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그외 정보/헤비타트

하나님이 일으킨 사건들

by FraisGout 2020. 9. 20.

  종종 새로운 헤비타트 사업을 벌여 보겠다는 단체를 만나게 된다. 가장 빈번하게 
받는 질문은 바로 "이 일을 시작하려면 돈이 얼마나 필요한가요?"이다.
내 대답은 항상 똑같다.
"1달러입니다. 수중의 돈이 1달러도  안 되면서 사업을 시작하는 건 무책임한 일이
지요."
그리고 나서 또 하나의 조건이 있다고 말해준다.
"예수님의 경제학을 통해 주님을 섬기고 주님의 자녀들에게 쾌적하게 살 곳을 마련
해주는 일에  진지하게 매달릴 핵심멤버가 몇명  필요합니다. 만일 수중에  1달러가 
있고 헌신적인  사람들이 있다면, 믿음을 갖고  전진하십시오.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입니다."
체사피크 헤비타트의 스티브 앤더슨은 종종 나를 일깨워주곤 한다. 
"믿음을 갖고 한걸음 앞으로  나서서 주님의 인도를 따르게. 놓치지 않고 따라가려
면 종종걸음을 쳐야 할걸세!"
헤비타트의 활동이 성장을 거듭함에  따라 놀라운 일들이 잇달아 일어나 사업의 진
행을 돕곤 한다. 1980년 <모르타르에  깃든 사랑>을 출간했을 때, 한 장을 온통 이
러한 에피소드로 채웠던 적이 이는데 그 장의 제목은 '하나님의 우연'이어ㅆ. 
1985년, 이 글을 쓰기  위해 소재를 모으던 중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  중에서 코스털 엠파이어 헤비타트  지회를 맡고 이쓴ㄴ 카톨릭  신도 
탐 맥래플린의 이야기가 재미있었다.
"시비를 거는 투로 서두를  꺼내고 싶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우연'이라는 말은 좀 
꼬투리를 잡아야겠군요. 우리는 그 문제를 좀 다르게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일하고 계시며, 우리 일에 직접 개입하고 계십니다."
물론 그의  말이 맞다. 그래서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나서서 우리를  도와주신 
사례들을 모아 솔직하게 '하나님이 일으킨 사건들'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이 이야기는 탐 자신의  체험으로 시작하기로 하겠다. 이 일은 사바나 사업의 초기 
단계에 일어났다고 한다.
우리는 첫 번째 집  토대를 박을 구덩이를 이미 파두었습니다. 강철 레버는 제자리
에 잘 박혀 있었고 루 카스틸리온과 나는 다른 자원봉사자들과 콘크리트 트럭이 도
착하길 기다리고 있었지요. 오후 3시 30분이 되자 트럭은 도착했지만 자원봉사자들
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똑같이 65세였던 루와 나는 숨을 깊이 들이
쉬고 큰크리트를 구멍에 펴바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고군분투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젊은이가 다가오더니 일
할 사람이 필요하냐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루는 그 젊은이에게, 이 일은 하나님의 
일이며, 무보수 노동으로 빈민들을 위한 집을 짓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습니
다. 젊은이는 루의 이야기를 잠시 곱씹어 보더니 웃옷을 벗어던지며 트럭 운전사쪽
을 보고 "빨리 합시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나한테서 삽을 받아들면서 "저는 이런 
일을 8년동안이나 했다구요"하고 말했습니다. 그는 콘크리트를 전부 요령있게 제자
리에 퍼넣더니, 웃옷을 집어들고 가던 길로 갔습니다.
우리는 그 청년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고,  그 후로도 한 번도 보기 못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사람이라는 것은 잘 압니다. 
우리는 그를 우리에게 보내주신 하나님의 은총에 깊이 감사를 드렸습니다.
멤피스에 위치하고 있는 중남부  지회에는 프랜 콜리어라는 이름의 여장부가 있다. 
그녀가 내게  보낸 편지에는, 극빈주거 상황이  심각한 테네시 주 로스빌에서  땅을 
확보하려고 노력하던 중 겪었던 일련의 좌절이 생생히 적혀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놀랄 만한 역사가 시작되었고, 부지와 그 부지를 살 수 있는 돈이 한꺼번에 나타났
다. 그때부터 하나님의 역사는 잇달아 일어나기 시작했다. 
