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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외 정보/헤비타트

감사합니다, 예수님!

by FraisGout 2020. 9. 20.

  헤비타트 사업장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가슴벅찬  경험은 한 가족이 새  집으로 
이사오는 것을 보는 일이다. 아마도 나는 이런 잊지 못할 순간을 그 누구보다 많이 
체험한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헤비타트에 취해' 새삼스러운 열
정과 강력한 의지로 재무장하고  빈민주택의 문제를 정복하기 위해 다시 일을 시작
하곤 한다. 
생전 처음 집다운  집을 장만하게 되었을 때  가난한 가족들이 느끼는 감격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다.
1981년 7월, 신디와 애런  미들브룩스 부부와 세 아이들은 미주리주 캔사스 시티의 
첫 번째 헤비타트 집에 입주했다. 
저는 집을 구하느라 사방팔방을 헤맸지요. 우리 아파트에서는 세 아이들이 전부 한
방에서 자야만 했으니까요. 우리는 우리 가족이 살 수 있을 만한 집을 갖고 싶었답
니다! 어머니는 제가 늘 갖고 싶던 집 근처의 아파트를 사는 데 실패했을 때 "하나
님께서 네게 더 좋은 것을 예비해 두셨다"고 하셨지요. 그러나 별로 가망이 없었습
니다. 그래도 저는 기도를 계속했지요.
어느 날 헤비타트의 간판을 보고, 그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지요. 전화를 받은 여
자분이 대기자 목록이 아주  길지만 그래도 신청서를 보내주겠다고 하시더군요. 저
는 속으로 '우리는 집을 살 수 없을 거야. 별로 돈이 없으니까. 집을 살 만큼 저금
을 할 수가 없는 걸'하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저는 하늘을 올려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신청서를 받아서 서류를 작성해 제출했습니다. 석 달이 지나도록 아무 소식
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전화를  한 통 받았습니다. 그때 저는 도시 전체를 빨강, 초
록, 파랑, 노랑으로 색칠하고  싶은 심정이었어요. 어찌나 흥분했는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지요. 헤비타트에서 전화를  걸어서 조건이 좋은 것 같다며, 한번 찬아와 
상담을 하자고 했던 겁ㄴ다  .저는 달려가 친구들을 붙잡고 이야기를 했지요. 어머
니께도 전화를  드렸습니다. 직장동료들에게도 전화했구요.  모두들 격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 날 밤 헤비타트 분들이 찾아왔는데, 남편의 귀가가 늦었습니다. 일이 다 틀어져
버릴 것만 같았지요. 그러나 상담이 끝날 무렵 맥기 목사님께서 "원하는 집의 설계
도면을 고르시지요"하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새 집으로 이사했을 때 저는 임신 8개월이었어요. 그 날 밤에 저는 울고 싶었어요. 
이제야 진짜 우리의 재산을  갖게 된 것입니다! 집은 아름다웠습니다. 창문은 활짝 
열려 있었죠.  아직 커튼을 달지 않아서,  창문에는 그냥 천이 둘러쳐져  있었지만, 
그래도 이 집은 우리 것이었지요.꼭 첫째 아이를 낳았을 때 같은 느낌이었어요. 말
로 표현할 수 는 없지만, 평생 결코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지요. 
미들브룩스 가족이 집을 마련한  지 5년이 지났지만, 그때의 기쁨은 아직도 생생하
기만 하다. 캔사스 시티의 복잡한 길가에서 빛나는 이 깜끔한 집은 이 길을 지나는 
방문객들에게 훌륭한 간증 역할을  하고 있다. 애론과 신디는 새로운 입주자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아끼지 않는 성실한 헤비타트의 자원봉사자들이다. 미들브룩스 가족
들도 헤비타트의 비전에 사로잡힌 것이다. 
1984년 봄 우리는 아메리쿠스에서  다이앤 엘리스를 위한 집을 헌정했다. 다이앤과 
그녀의 가족이 살던 판잣집은 칠도 안 되어 있고, 단열재도 없었으며, 다이앤의 말
로는 겨울이  되면 오히려 몸을 녹이려고  밖으로나가야 할 정도의 집이었다.  물을 
쓸 수 있는 수도꼭지가 뒷문 근처에 딱 하나 있었다. 
