교도에게 예수 경제
학을 설명하려면 말을 아주 잘 골라서 써야 했다. 데이빗이 설명을 끝내자 그 관료는 카
맘에서 단순히 집을  짓는 것 이상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듯했다고 한
다.
우리가 계속해서 믿음으로 집을 짓고  기도를 계속한다면, 그는 언젠가 우리의 미친생각
이 실효를 거두고 있는 이유를 정말로 깨닫게 될 것이다.
헤비타트는 세상사람들이 완전히 돌았다고  생각하는 또 하나의 뜻깊은 성경말씀을 실천
에 옮기고 있다. 그것은 십일조이다.
구약시대부터 성경은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돌려서 나그네들과 이웃에 사는 
고아와 과부들과 함께 나누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 우리 주 하나님께서 우리
가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했다(레 27:30-32, 신 14:22, 28-29). 헤비
타트 사람들은 십일조가 실제로 풍요로운 축복을 가져다 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십일조의 가장 좋은 점은 끊임없이  주게 된다는 점이다. 수많은 헤비타트의 후원자들은 
매달 받는 상환금이나 월세의 십분의 일을 내놓아 가난한 가족이 집 한 채를 얻을 수 있
도록 돕는다. 새로 입주하는 사람들이 집세를 내면 그 돈은 즉각 또 다른 집으로 순환된
다. 매국 내 헤비타트 지회는 수입의 십분의 일을 기꺼이 내놓아 돈이 훨씬 모자라는 해
외 사업장으로 보낸다. 그리고 해외 사업장들은 종종 특별헌금을 내서 세계의 다른 곳에 
있는 에비타트 프로그램을 돕는다. 예수님게서는  주는 것이 더 복되다고 분명히 말씀하
셨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그렇게 귀중한 기회를 박탈당해서는 안 된다. 
개발도상국에서 헤비타트가 짓는  집 한 채의 평균비용은 미국에서  짓는 집 한 채 값의 
약 10% 정도이다. 그러니까 미국에 한  채의 집을 준공할 때마다 적어도 해외에 한 채꼴
의 집을 지으면 된다는 말이다. 가끔씩  미국 내 지회에서는 아예 자신들의 십일조를 받
는 제3세계 사업장에 사람을 파견해 '그들의' 집을 짓는 일을 거들기도 한다. 이런 체험
을 통해 축복은 점점 더 커져간다.
1985년, 코이노니아 동지회는 협동주택 사업을  통해 얻은 집세의 십일조를 모두 니카라
과와 우간다의 세비타트 사업에 기부하기로 표결했다. 당시 코이노니아는 16년간 견실하
게 집을 지어온 결과 섬터 카운티에만 155채의 집을 준공했다. 십일조는 매당 1,000달러
에 달했고, 새로운 가족이 입주할 때마다 금액은 계속 증가했다. 뉴욕 시에서 열린 1985
년 가을 이사회 때  개최했던 성대한'헤비테이션'에서 사업대표들은 각자의 십일조를 헌
금했다. 총 4만 달러의 금엑이 모아졌다. 저녁 예배가 되기도 전에 말이다!
수입의 십분의 일을 주님께 돌리고자 애써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십일조가 언제나 생각지
도 못한 기쁨을  안겨준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없으리라.  그러나 그것은 성경이 약속한 
대로이다. 헤비타트 사람들은 그 힘을 잘 알고 있다. 
헤비타트 사람들은 모두 평화를 위한 중재자가 되고자 한다. 우리는 불쌍한 사람들이 있
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찾아가  미친소리로 들리는 주님의 아이디어를 보여주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특별히 우리를 부르셨다고 믿는다. 그래서 우리는 정치기류가 불안한 과테말
라, 우간다, 티카라과, 아이티에서도 활동을 멈추지 않는다. 
내란으로 찢긴 나라에서 주님의  사랑을 증거하려는 노력은 수많은 애로사항과 장애물에 
부딪치게 되어 있다. 가끔은 무서운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1985년 9월, 우간다에 또다시 쿠데타가 일어나자 군대하 헤비타트의 필수품인 리랜드 덤
프트럭을 압류해 버렸다. 이 쿠데타 기간중에, 굴루의 사업장에서 일하언 우간다 사람들
은 기발한 꾀를 내서 몇 번인가 트럭을 숨기곤 했다. 심지어 무거운 마호가니 목재를 등
에 지거나 서까래를 머리에[  이고 8,9마일을 걸어다니면서까지 공사를 중지하지 않으려
고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자재를  운반해야만 했기 때문에 사업장 대표들은 숨겨진 장
소에서 트럭을 꺼내지 않을 수 없었고, 꺼내자마자 압류당했다.