부지를 사고, 공사에 들어갔습니다.  첫 번째 집은 안나 스팬서와 가족들에게 헌정
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안나는 아들다섯에 딸 하나, 그리고 세 명의 손주들을 거느
리고 있담니다. 그들이 살던 판잣집은 두 눈을 의심할 정도로 비참했습니다. 열 식
구가 방 세칸에 살았으니까요. 수도도, 우물도 없었고 별도의 배변시설도 없었습니
다. 그들은 덤불숲 속에 들어가 볼일을 보아야 했습니다. 우리는 이 형편없는 판잣
집 대힌 약 1,000평방피트 남짓한 넓이로 방 네 칸에 화장신 한 칸, 콘크리트 벽돌
벽을 갖춘 견고한 집을  설계했습니다 .스펜서 가족들은 기쁨에 들떴고, 공사를 최
대한 빨리 진척시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돕고 싶어했지요. 그러나 스펜서 가족
은 물론이고  헤비타트 자원봉사자들 중에서도 벽돌을  어떻게 쌓는지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숙련된 벽돌공들을 몇 사람 데려와야겠는데요."
모두들 입을 모아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어디서 찾아와요?"
"벽돌공 노조에 한번 가보시죠."
노조 위원장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자원봉사를 해줄 사람이 있나 알아보러 한 번 찾
아오는 거야 흔쾌히 승락하겠지만, 일이 잘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고 하더군요.
아니나다를까, 노조 강당으로 몰려든 남자들이 나를 보는 표정은 희한하기 짝이 없
었지요. 게다가 휴일인 토요일에, 그것도 무급으로 일해달라고 부탁을 했더니 혹시 
이 여자가 미쳤다나 하는 빛들이 역력했습니다. 저는 우리가 지금 이 일을 하는 것
은 궁핍한 하나님의 백성에게  집을 마련해 주기 위해서이고, 이 집은 영리를 취하
지 않으며 할부이자도 받지 않는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번에는 완전히 미친 사람 취
급을 하더군요. 하지만 지원자가 세 사람 나왔어요. 세 사람이면 충분했습니다. 하
나님, 감사합니다!
1985년 1월 3일에 스펜서 가족은  아름다운 새 집으로 이사를 했고, 2월 16일에 헌
정식을 했습니다. 친구와 가족과  헤비타트 동역자들이 앞마당에 모여 이 경사르런 
일을 기쁜 마음으로 축하했지요. 현지 신문은 헌정식에 대해 훌륭한 기사를 게재했
는데, 이로 인해 주님의 기적이 또 하나 일어났습니다.
그리스도인 신사 한 분이  관심을 가지고 전화를 했더군요. 그는 포스터 오토 월드
의 지미 포스터라고 자기를  소개하더니, 헤비타트에 대해서 이것저것 꼼꼼하게 캐
물었습니다. 마침내 그가 한숨을  돌리길래, 이번엔 제가 물어봤지요. 혹시 포스터 
오토 월드에  헤비타트에 기탁할 만한  픽업트럭이 있느냐고 말입니다.  픽업트럭은 
아주 비싸다고 대답하길래, 중고라고 기쁘게 받겠다고 말했지요. 다음주에 다시 전
화하라더군요. 그래서  다음주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첫 마디에  저는 
낙담하고 말았습니다.
"다시 생각해 봤는데 헤비타트에 중고트럭을 주지는 않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곧장 이렇게 덧붙이더군요.
"새 트럭을 드리겠습니다!"
나머지는 '베풂은 또 다른  베풂을 낳는다'는 전형적인 이야기입니다. 지미 포스터
는 10대인 아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모른다며, 아들을 보내 헤비타트의 건축을 돕겠
다고 하더군요.
신문에서 포스터의 기부에 대한  기사를 읽은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트럭을 주었다지만, 나는  내 시간을 내어줄 수 있지!"라고요. 그래서 우리
는 또 한 사람의 재능있는 자원봉사자를 얻었답니다! 