헤비타트 사람들과 다이앤의 친구들과 이웃들이 헌정식을 위해 그녀의 집 앞마당에 
모였다. 다이앤은 앞으로 나와서 마이크를 잡았다. 
"새 집을 보는 제 기분이 어떨까 모두들 궁금하시리라 믿습니다."
다이앤은 조용히 말했다. 
"제사 말씀드리죠."
그녀는 갑자기 한 발짝  뒤로 물러나서 위아래로 팔짝팔작 뛰기 시작했다. "야호!"
라고 소리치면서.
"야호! 야호! 이야호!"
다이앤의 두 팔이 멋대로 흔들렸고, 다이앤은 계속 소리를 질렀다.
"이야호! 야호!"
마침내 외침이 멎었을 때, 장내의 모든 사람들은 허리를 잡고 웃어대고 있었다. 
잠시 쉬었다가, 다이앤은 더 격력하게 뛰기 시작했다. 소리도 더 크게 질렀다. 
"야호! 야호! 야호!"
다이앤이 세 번째  뛰기를 멈추었을 때, 그녀는  녹초가 되어 있었다. 마당에  모인 
사람들은 울ㅇ을 터뜨리기 시작  했고, 우리는 몇분이 지난 뒤에야 식순을 다시 진
행할 수 있었다. 그것은 강력하면서도 불가사의한 경험이었다. 
가족들이 새로운 집에  대해 그토록 격한 감정을  느끼는 것은 단순히 옛날에  살던 
집이 비좁았다거나  살기에 불편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들은 헤비타트의  사람들 
때문에 알게 된 사랑과 배려의 마음에 감동하는 것이다. 
로니와 셀마 슬레이븐 부부가  헤비타트를 알게 되었을 당시, 이들이 살던 집은 포
장되지 않은 길가에 있는  12평방피트 넓이의 통나무집이었다. 집이 위치한 분지는 
가파른 산으로 둘러싸여 황량한 아름다움을 풍기는 곳이었다. 셀마는 난방배관시설
도 없이 한살에서 열세  살에 이르는 여섯 아이들을 키우고 있었다. 이웃집에서 끌
어온 전선 한 줄이 창문을 통해 들어와 전구 한 알과 낡은 냉장고에 전원을 공급했
다. 통나무들 사이의 틈새는 고르지 못해서, 낡은 천과 마분지로 벌어진 틈을 막아
야 했다. 아이들이 전부 침대  하나에 뭉쳐 잤지만, 항상 담요를 걷어차곤 했던 막
내는 거의 얼어죽을 뻔했다. 
로니 슬레이븐은 근처의 공장에서  오후 3시 30분부터 한밤중까지 일했다. 그는 보
험이나 수당도  없이 일주일에 125달러를 벌었다.  그러나 아무튼 일자리가  있다는 
것만도 고밥게 생각해야 할 형편이었다. 
이 가족은 한 달에  371달러의 식량카드 배당을 받았지만, 이것으로는 생필품을 겨
우 살 수 있을  정도였다. 가끔씩 셀마는 아이들에게 사탕이나 소다를 사다주곤 했
지만, 흔한 일은 아니었다. 
1985년 11월 2일, 애팔래치아  헤비타트 지회는 슬레이븐 가족의 새 집을 헌정하기 
위한 집회를 가졌다. 방 네  칸에 단단하게 단열처리가 된 골조를 갖춘 이 집은 무
려 6개 주에서 몰려온 자원봉사자들과 수련회 참가자들의 손으로 지어졌는데, 넓이
가 무려 820평방피느에 달했다. 공사비를 맞추기 위해 온수배관시설은 하지 않았지
만, 부엌에는 싱크대와 조리대가  있었고 목욕탕으로 쓸 만한 방도 있었다. 언젠가
는 이 방이  목욕탕이 될 날이 올것이다.  선불 250달러를 부담한 슬레이ㅂ  가족은 
한동안 매월 25달러의 상환금을 18년 동안 지불해야 한다. 