헤비타트 위원회는 운전사 조지 오콧에게 군대차ㄹ량 집결지에서 트럭을 떠나지 말고 곁
에서 지키면서 군대의  운전병들이 트럭을 함부로 쓰지 못하게  하라고 일러ㅆ. 3일 후, 
군인들을 잔뜩 실은  조지의 트럭은 캄팔라로 가는 길에  게릴라의 총격을 받았다. 앞뒤 
유리창은 총알에 산산조각이 났고, 히터  앞바퀴 한 개, 헤드라이트가 총격에 부서졌다. 
두 발의 철갑탄이 트럭 뒷문을  관통하고 지나갔다. 그러나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조지는 총알이 지나가는 순간 가속페달에서  발을 데어 천만다행으로 다치지 않았다. 어
쨌든 조지는 병력을 싣고 굴루로 무사히 돌아오는 데 성공했다.
다음날 헤비타트의 용감한 우간다 직원  제프리 라팀은 군 수비대에 단신으로 찾아가 트
럭 본환을 놓고 협상을 벌였다. 그는 군대의 거물급 인사에게서 앞으로는 헤비타트 사업
장에서 쓰는 트럭을 절대 압류하지 않겠다는 공식문건을 받았다. 이틀 뒤 헤비타트 트럭
은 운반작업을 재개할 수 있었다.
1986년 1월, 우간다에는 또 다른  쿠데타가 발발했다. 우리는 굴루에서 자원봉사중인 윌
과 헐른 브라운 부부의 신변이  걱정되었다. 축출된 정부의 고위간부들이 굴루 출신이었
고 당연히 본거지로 도망가리라 추측되었기  때문에 심각하게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일이 일어날 지 예측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2월 1일에 우리는 굳은 신념과 꺾
이지 않는 용기를 지닌 윌로부터 다음과 같은 편지를 받았다.
안녕하십니까?
우리는 잘 지냅니다!  우간다에서 계속 일을 해나가다 보면 로마서  8장 35절 부터 39절 
말씀과 디모데후서 1장 7절 말씀을 마음에 되새기게 됩니다…. 오늘 우리 목수장님과 함
께 문틀 열 개와 창틀 여섯  개를 만들었습니다. 다른 일꾼들은 국민저항군이 굴루로 온
다는 소식에 겁을 먹고 자기 마을로  돌아갔습니다만 그런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헐
른의 아버지와 어머니께 전화해서 우리가 무사하다고 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말 그대로 총구 앞에 서서 하나님의  헐젓은 백성들을 위해 집을 짓는 일은 참으로 강력
한 싱앙고백이다. 그리고 동시에 화평케 하는 사역의 빛나는 사례이다.
니카라과의 저먼 포메어즈는 대략 400세대의 빈민가족들이 모여사는 농촌공동체다. 그들
은 흙으로 된 마루에 종려나무 이엉으로 만든 비좁고 벌레가 들끓는 집에 살고 있다. 끊
입없는 정치분쟁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서 몇 명 되지 않는 니카라과의 헤비타트 자원봉사
자들은 커다란 가마를  짓고, 기와 공장을 가동하기  시작했으며, 이동제재소를 세웠고, 
수제 진흙시멘트 벽돌들을 비축해 집을  짓기 시작했다. 더 중요한 것은 자원봉사자들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신뢰와 격려'라는 다리를 놓는 일을 함께 했다는 사실이다. 자원봉
사자인 수잔 베일리는 편지에서 "이곳  사람들은 너무나 세파에 지쳐 있어요. 그러나 헤
비타트 때문에 무엇인가 스스로 해낼 수  있는 기회와 자원과 인내심, 그리고 사랑을 얻
고 있습니다."라고 썼다.
또 다른 자원봉사자인 짐 혼스비는 헤비타트 건설 일꾼들과 매일 함께 하는 새벽 6시 30
분의 셩경공부와 기도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었다. 