피킨스 카운티의  헤비타트 사람들은 주님이 자신들의  활동을 돕고 계심을  똑똑히 
보았다. 현대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이 단체의 일원 산드라 그레이엄은 그 한 가
지 예를 이렇게 들고 있다. 
바이올라 앤더슨의 집을 짓기 시작할 때부터, 수중의 돈은 금방이라도 바닥날 것처
럼 아슬아슬하기만 했지요. 그렇지만  매달 어찌어찌해서 청구된 요금을 지불할 수 
있었어요. 완공시기가  가까와올 무렵, 우리에게는  바닥재를 살 돈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일단 바닥재를 구입한  뒤에 돈이 들어오기만 기다렸어요. 청구서가 도착한 
바로 그 날, 다른 쪽지  한 장이 함께 도착했습니다. 클렘슨의 성 앤드루스 성당의 
빌 브림리 신부님께서 보낸 쪽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지요. 
"우리 성당  교우들의 특별헌금입니다.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동봉한  수표는 
600달러였지요. 바닥재 청구액은 정확히 592달러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양탄자를 고
정할 압정값으로 덤으로 주신 겁니다!
1983년 봄 버몬트 주  벌링턴에서, 재기넘치는 젊은 부부가 깝짝 놀랄 만한 결정을 
내렸다. 오하이오 대학 동문인 샐리와 카티 홀 부부는 직장을 그만두고 믿음으로 1
년 동안  헤비타트에서 자원봉사를 하기로 했다.  경제학 학위를 지닌 카티는  목수 
노릇을 아주  즐겼다. 초등학교 사서인 샐리는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무슨  일이든 
가리지 않고 하기로 했다. 
홀 부부가 믿음 하나만을 가지고 세일럼 카운티에 갓 생긴 헤비타트 사업장으로 떠
난 것은 1983년 10월의 일이었다. 샐리와 카티가 세일럼 카운티에 도착했을 때, 한 
가족은 환영만찬을 준비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또 다른 사람은 적당한 아파트를 
찾을 때까지 자기  농장집 3층을 무기한 써도  좋다고 했다. 한 목사님과  사모님은 
홀 부부의 짐을 자기네  집 차고에다 보관하라고 제안했다. 목사님의 교인 한 사람
은 홀  부부가 데려온 고양이 두  마리를 잠정적으로 입양했는데, 고양이들이  농장 
주위의 견공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샐리는 이 시기에는 보통 
교직원 채용이 마무리된 후였기  때문에 자기 분야의 일자리를 구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는데, 사흘 안에  초등학교 사서로 일해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직장
에서 면접을 하고 나서 샐리는 고개를 절레 절레 저을 수밖에 없었다. 뉴저지 펜스
빌이라는 자그마한 지역의 학교들을 관장하는 교육감은 예전에 샐리가 일했던 버몬
트 주 벌링턴의 교육감과 절친한 사이였다. 두 사람은 짤막한 통화를 했고, 샐리는 
합격했다는 걸 알았다.)
그로부터 몇 주가 지난 어느 날 오후, 카티는 세일럼 카운티의 첫 헤비타트 집에서 
하루의 일을 끝마친 뒤  그지역의 역사연구회를 찾았다. 아버지가 보낸 편지에, 카
티가 세일럼에서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
기 때문이었다.
아니나다를까, 카티는 윌리엄  홀이라는 자기 선조가 목수였으며, 1677년에 영국에
서 세일럼 카운티로 건너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한 1820년에 그의 5대부이
자 역시 목수였던 에드워드  홀이 신시내티로 이사를 갔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카
티의 가족은 아직도 신시내티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그는 아직도 세일럼 카운티
에는 홀ㅌ운이라고 알려진 아주  작은 마을이 있으며, 그의 숙소에서 겨우 농장 몇 
채 거리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처음 버몬트를 떠날 때,  샐리와 카티 홀은 오나전히 낯선 곳으로 모험을 떠난다고 
생각했다. 지도에서 찾아보기 전까지  세일럼 카운티라는 지명은 들어본 적오 없었
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믿음으로 이사를 했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랐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카티를 원래의 뿌리로 다시 데리고 가셨다.