"오랫동안 기다린 끝에 아이들은 따뜻한 곳에서 잠을 자게 되었습니다. 이 집은 촛
불로도 난방이 될 것 같군요. 그리고 밤에 비가 새는 일도 더는 없겠죠. 집을 가지
게 되다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어요!"
셀마의 소감이었다. 
존세계에 새로운 헤비타트 집이  한 채씩 지어져 헌정식을 가질 때마다, 새로운 입
주자는 성경을 선물로 받고,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들은 한 마음으로 주님을 찬
양한다. 이 감사의  의식은 그날 하루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가끔씩  테네시 
주 멤피스의 첫 헤비타트 집으로 입주한 사바나 시몬즈의 말을 생각하곤 한다. 
"저는 매일 아침 일어나 큰  방에서 기도를 시작하는데, 그때마다 이 집을 주신 하
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는 방을 하나씩 돌아보며, 다시금 내 집을 주
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요."
가끔씩 사람들은 헌정식장에서 북받치는  감정을 이기지 못해 아무 말도 못할 때가 
있다. 1983년 부활절 전날,  우리는 아메리쿠스에 지어진 줄리아 배틀의 새 집에서 
모였다. 남편과 사별한 줄리아는 두 아이와 96세 된 노조모를 모시고, 보기에도 흉
측한 헛간에서 살고 있었다. 우리는  그 헛간 바로 앞에 새 집을 지어주었다. 헌정
식을 한 뒤 며칠 후, 낡은 판잣집은 헐렸고 줄릴아는 그 자리에 정원을 가꾸었다. 
헌정식이 진행되는 동안, 줄리아는 앞으로 나와서 마이크를 잡았다. 그러나 그녀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몇  분간 마음을 진정하려고 애써 보았지만 허사였다. 마
침내 그녀는 자리에 도로  주저앉고 말았다. 헌정식이 끝날 때까지 줄리아는 한 마
디도 하지 않았지만, 그  곳에 참석하는 행운을 누렸던 이들에게 자신의 감정을 그 
어떤 말보다 더 생생하게 전달했다.

플로리다 주 펜사콜라의  헤비타트 사업장에서 자원봉사자들이 페니 하이드의 가족
들을 위한 개보수공사를 끝냈을  때, 페니 하이드는 그 벅찬 감사의 마음을 감동적
인 한 통의 편지로 전했다.
친애하는 헤비타트 여러분,
저는 연설문을  작성하거나 편지를 쓰는 데엔  재주가 별로 없어서, 그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로만 말할 뿐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엔 저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만, 저 역시 어린 자
식일 둘 딸린 홀어미로 기댈  곳 없이 살았습니다. 지난 2년간, 제 삶은 영적인 영
양실조 상태에 있었지요. 제  삶에는 '죽음'의 느낌이 들어와 있었고, 우리는 그저 
목숨을 부지하기만도  바빴습니다. 우리집에는 바로  이 죽음이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었습니다. 기술도,  돈도 없는 저로서는 집을  건강하고 행복한 보금자리로  가꿀 
길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가 건네준  안내문에서 저는 헤비타트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날 이
후로, 우리의 삶은 변했습니다. 
면접을 거쳐 합격한 뒤부터 변화는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우리 집에는 자물쇠가 달
린 현과이 있고, 깨진 유리창이 있던 곳에는 추위를 막아줄 유리가 있습니다. 지붕
도 고쳤고, 집 안에도 문이 있습니다. 먼지로 뒤덮였던 벽에는 기부 받은 페인트가 
칠해져 있고,  바닥에는 역시 기부받은 아름다운  깔개가 깔려 있으며,  수도꼭지를 
틀면 깨끗하게 목욕을  할 수 있고, 겨울 내내  고장난 채로 버려져 있던 파이프도 
고쳤습니다. 손으로  만든 수납장으로 우리 부엌은  훨씬 더 좋아졌습니다.  이것은 
여러분께서 해주신 수많은 일들 중 아주 적은 부분일 뿐입니다.
