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통조림을 사먹는다는 것은 김치라는 결과만을 얻는 것이요. 풋김치가
시시각각 익어가는 각기 다른 과정의 맛을 생략한 것이 된다.
깡통 속에 흙과 비료와 꽃씨를 섞어 담은 통조림꽃이 백화점이나 슈퍼마켓에서 잘
팔린다는 말을 들었다. 그 통조림 뚜껑을 따 물만 부으면 즉석꽃이 피어난다. 지금
식탁 복판에 그 통조림 인스턴트 팬지가 놓여 있다. 자동 전기밥솥이 지은 즉석밥,
즉석 된장국, 통조림 김치가 차례로 나온다. 이어 슈퍼마켓에서 산 즉석 매운탕이
올라온다. 냉동 포장된 생선 토막, 무, 우거지, 간장, 고추장 등 조미료에 물만 부어
끓인 즉석탕이다.
밥먹으면서 원격 조정으로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아들놈이 번거롭게 숟가락질이나
젓가락질 하지 않고도 밥을 먹을 수 없을까 하고 짜증을 낸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게 됐다. 왜냐하면 머지않아 전자 숟가락이 나와 원격 조정을 하면 먹고
싶은 된장, 매운탕을 떠먹여 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는 갱년기에 들어 눈이 나빠진 한 친구가 한 안경알로 원시, 근시,
난시가 조절되는 이색적인 안경을 무척 자랑하는 것을 보았다.
아마 머지않아 그 안경에 이슬을 닦는 스위퍼가 달리고 예쁜 여인이 비치면
자동으로 윙크를 하게 하는 원격 조절 장치가 달릴 것이며 빚장이를 만나면 검은
안경으로 돌변해 버리는 그런 다목적 안경이 등장하게 될 듯하다.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온통 편리할수록 선이라는 논리가 너무나 각박하게
지배하고 있음을 본다. 그리하여 뭣인가 새롭고 신기하고 이상한 것이 나오기만
하면 키 위에 콩알 쏠리듯이 뒤질세라 달려 붙는다.
달리지 않는 살빼기 자전거가 나왔다면 몰려가 사놓고 보고, 목욕물이 욕조에
차면 삐이 소리가, 욕조물이 알맞은 온도에 이르면 빼이 소리가 나는 계기가
나왔다면 그에 달려붙는다.
이같은 즉석 반응형 인간이 우리 주변에 날로 늘어가고 있고 이 늘어나는 새
인구층에 부응하여 즉석 상품 개발이 날로 왕성해져 가고 있다.
꽃을 집 안에 피우게 한다 할 때 피어난 결과로서의 꽃만이 아니라 그 꽃을
피우게 하는 과정의 맛을 생략한 것이 된다.
또 물만 넣어 끓이는 즉석 매운탕은 매운탕이라는 결과만을 먹는 것이요, 내 구미
내 개성에 맞게끔 고추장을 더 풀고 덜 풀며, 어떤 양념을 더 넣고 덜 넣는 과정의
묘미를 상실한 것이 된다.
과정을 중요시하는 문화권에서는 통조림이나 인스턴트 식품같이 과정이 무시된
식품은 전혀 인기가 없거나 먹더라도 하급 식품으로 점잖은 사람이 먹을 식품이 못
된 것으로 인식돼 있음은 이 과정주의의 정신 체질 때문일 것이다. 이에 비해
결과만이 선이요, 그 결과를 위한 과정은 짧고 간단하고 없을수록 좋다는 결과주의
사고는 미국, 일본, 한국에서 판친다.
그리하여 모든 인스턴트 식품이나 통조림 식품 등 한 번 쓰고 버리는 일회성
상품, 시계 달린 전등, 라이터 겸용의 만년필이니 하는 복합 상품이 발상되고 또
만들어지고 팔리는 결과주의 시장대를 이루고 있다.