사람들 중에는  산디니스타(1979년 소모사  정권을 전복한  니카라과 민족해방전선-역자 
주)에 동조하는 이들도 있고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굶주린 사람처럼 성경
말씀에 귀를 기울인다는 점에서  모두 똑같습니다. 정치지도자와 군인들, 카톨릭 신자와 
복음주의자들, 농부와 선생들이 우리의 설교를 듣고 함께 기도를 했습니다. 헤비타트 사
업 자체가 하나늬 간증입니다. 사람들은 이 사업이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준다고 믿고 있
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사업을 통해 그리스도를 공유할 수 있는 활짝 열린 문을 갖게 되
었습니다. 우리의 눈앞에서는 집터만 닦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리더십도 자라
나고 있는 것입니다. 
1986년 2월 8일, 니카라과 사업장은 카트 부부가 다니엘 오르테가 대통령과 기타 정부고
관을 대동하고 시찰함으로써 큰 전기를  맞게 되었다. 헤비타트 입주자들은 벽돌과 기와
의 제작과정과 이동제재소 시범을 보였다.  카터 대통령과 오르테가 대통령이 각각 벽돌 
하나씩을 올렸고, 두 사람이 함께 앙리케 토레스의 집 현관을 올라섰다. 
지미 카터는 헤비타트 사업은"그리스도의 사랑과  그분이 주시는 평화가 눈에 보이게 나
타난 것"이라고 말했다. 다니엘  오르테가는 니카라과 정부가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며, 
정의와 더 나은 삶을 위하여 일하는 기독교 신앙을 지지한다"고 화답했다. 가톨릭사제인 
외무부장관 미구엘 데스코토가 기도를 인도했으며 오르테가 대통령은 처음으로 헤비타트 
집의 주인이 된 두 세대에게 성경을 선물했다. 
니카라과에서 우리의 노력이 이 시련으로  점철된 땅에 조금이나마 평화를 증진할 수 있
기를 기도한다.
가끔은 지역적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원봉사자들을 일시적으로 철수시키도 한다. 
1981년, 아이오와 주 맨슨의 메논파 자원봉사자 로웰과 다이안 버키 부부는 현지의 정치
불안이 위험수위에 다다르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과테말라 아과탄에서 철수하고 귀국해
야만 했다. 1984년이 되어서야 콜로라도 주  포트 콜린즈의 데이빗과 베키 쉴 부부가 새
로운 자원봉사자로 아과탄에 파견되었다. 그러나 수많은 장애물이 앞을 가로막아 작업을 
지연하고 심지어 중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작업은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1986년이 되자 
무려 100여 세대가 옥수숫대와  진흙으로 지은 오두막집에서 튼튼한 가옥으로 이사했고, 
한달에 두세 채꼴로 새 집들이 세워지게 되었다. 다른 곳도 마찬가지지만, 과테말라에서 
우리의 활동은 성경말씀대로 화평케 하는 사람의 역할을 잘 보여준 예였다. 
헤비타트는 집을 지을 만하지 못한 곳에서 비정통적인 방법으로 집을 짓고 있으며, 공동
체를 건설하고 있다. 그 결과는 참으로 훌륭하다. 아무리 미친 생각 같아도 하나님이 영
감을 주셨다면 틀림없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이 법칙이 근사하게 실현된 사례를  켄트키 주 파두카의 헤비타트 사업장에서 일하는 랜
달 듀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다. 파두카 지역의 어떤 중고차 거래상은 어디를 가든지 애
견 스펜서를 데리고  다녔으며, 대리점 광고에 정기적으로  출연시켰다. 어느 날 랜달은 
스펜서에게 트럭 한 대를 기부해 달라고 부탁하는 편지를 쓰기로 했다. 스펜서의 주인은 
흥미를 느꼈다. 얼마 후, 파두카 헤비타트는 두개의 선물으 받았다. 하나는 중고 픽업트
럭이었고, 다른 하나는 1,000달러의 조건부 양도증서였다.