여러분이 사랑으로 내주신 시간과  배려의 마음이 우리 가족을 다시 뭉치게 해주었
습니다. 헤비타트는 저희 가슴  속에 다시금 존재의 목적을 심어 주었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거듭, 거듭, 또 거듭해서 감사를 드립니다. 저 또한 기꺼이 여러분과 함께 다른 사
람들을 도와 제 '사랑의  봉사'를 바치겠습니다. 여러분께서 저희 가족들에게 소망
과 사랑을 심어 주셨듯이 말입니다. 
1985년 1월의 어느 눈오는 날,  나는 박스 엘더 헤비타트 사람들이 첫 집을 헌정하
는 현장에서 함께 기뻐하고 있었다. 레이와 잔미드 부부와 세 아이들은 3년간 참을
성 있게 기다린 끝에 몇 주 전 이사를 끝냈다. 
레이는 지독한 최행성관절염을 앓고 있었고, 내장도 대부분 수술 로 들어낸 상태였
다. 항상 추위를 느껴 셔츠를 몇 개씩이나 껴입고도 조끼를 덧입어야 했다. 매일매
일야위고 한층  더 허리가 굽어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헤비타트가 좋은  가격으로 
사들인 부지고아고를  신문에서 발견한 그 순간,  레이는 원기를 회복했다.  너무나 
바빠서 조끼조차 입을 필요가  없을 때도 있었다. 그는 현장에 하루도 거르지 않고 
출근해서, 일꾼들에게 집에서  만든 바나나빵과 커피를 날라주었고, 자신의 픽업트
럭을 몰고 물품들을 실어 날랐다. 레이와 잔과 아이들은 터에 돌을 고를 때부터 마
무리 칠을 하고 카펫을 깔 때까지 모든 과정을 거들었다. 
집의 헌정식을 할  무렵에, 레이는 체중도 많이  불어 있었고 허리도 곧게  퍼졌다. 
미드 교구성당의 사제인 댄 찰튼 신부가 공식적인 축사를 하자 레이가 짤막하게 답
사를했다. 나지막한 목소리였지만, 얼굴은 발갛게 상기되어 빛나고 있었다. 
식이 끝난 뒤 간단한  다과회가 열렸다. 사람들은 자그마한 집 안에 어ㄲ를 맞대고 
서 있었다. 잠시 후, 어떤 연세 지긋하신 분이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내 쪽으로 걸
어왔다. 그는 가까스로 내 앞에 자리를 잡고는, 내 손을 잡고 힘을 꽉 주었다. 
"내가 잔의 애비요."
그는 뭔가  더 말하고 싶어했지만, 북받치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흐느끼기  시작했
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내  손을 그렇게 잡고 놓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이 더 있
지만, 마음을 추스릴 수 없는  표시가 역력했다. 마침내 그는 내 손을 놓더니 그냥 
가벼렸다. 그가  한 말은 "내가 잔의  애비요"라는 한마디가 전부였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미드 가족의 상환금은 예전에 살던 허술한 판잣집의 임대료보다 훨씬 저렴했다. 레
이는 상환금을 내는 일이 정말로 기뻤다고 한다.
레이와 잔은  박스 엘더 헤비타트의  가정선정위원회와 가정지원위원회에서  봉사를 
하며, 후에 입주한 네 가족과 자신의 체험담을 나무면서 사려 깊은 도움을 주었다. 
미드 가족은 헤비타트 바자회가  열릴 때마다 어김없이 빵과 수공예품을 기부했고, 
주님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상환금에 대한 십일조를 헌금으로 냈다. 미드 가족 역
시 비전에 사로잡힌 것이다. 
갑작스럽게 격려와 소망을 찾은  입주자의 건강이 극적으로 좋아지는 일은 흔히 볼 
수 있다. 1985년에 나는 헤비타트 동역자인 노스캐롤라이 주 트라이언의 프랭크 배
슬러에게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새로운 헤비타트 집에 살고  있는 그웬돌린 밀러를 보고 있으면 행동하는 하나님의 
사랑인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가  새삼 깨닫게 됩니다. 몇 살은 더 젊어진 것 같
고, 안색도 좋아졌습니다. 열여섯  달 전, 하루종일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면서 
자기 집이 다 지어질 때까지 살 수나 있을까 걱정하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새 집이 
어떠냐고 물어봤더니, 그는 숨도 쉬지 않고 말하더군요.