10여 년 전 필자도 그 일원으로 참여했던 한국 히말라야 등반대가 츄렌히말 봉의
첫 등정에 성공했을 때 이탈리아, 일본 등 등반계에서는 속임수 등정이라 하여
물의를 일으킨 일이 있었다. 그 산에 도전했다가 실패한 체험이 있어 그 코스를 잘
알고 있는 그들인지라, 한국 등반대가 밝힌 그 짧은 일정에 도저히 등정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구체적인 코스별 소요 일정을 들어 제시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제시한 이유는 한국인의 강한 결과주의 의식에서 비롯된 과정,
극소화의 생리를 모른 데서 비롯되고 있음을 알 수가 있었다. 한 크레바스가
나타났을 때 과정을 중요시한 외국 등반대라면 안전을 위해 하루고 사흘이고 시간을
더 잡아 그 크레바스를 우회하여 진행을 한다. 한데 안전이라는 과정 보다 결과에
집념이 강한 한국인은 다소의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그 크레바스를 뛰어넘는다.
빙벽 위에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설괴가 엉켜 있다면 외국 등반대는 그 지름길
빙벽을 피해 닷새고 엿새고 보다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안전 코스로 우회하는 것이
상식이다. 나도 직접 곁에서 보았지만 한국 등반대원은 '몇만 년 떨어지지 않고 있던
저 눈덩이가 하필 내가 올라갈 때 떨어질 이유가 없다'는 논리로 그 위험한 지름길
빙벽에 도전하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이같이 우리 한국인은 막중한 위험을 부담하고서라도 과정을 결과 속에
희생시킨다는 결과주의 사고와 행동방식을 모르는 데서 비롯된 외국인의 오해였던
것이다.
출세나 돈벌이도 스텝 바이 스텝으로 과정을 밟아 상향하려 않고 세도에
붙는다든지 줄을 탄다든지 또는 한탕 한다든지 벼락부자를 노리는 과정 무시의
상향을 하려 하는 것도 이같은 즉석병의 개연성이랄 것이다.
과외공부에 시달렸던 무렵의 아들 놈이 어느 하루는 아버지를 찾아와 진지하게 또
어렵게 다음과 같이 묻는 것이었다.
"아빠는 책도 많이 읽고 해서 아는 것이 많지?"
"그렇다. 뭣이 알고 싶으냐."
"아빠...공부 간단히 하는 방법은 없어?"
한심한 놈이구나고 꿀밤을 주기도 했지만 결과주의 민족의 핏줄을 이어받은
놈으로서 당연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과정을 무시하고 결과만이 선이요, 편리한 것만이 선이라는 즉석병이 기하급수로
우리 사회를 침식해 든다는 것은 정말 세상 살맛나지 않게 하는 무서운 병폐가 아닐
수 없다.
이같은 결과주의를 극단적으로 몰아가면 이 세상 태어나서 결과는 죽을 것이
뻔하므로 그 힘들고 험난하며 이풍진 과정을 거친 필요없이 낳자마자 자살해
버린다는 논리도 성립될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한 친구로부터 '상 클로드'라는 상표의 쌈지 담배를
선물받은 일이 있다. 파이프 담배려니 하고 그 비닐 쌈지를 열어 보았더니 담배를
말아 피우게끔 잘라진 얇은 종이 상자가 들어 있었다. 담배를 구할 수 없었던 6.25
사변 직후 잎담배를 썰어서 콘사이스 종이를 찢어 말아 피웠던 바로 그 솜씨를
오랫만에 재연하고 보니 그립기도 하고 청승맞기도 했다.
그 친구의 말로는 프랑스에서는 이 말아 피우는 담배가 유행하고 있으며 특히
젊은 여인들이 루즈 묻은 입술의 침으로 붉게 물들여 만든 담배는 멋이요, 낭만이
되고 있다고 했다.
지금 패션의 발상지인 프랑스 사회의 멋이나 낭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편리하고 간편하고 안이할수록 값어치가 있다는 현대사회의 이 가치 기준에
조그마한 반란을, 그 말아 피우는 담배의 유행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작지만
엄청나게 큰 반란이 아닐 수 없다.
담배를 입에 물고 한모금 빨기만 하면 자동으로 불이 켜지는 그런 신개발 담배를
미국에서 피워 본 일이 있다.
가급적 움직이지 않고 기계나 전자가 대행해 줄수록 값어치가 있다는 가치체계가
지속되어 나간다면 아마 담배 빠는 것까지도 대행해 주는 전자 장치가 마구에
나타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람이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고 고민하다가
자살하는 사람이 병들어 죽는 사람보다 많아질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이
'상클로드'의 반란을 새로운 사회 현상으로, 뜻깊은 것으로 보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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