헤비타트 사람들에게는 남들과  다르게 쓰는 말들이 있다. '휴가'란  보통 일년에 한 번 
정도 직장업무를 놓고 쉬면서 스스로 비용을 부담해 멀리 떨러진 사업장을 찾아가 1,2주
일 동안 건설인부들과  함께 노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무급으로. 또 헤비타트말로 
'충분하다'는 말은 풍부하다는 뜻이 아니라,  많든 적든 우리가 가진 것을 의미한다. 우
리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소수의  헌신적인 사람들과 별 볼 일 없어 보
이는 그들의 자원을 몇 배로 불려서 기적을 행하신다는 사실을 배웠다. 주택개발 회사의 
영업사원이라면 새로 지은 집에 '숲  속의 빈터'(눈에 띄는 나무가 한 그루 없더라도)라
든가 '휴식처' 따위의 근사한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그러나 오레곤 주 포틀랜드의 헤비
타트 위원회는 그들이 처음으로 지은  집 세 채에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포틀랜드 동지들은 1983년에 '믿음'으로 처음 낡은  집 한 채를 샀다고 한다. 그리고 두 
번째로 개축된 집에 꼭 어울릴 가족을 멀지 않은 곳에서 찾을 수 있기를 '소망' 했으며, 
세 번째 집을 '사랑'으로 지었다. 서부에서 '휴사'온 일꾼들의 힘으로 지어진 이 세번째 
집은 특별히 수족절단 수술을 받은  한 할머니를 위해 설계되었다. 할머니는이제 행복한 
마음으로 가족들과 함께 살 수 있게 되었다. 
개인적인 이야기이지만 린다와  나는 딸 조지아에게 감명을 받은  적이 있다. 1985년 10
월, 조지아는 열네 번째 생일선물로 특별한 반지를 받고 싶어했다. 당시 그 애는 우리와 
함께 헤비타트 가을  총회에 참석하러 뉴욕 시에 가게 되어  있었다. 엄마 아빠가 2주일 
동안 로우어 이스트사이드의  아파트 건물에서 일을 하느라  파김치가 되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조지아는 어느 날 뜻밖의 선언으로 우리를 놀라게 만들었다. 
"내 생일 선물 살 돈을 뉴욕 헤비타트 사업에 주세요."
1985년 10월 11일, 그레이스 감독파  교회에서 열린 대규모의 '헤비테이션' 예배 당일에 
나는 딸이 자랑스러워서 가슴이 벅차올랐다.  조지아가 생일선물로 받을 반지 대신 50달
러 수표를 기부한다고 발표했던 것이다. 예배가 끝난 뒤, 예전에 아메리쿠스에서 자원봉
사를 했던 줄리아 맥크레이가 내게 다가왔다.
"이걸 조지아에게 주고 싶어요."
그녀의 손에는 돌고래 모양의 아름다운  금반지가 있었는데, 그것은 그녀가 열여섯 번째 
생일 선물로 받은 것이었다. 줄리아는 자기가 10년 동안이나 끼었으니 이제 다른 사람에
게 주고 싶다고 했다. 돌고래를 좋아하는 조지아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다음날 오후, 헤비타트 집회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브루클린 다리는 건너 로우어 이스트
사이드에 있는 헌정식장으로 행진할 때, 녹스빌에서 온 헤비타트 후원자 케이 벤슨이 내
게 다가와 아주 아름다운 석류석 반지를 건네주었다. 
"이걸 조지아에게 주고 싶어요."
조지아는 깜짝 놀랐지만 아주 감사한 마음으로 받았다.
두 주일이 지난 후, 나는 앤드루 영과 함께 애틀랜타에 있었다. 
"지난 주에 홍콩에 갔는데, 내 딸 폴라한테 줄 반지를 사면서 조지아 것도 하나 샀어."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작은 비취가 박힌 예쁜 금반지를 건네주었다. 
나는 진심으로 그에게 고밥다고 인사를  한 뒤 조지아가 뉴욕 시 헤비타트에 생일선물을 
헌넙한뒤 일어났던 일들을 털어놓았다. 
앤드루는 알겠다는 듯 킥킥 웃었다.
"글쎄, 자네도 알겠지만 성경말씀에 주님께 드린 것은 100배로 돌려받을 거라 하지 않았
나. 조지아가 나머지 반지 아흔 일곱 개를 다 받으면 잊지 말고 나한테 알려주게!"
조지아의 헌금 때문에 조지아 자신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생각지도 못했던 축복을 얼
마나 많이 받게 되었는지 모른다. 내가  분명히 아는 것은 처음에 조지아의 이야기를 듣
고 '미친 생각'이라고 비웃었던 학교 친구들이 다시는 조지아를 비웃지 못했다는 사실이
다.
이 새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이  어떻게 역사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주님을  믿고, 주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이 한없이 
위험하게만 보일 것이다. 그러나 헤비타트 사람들은 믿음이 유일한 수단임을 안다. 믿음
은 역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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