"저는 헤비타트를  사랑해요! 저는 복 받았어요!  오, 주님 감사합니다! 이젠  비도 
새지 않아요! 오래 전에 헤비타트가 생겼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프랭크 배슬러의 편지를 받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인디애나주 파라이에트에서 
헤비타트 사업을 조직하는 일을 거들었던 퍼듀대학의 정력적인 표수 밥 윗포드로부
터 또 한 통의 편지가 날아들었다. 그는 들뜬 어조로 사업을 진척시켜 주었던 수많
은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슴벅찬 일은 바로 
헤비타트의 동역관계였다.  
어떤 면에서 보면, 우리는 바로 눈앞에서 구원을 목격하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 첫 
입주자 가족(슬하에 3명의 10대 아들을 둔 홀어머니)의 변화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엄마인 제니는  새사람 같습니다. 더  밝아졌고 퇘활해졌고 옷매무새나  걸음걸이에 
자신감이 넘칩니다. 이젠 파이프가 얼었다고 4마일이나 걸어가서 물을 길어올 필요
도 없고, 다 쓰러져가는 농장의  방 두칸에 몸을 웅크리고 잘 필요도 없습니다. 10
대인 세 아들도 행동거지가 아주 달라졌습니다. 맏이인 토미는 방과 후에 설계선생
님과 함께  직접 집의 설계도를 그렸습니다.  학교공부에 관심이 거의 없던  아이가 
말이지요. 가족이 모두 현장에  나와 일을 하는데, 이들의 열심은 다른 자원봉사자
들에게도 큰 감화를 줍니다. 
혹시 내가 지금, 기금부족이나 자우너봉사자의 부족, 산더미처럼 쌓이는 공문서 더
미와 기타 장애물들을  뚫고 마침내 헤비타트 가족이  입주를 하게 되면 그  후에는 
모두들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게 된다는 인상을 풍기고 있다면, 그것은 별로 정
직하지 못한 일이 될 것이다.  사실 우리가 집을 한 채 짓는다고 해서 그걸로 모든 
일이 끝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모든 헤비타트 단체가 해야 하는  후속작업 중 가장 중요한 일은 당연히 매달 상환
금을 받는 일이다. 상환금이  들어오지 않으면 전체 시스템이 무너져 내리고 만다. 
따라서 몇몇  현장에서는 입주자들이 충실히 상환금을  내도록 하기 위해서  기발한 
방법들이 동원 되기도 한다.
케냐에서는 스물 한 번째 헤비타트 집 앞에 거대한 간판이 나붙었다.
이 집은 전적으로 월부 상환금에 의존해 건축되고 있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 이 지역의  사람들은 상환금이 들어오지 않으면 이 집의 공사가 중
단된다는 사실을 똑똑히 깨닫게 되었다. 
수많은 가족들이  상환금을 떼먹는 사례가  빈발했던 아이티에서, 자원봉사자  아트 
러셀은 집회를 소집해 기금부족으로 사업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로부터 한두 
달 뒤, 자기집이 지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던 가족들이 압력을 넣는 바람에 다른 이
들도 다시 예정대로 상환금을 내기 시작했고 공사도 재개되었다.
자이레의 음반다카에서도 헤비타트  위원회는 효과적인 수금방법을 하나 찾아냈다. 
상환금을 상습적으로  연체하는 입주자들의 명단을  지역 라디오  방송에서공개했던 
것이다!
물론 정기적인  상환금을 제대로 수금하는 최선의  방법은 교육을 통해  헤비타트의 
철학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헤비타트 가족들은 집을 소유한다는 사실에 수반되는 
복잡한 요구들을 체험해본 적이 없다. 이러한 변화를 쉽게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
-또한 정부주택보급사업의 경우  빈발하는 비슷한 문제를 막기 위해-모든 헤비타트 
사업에는 새로 집을 갖게 도니 입주자들과 지속적으로 일하는 위원회가 있다. 현지 
사업의 각 부문 대표들로 구성도니 이 단체는 각각의 가족들과 강한 개인적 유대관
계를 맺고 필요한 만큼 최대한 오랜 세월 도안 함께 일한다. 