홀 부부는 자원봉사기간을  마치고, 가족사정으로 다시 오하이오로 이사했다. 이번
에는 두 마리 개와 두 마리 고양이, 그리고 주님께서 주신 또 하나의 축복인 갓 태
어난 어린 아들을 챙겨야 했다. 그들은 산더미처럼 쌓인 사랑도 함께 챙겨 떠났다.
헤비타트는 1976년  아메리쿠스에서 처음 현실로  나타났다. 우리의 첫 본부건물은 
4,000달러짜리 낡은 건물이었는데, 내가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일하는 변호사 사무실 
역할도 겸하고 있었다. 이 건물을 사게 된 과정에도 주님이 역사하셨고, 이 이야기
는 이미 <모르타르에 깃든 사랑>에서 자세히 쓴 바 있다.
시간이 흘러 헤비타트는 성장을  계속했고, 우리는 그 근처에 있는 다른 낡은 건물
들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어떤  건물들은 사무실 공간이나 자원봉사 숙소로 개조되
었고, 어떤 것들은 개보수를  거쳐 저소득 세대에게 매매되었다. 어떤 건물들은 뜯
어서 땔감으로 쓰고, 그 터는 새 헤비타트 집을 지을 부지로 썼다. 
한 번은 헤비타트 사무국 근처에 있는 판잣집 세 채를 사들이려 했던 적이 있었다. 
알아보니 집주인은 아메리쿠스에서 아주  큰 교회를 다니는 교인이었다. 나는 그에
게 연락해서 혹시 판잣집ㅇ르 팔지 않겠느냐고 물어보았다. 
며칠 후 그가 우리 사무실에  들러, 판잣집을 팔 의향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가격
을 물었더니 판잣집 가치의  두 배도 넘는 액수를 부르는 것이었다. 내가 생각하기
에는 너무 비싸다고 말했더니,  이 도시에 다른 판잣집들도 가지고 있는데 혹시 보
겠느냐고 했다. 우리는 그  사람의 차를 타고 아메리쿠스 시 전역을 누비며 스물다
섯 채쯤의 판잣집을 더 보았다. 다 쓰러져가는 판잣집 앞에 차가 멈출 때마다 집값
을 물어보았지만 매번 그는  터무니없는 액수를 부르곤 했다. 도저히 거래를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러부터 1년이 흘렀다. 하루는  전화벨이 울리길래 받아 보았더니 바로 그 판잣집 
주인이었다. 
"사무실에서 한 블럭 거리에 있는 판잣집들을 아직도 살 생각이 있으신가요?"
"물론이지요. 하지만 당신이 부르는 가격은 너무 비쌉니다."
"절반으로 깎아드리면 어떨까요?"
"그러면 거래할 수 있지요.  그 정도가 적당한 가격선인 것 같습니다. 한번 사무국
에 들러주시지않겠습니까?"
몇 분도 채 되지 않아, 한 사람이 현관문을 들어섰다. 그는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
었고, 나는 이 사람의 심경이  변화를 일으킨 데 모종의 사연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머쓱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펜실베니아에 시집간 딸이 살고 있는데,  얼마전 그 애를 보러 갔다가 그 애가 다
니는 교회에 예배를 드리러 갔습니다. 그런데 예배시간 내내 헤비타트 운동 이야기
만 하더군요! 거기서 슬라이드를  보고 어쩌ㅕ 내가 문제를 악화시킨 주범이었는지
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가걱을 절반으로 깎아서 집 세 채를 내 놓
은 겁니다."
우리는 악수를  했다. 헤비타트는 판잣집을 샀고,  차례대로 철거해서 새  헤비타트 
집들을 지었다. 주님께서 그 자녀들에게 조지아의 쾌적한 집을 마련해 주시기 위해 
펜실베니아로 직접 가서 일하신 것이다. 
1984년 4월 워싱턴 주  멀키티오의 존과 앤 프랭큰 부부는 파푸아뉴기니의 포느 모
레즈비로 가서 새로운 헤비타트  사업장을 출범시켰다. 존은 30년 동안 사무실에서 
행정업무를 보다가 최근에 은퇴했는데,  양손을 써서 할 수 있는 일을 해보고 싶어
했다. 존과 앤에게는 이 일이 주님께서  특별히 두 사람에게 맡긴 소명이라는 확신
이 있었다. 그들이 파푸아뉴기니에 도착한  지 몇 달 후, 존은 그의 체험담을 다음
과 같이 편지에 적어보냈다.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  어디서부터 시작하십니까? 너는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
기 때문에, 매번 주님께 의존할  수 밖에 없었지요. 이렇게 아무 것도 몰라서야 사
업을 성공으로 이끌기는커녕 시작조차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좌절했던 적도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런데 일이 진행되자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으로 저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저는 저 자신이나  저의 지식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의지했
습니다. 이론적으로 의지한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현실적인 문제들을 주님께 가지
고 나아갔습니다.
우리는 생활필수품을 구할 수 이쓴ㄴ 길부터 익혀야 했습니다. 우리는 매일 언어를 
공부했고, 정부의 주택정책을 알아  보았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이 대출을 받을 수 
있는지 알아보았고, 빈민들이 어떤  주택을 원하며, 어느 정도의 금액을 감당할 수 
있는지 알아 보았습니다.  우리는 자재공급자를 찾아나섰고, 빈민들을 위한 주택을 
지을 때 자재값을 깎아서  공급해줄 회사 간부들에게 전화를 걸어서 설득했습니다. 
노동부에 전화를 걸어서 임금관련법을 알아보았고, 건설부에 전화를 걸어 건설관련
규정과 인가조건을 문의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설계도구들을 사다가 초안을 잡기 시작했습니다 .평생 설계일
에 관련된 일을 했지만,  실제로 건물의 세밀한 구조까지 그려보기는 처음이었습니
다. 다시금 저는 모든 일을  주님께 맡겼습니다. 세 번째 세도에서 저는 현실적 가
능성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저렴한 집의 설계도를 뽑아 낼 수 있었습니다. 
저는 건축인가를 받기 위해 도면을 들고 건축설계사를 찾아 갔습니다. 제가 직업적
인 토목사나 건축가가 아니니 직접  도면을 살펴본 뒤에 손봐야 할 곳에 빨간 줄을 
그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다시 찾아갔을 때 그는 제가 제출한 상태 그대로 인가를 
받았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처음에 저는 두 사람의 미숙련공을 고용했습니다. 첫 단계에서는 그 지방에서 나느 
진흙을 시멘트와 섞어서 벽돌을  만들기만 하면 되었으니까요. 그런데 토대를 부어 
굳힐 때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우리에겐 미숙련공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아메리쿠스
에서 오리엔테이션을 받을 때  콘크리트를 붓는 일을 거든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
럭저럭 일을 끝냈습니다. 그러나  집의 내벽을 만들기 위해 벽돌을 쌓으려고 보니, 
이번에는 별돌공이 없는 겁니다. 물론 저도 오리엔테이션때 벽돌을 쌓은 적이 있습
니다만, 그때는 주위에 그 일을 잘 아는 사람들이 늘 함께 있었습니다. 
벽돌공은 아직 못 찾았는데,  일을 해야 하는 날이 어김없이 다가왔습니다. 너무나 
걱정이 되어 마음이 심란했지만, 저는 주님께서 제가 직접 일하길 바라신다는 확신
을 얻었습니다. 저는 주님께서 제 손이 하는 일을 축복해 주시리라 믿었습니다. 그
래서 두 사람의 일꾼들에게  벽돌 쌓는 법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말 그대로 소
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격이었지요! 그러나 별 문제없이 토대를 쌓아 올리기 시작했
고, 놀랍게도 완성된 건물은  완벽한 수평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막상 벽을 
쌓기 시작할 때가 되자, 주님께서 벽돌공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마침내 집을 지어서 헌정했습니다. 그 집은 참으로 벽돌과 모르타
르로 만들어진 한 편의  설교였습니다. 그 집은 인간답게 살 집을 절실하게 원하고 
있는 빈민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설교인 동시에 저를 향한 그의 사랑을 
증거하는 설교이기도  했습니다. 종종  저는 동료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저는 당신들의 대장이 아닙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일 뿐입니다."