시카고 헤비타트 위원회는  회의를 거듭하고, 가정방문을 하고, 워크샵을 개최하고 
수없이 기도한 결과 당면한  여러가지 심각한 문제들을 그럭저럭 해결하는 동시에, 
가족들이 성공적으로 집주인역할을  하도록 돕는 효과적인 프로그램을 개발해냈다. 
시카고 헤비타트는 세 부문을 특히 강조했다. 
1. 재정관리
헤비타트는 입주 가족의 재정관리를  떠맡어르 수는 없지만, 전반적인 예산관리 원
칙은 제공할 수 있다. 새로 집주인이 된 사람들은 복잡한 서류작업과 청구서, 보험
과 재산세 등 예기치 못한 부담 속에서 헤매게 되므로 도움이 필요하다.
2. 대인관계
헤비타트는 입주자들이 함께 살며, 갈등을 해결하고, 한 건물을 공동소유하는 법을 
배우도록 도울 수 있다.
3. 집주인의 역할 
자기 집을 가져보  못한 사람들은 흔히 나무 한  그루 심지 못하고, 저우언도 가꿀 
줄 모르며, 물이 새는 파이프를 고칠 줄도 모르며, 충문틈을 바를 줄도 모른다. 이
제 그들은 집을 유지보수하는 일을 배울 수 있다. 그리고 도움을 청하고 자문을 구
하는 일이 점차 줄어들면서 이제는 혼자서도 할 수 있다는 자긍심을 얻게 된다.
동역관계가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기까지는 양측 모두  수년에 걸친 노력이  필요하
다. 그러나 일단 성공하고  나면 이번에는 지을 얻은 가족 쪽에서 상환금을 꼬박꼬
박 내고 시간과 기술과 돈을 기부해 줌으로써 다시금 어려운 가족들에게 이 가슴벅
찬 새 집을 마련해주는데 뜻깊은 역할ㅇ르 할 수 있게 된다.
새 집이라는 것은 서방세계에  사는 우리 대다수에게는 그저 하나의 튼튼한 중산층 
구조물에서 또 다른 견고한  건물-아마도 다른 장소에 위치한 더 호화스러운 건물-
로 옮겨가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러나 온 세상의 헤비타트 가족들에게, 새 집은 
훨씬 더 많은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추위와  비바람과 해충으로부터 마침내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또 
그것은 임대료가 갑자기 올라서 느닷없이  이사 할 필요가 더 이상 없다는 것을 뜻
한다. 그리고 아이들이 올해 다니던 학교를 내년에도 다닐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더불어 그것은 언젠가 한 입주자가 감격하며 말한 것처럼"자기가 어디 사는지 친구
들이 알게 될까봐 아이들이  노심초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무
엇보다도 그것은 희망을 뜻한다.
1969년 코이노니아 동지회가 처음으로 지었던 집은 보와 에마 존슨의 집이었다. 그
들 가족은 코이노니아와 길  하나를 사이에 둔 판잣집에서 살았다. 다 드러난 전선
줄에 전구 몇  알이 달려 있었다. 소작농이었던 보는  학교 문턱에 가본 적도 없었
다. 에마는 10학년(고등하교 1학년)까지 다닌 것이 끝이었다.
그들 가족을 위해 6,000달러의 비용으로 견고한 콘크리트 벽돌집이 지어졌다. 아주 
소박한 집이었지만, 그래도 옛날 판잣집에 비하면 궁궐 같았다. 
 보와 에마는 아들  주니어의 생일인 1969년 11월  11일에 이사를 했는데, 딸  매티 
펄은 당시 열 살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그 애를 '쿠키'라고 불렀다. 쿠키는 총명하
고 열의가  있었으며 고등학교를 마치겠다는 결심을  단단히 하고 있었다. 그  애가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때, 나는 미시시피 투갈루 칼리지에 장학금을 주선했다. 