우리 헌정식  식순의 앞표지에는 "하나님께 영광  있으라"는 말이 자랑스럽게  쓰여 
있었습니다. 아내인 앤조차 제가 이 첫번재 집을 짓는데 거의 한 일이 없다는 사실
을 잘 몰랐습니다. 저는 그저 하나님의 명령을 따랐을 뿐인데 말입니다. 
평생 저는 제대로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왼손이 두 개 달린 사람'이라고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투덜거렸습니다. 글쎄요, 주님께서는 제 이런 태도를 보고 웃으시
며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존, 나는 네게  왼손을 두 개 달아주지는  않았단다. 
그 증거를 보여주마"라고 말입니다. 주님은 정말 그 증거를 보여 주셨습니다. 
헤비타트 사업에는  언제나 기금이 필요 한데,  우리는 예기치 않은 곳에서  원하던 
것을 얻곤 한다. 1982년  텍사스 주 아미릴로에 새로 출법한 헤비타트 지회는 집을 
지을 부지를 찾고 있었는데, 이  부지는 세 가지 조건에 맞아야 했다. 사업을 출법
할 부지는 첫재, 저렴해야  했으며 둘째, 서로 다른 인종들이 공존하는 지역이어야 
했고, 셋째, 학교와 대중교통수단이 가까워야 했다. 
오랜 기간의 탐색  끝에, 위원회는 35채의 집을 지을  수 있는 공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집 한 채의 부지 가격은 1,500달러로 매겨져 있었고, 백인, 흑인, 히
스패닉, 라오스인이라는 네 집단이  인구를 구성하고 있었다. 이 땅은 주요 버스노
선을 따라 늘어서 있었으며, 길 건너편에는 초등학교가 있었다. 헤비타트 사람들은 
진행계획을 논의하고 함께 기도했다.  그리고 마침내 5,000달러에 4개의 부지를 살 
것을 제안해 보자는 결정을 내렸다. 
며칠 후 대답이 왔다. 주인은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었지만, 아마릴로에서 성장기를 
보낸 사람이었다. 땅주인은 젊었을  때 신학교에 다닌 적이 있었지만, 신앙생활 대
신 사업에 뛰어들기로 결정했었다는  사연을 털어놓았다. 사업이 성공을 했으니 이
제는 자신이 누린 행운과  재산을조금이나마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는 이야
기였다. 그는  아마릴로 헤비타트가 제의한 5,000달러의  가격에 35개 부지를  모두 
내놓았다!
흥분한 위원회는 즉시 새로  획득한 단지를 '헤비타트 언덕'이라고 명명하고, 하나
님의 백성들을 위한  집들을 설계하기 시작했다. 그  일이 있은지 얼마 되지  않아, 
아마릴로 시에서 무료로 도로와 상하수도를 놓아 주겠다는 제의를 해왔고, 이쯤 되
자 헤비타트 사람들은 건축자금  역시 어떻게든 충당될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
다. 그리고 그 믿음대로  자금도 해결이 되었다. 지금도 아마릴로에는 튼튼한 새집
들이 시시각각 세워지고 이쏙, 헤비타트 언덕은 주님의 축복을 증거하며 확장을 거
듭하고 있다. 
물론 모든 헤비타트  사업이 수중에 단 1달러만  달랑 들고 시작하는 것은  아니다. 
뉴저지에서는, 10,000달러의 기부금 덕분에 1986년 글로스터 카운티 사업이 출범하
게 되었다. 이 기금들은 핏맨 침례교회의 여자교인들이 중고옷가지를 팔아 한 번에 
동전 얼마씩을 벌어들여 조성한  것이었다. 그들은 이 알뜰가게에 너무나 어울리는 
이름, 즉 '무화가 나뭇잎'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헤비타트가 건축 시작 자금을 마련하게 된 유별난 사연들 중에서 특히 나는 플로리
다 주 탤러하스 지회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1983년은 탤러하스 제일장로교회가  150주년을 맞는해였습니다. 교인들은 1838년에 
지어져 개보수가 불가피했던 예배처를  새로 짓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위해
서만 공사를 한다면 이웃을  사랑하는 자세가 아니라는 걱정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모금운동을 벌이는 동안 개보수비용의 25%를 더 모아서 남는 돈을 
탤러하스 지역의 복지사업을 위해 기탁하기로 했습니다. 보수비용이 325,000달러로 
추정되었으니, 지역사업을 위한  기부금도 상당액에 달할 터였습니다. 신중한 고려
를 거쳐 교회는 이 돈을 지역 헤비타트 사업이 구체화되는 대로 헤비타트에 기탁하
기로  했습니다. 헤비타트  지회를  구성하는 일에는  다른  교회들도 초청해  동참      
하도록 했습니다. 탤러하스의  헤비타트 운동이 윤곽이 잡혔을 때쯤, 제일장로교회
에서 제공한 건축 시작 자금은 무려 90,000달러에 달했습니다!
조직의 형태를 잡은 지 일곱  달, 플로리다 주로부터 인가를 받은 지 넉달 만에 탤
러하스 헤비타트는 이제 제일장로교회에서 약속한 자금으로 건설을 시작할 때가 되
었다고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꼭 필요치 않은  곳에 돈을 뿌리고 싶지는  않았습니
다. 탤러하스 재단(주택보수를 맡는 단체)을 이끄는 미셸 아케인절리는 헤비타트에 
호의적인 친구로서, 우리를 탤러하스 시 지역개발부에 소개해 주었습니다.
미셸은 이 부서가 비슷한 사업에 착수했지만 4%의 이자를 받으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세 군데의  부지를 사들여 곧 철거당할 집 세 채를 그 곳
에 옮겨놓고 있었지요. 우리는 곧  그 부지의 집을 개축하고 신축해 6세대가 살 수 
있는 집을 짓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시 당국은 이 생각을 마음에 들어했고, 우리는 
단 1달러로 최초의 여섯 가구를 위한 부지를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더 많은 돈을  직접 건축자재를 구입하는 데 쓰기 위해서, 헤비타트에 호의
적인 세무사에게 자문을 구해  혹시 주에서 부과하는 세금을면제받을 수 있는 방법
이 있는지 알아 보았습니다 .그 세무사는 우리 시가 주청사 소재지니 이런 일을 관
장하는 주 공무원을 찾아가 보라며 이름을 가르쳐 주더군요. 공무원은 친절하고 호
의적이었지만, 우리가 자격이 되는지  모르겠다며 서류작업만 적어도 석 달이 걸릴 
거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부지런한  회계 론 쉐퍼는 그래도 한 번 해볼만 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신속하게 서류를 작성해서, 우송하는 대신 직접 찾아가 제출하
기로 했습니다. 
주청사 건물로 가는 길에 론은 그만 담당자의 이름과 서류를 제출할 사무실을 잊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로비에서 기나긴 사무실  안내문을 살펴보던 론은  헤비타트의 
동역자인 베베 블라운트의 이름을 발견했지요. 베베의 부서는 론이 찾는 부서와 달
랐지만, 그래도 혹시 베베의 사무실  전화를 쓸 수 있는 지를 알아보고, 어디로 가
서 누구를 만나야 할지  물어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베베는 그 부서의 
책임자와 잘 아는 사이였습니다.  베베는 직접 론을 데리고 가서 그 사람을 소개시
켜 주었지요. 그는 자신이 도울  길이 있을 거라 고 말했습니다. 20분쯤이 지난 뒤
에, 론은 세금면제증명서를 손에 들고 유유히 건물을 나설 수 있었습니다. 
론은 즉시 제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평소에는 영적인 문제에 아주 합리적인 태도로 
일관하던 사람이었지만,  그 날 아침만큼은 아주  흥분해 있었습니다. 무언가  아주 
색다른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이것은 아주 색다른 일이다. 믿음을 가지고 나아갈 때는 주님의 인도에 보
조를 맞추어 달려갈 준비를 하는 것이 좋다. 그렇게 그 길을 따라가다 보면 하나님
이 일으키시는 사건들이 결코 우연히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
다. 

'그외 정보 > 헤비타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상의 양심이 되어  (0) 2020.09.20
감사합니다, 예수님!  (0) 2020.09.20
기도와 실천의 날  (0) 2020.09.20
'적절한 기술'을 개발한다  (0) 2020.09.20
이런, 미친 생각이 효과 있잖아!  (0) 2020.09.2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