새 집으로 이사한 지 정확히 15년 뒤, 쿠키가 아메리쿠스의 내 사무실에 나타났다. 
그녀는 얼굴에 미소를 가득 띠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맞춰보세요, 밀라드 아저씨."
"뭐지, 쿠키?"
"드디어 법대를 졸업했어요!"
쿠키는 지금 워싱턴D.C.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그녀는 코이노니아 동지회 이
사회에서 일하기도 했다. 여동생 샐리는 조지아 주 메이콘의 머서 대학을 졸업하고 
워싱턴 D.C.에서 심리학자로 일하고  있다. 그리고 또 다른 동생은 자격증을 딴 정
식 간호사이다.  이 오랜 세우러 동안  헤비타트 기금에 충실히 상환금을  납부해온 
보와 에마는 가족들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그리고 이들의 집 역시 밝고 아름
다워서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헤비타트와 함께  해온 오랜 세월을 통틀어  보아도, 뒤 애니 월포드만큼  가슴저린 
반응을 보인 이는 한 사람도 없었다.
1980년 3월 나는 당시 조지아 주 플레인즈에서 신문편집장을 맡고 있던 메리 루 브
라운을 대동하고, 아메리쿠스 퀸시  앨리 1105번지의 판잣집에 사는 애니를 방문했
다. 애니의 남편은  가출한 지 벌서 몇년째였다.  천장과 마루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집에는 물도, 목욕탕도, 별도의 배변시설도 없었다. 벽난로 하나가 유일한 난
방시설이었다.
"비가 오면 있을 데가 없어요."
애니는 무심하게 말했다. 
"바깥에서 바람이  불면 사방에서 옷이며 물건들이  날아 다니지요. 전엔  벽난로가 
두 개였지만 굴뚝 하나가 무너져 내렸어요. 추우면 퀼트 담요를 덮고 한데 뭉쳐 앉
아 있지요."
애니는 바로 얼마 전  헤비타트 자원봉사자들이 그녀에게 새 집을 지어주기로 했다
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금 집이 있는 땅에 새 건물을 짓고, 현재의 판잣집은 철
거해서 유일하게 쓸모있는 일, 즉 새집을 따뜻하게 만들 땔감으로 쓰기로 했다.
"우리 집에 목욕탕과 부엌이 생긴대요. 진짜 물이 나온대요!"
애니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 말을 몇 번이나 되뇌었다. 
애니가 다섯 살에서 열한 살에 걸친 다섯 아들들을 키우려고 고군분투했던 이 몰골
사나운 판잣집을 나서면서, 메리 루 브라운은 흐느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애니는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고  그 신문에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는 1980년 4월 4일자 신문에 게재되었다. 나는 그 편지를 결코 잊지 못할 것이
다. 
친애하는 예수님,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제 영혼을 구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께서는 예
전의 사악한 저를 고쳐  놓으셨습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저를 잡아주시고 인도
해 주니시 감사합니다.
가끔은 저와 제 자식들이 한  끼니를 또 어떻게 때울까 걱정이 되어 잠이 안 올 때
도 있었습니다. 예수님, 우리에게 길을 열어주시니 감사합니다. 목사님께서는 당신 
집에 오라고 불러 주셨지만,  목사님께도 돌보아야 할 가족이 있음을 저는 잘 알고 
있었지요.
예수님, 애들 아빠가 돌보지 않는 제 아이들에게 아버지가 되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아이들 아버지는 무엇 하나 해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요 어
머니로 항상 곁에 계셨습니다.  예수님, 당신의 사람들을 보내서 저희에게 새 집의 
축복을 내려주시니 감사합니다. 이것은 오직 당신께서 하신일임을 잘 압니다. 헤비
타트를 보내주셔서 정말 갑사합니다…
이 편지를 귀하의 신문에  실어주시겠습니까? 나를 미쳤다고 생각할 사람들도 있으
리라는 걸 잘 압니다. 하지만 저는 예수님께 미쳤답니다. 감사합니다, 예수님.
애니, 감사할 사람은 우리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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