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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외 정보/버릇

사진찍기 좋아하는 버릇

by Healing New 2020. 9. 26.

  해수욕장에서 종종 목격하는 일이지만 젊은 아가씨들이 아름다운 해수욕복을 
입고서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만 찍고 돌아갈 뿐 해수욕을 하지 않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서양 사람들이 나들이하는데 있어 카메라가 있으면 나쁘지는 않지만 필수의 
물건은 아니다. 우리 나라의 나들이에 있어 카메라는 필수적인 휴대물이 돼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미국의 해외 취업자들이 가장 먼저 사는 것이 자동차라는데, 
한국의 해외 취업자들이 가장 먼저 사는 것은 카메라라 한다. 그리하여 해외 
취업자들이 고국에 돌아올 때는 어깨에 x자로 가로세로 카메라며 녹음기류를 
주렁주렁 매달고 오는 광경은 적이 한국적이다.
  라디오에 버금갈 만큼 카메라의 보급률을 가진 나라도 일본과 한국정도라고 
들었다.
  카메라를 좋아하는 이 공통심리는 명소나 명승지에서의 왕성한 촬영 빈도에서도 
완연하다. 구경하러 명소에 간다기보다 사진 찍기 위해 간다 할 만큼 사진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곧 관광을 간다는 이 심리에 사진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구미 사람들이 5퍼센트를 차지한다면 한국 사람은 30__50퍼센트 이상 차지할지도 
모른다. 명소에 이르면 그 관찰한 대상이나 감상할 풍경을 보다 상세하게 진지하게 
보고 느끼려 하기 이전에 우선 도달한 그 목적지를 배경으로 하여 사진부터 찍는다. 
사진만 찍으면 목적의 거의를 완성한 것이 되기에 바삐 다른 대상 또 대상으로 
이동해 간다. 현장에 이르러서의 관찰이나 감상은 그 현장을 담은 사진 속에 수렴돼 
버린 것으로 여기기에 그다지 대단한 요소가 못 된다.
  곧 '선'을 버리고 '점'만 취하면 된다.
  여름 해수욕장에서 종종 목격하는 일이지만 일단의 젊은 아가씨들이 아름다운 
해수욕복을 마련해 입고서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만 찍고 돌아갈 뿐 물 속에 들어가 
해수욕을 하지 않는 경우를 이따금 볼 수 있다. 바다에 왔다는 결과가 사진을 찍는 
것으로 수렴되기에 이같은 이상한 해수욕이 저항없이 이뤄질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인은 어디를 가든 과정을 즐긴다기보다 사진으로 그 결과를 담아 오기 위한 
충동이 선행된다.
  내가 그 명소에 갔었다는 결과를 그 아름다운, 또는 유명한 결과를 '사유화'하려는 
심리작용의 소치이다.
  카메라라는 이기가 없었을 때도 우리 한국인에게는 이 관광 결과의 사유화 심리가 
왕성했었다.
  이를테면 풍광 좋은 계곡의 암석마다 새겨진 우리 선조들의 이름들이다. 예나 
지금이나 왕성하게 암석에 자신의 이름을 새긴다.
  바위에 이름을 새겨 둠으로써 이름을 영원히 남기고 싶은 이름(명)에의 
집착성향도 그 복합요인일 수 있으나 그보다 그 좋은 풍광에 자신의 이름을 
명기함으로써 그 관광결과를 '사유화'하려는 한국인의 심성에서 이름의 암각이 
보편화됐다고 본다. 더러는 낙서심리로도 이를 풀이해 볼 수 있으나 서양 사람들의 
왕성한 낙서심리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그들은 그림을 그리거나 무슨 글귀를 쓸 뿐 이름을 쓴다는 일은 희귀하다. 서양의 
낙서는 사람의 주체를 나타내지 않음으로써 '사'를 무화시킨다. 희랍 수니온 갑의 
폐허에 가면 희랍에 반했던 영국 시인 바이런이 남긴 낙서를 관광 안내인이 보여 
준다.
  그 낙서는 간단한 시구일 뿐 '바이런'이라는 이름이 없다. 누군가가 지적해 주지 
않으면 바이런의 낙서인지 여부를 모르는 몰사의 낙서인 것이다.
  예루살렘의 최후의 만찬을 베풀었다던 성지의 석벽에도 바이런의 낙서가 있는데 
그 역시 글귀일 뿐 이름이 없었다.
  미국 워싱턴 백악관 앞에 서 있는 워싱턴 탑을 안에서 오르다 보면 그 탑 내부의 
벽에 거기에 오르내린 숱한 사람들의 낙서를 볼 수 있다. 
  눈여겨 보면 한국 사람들의 낙서도 더러 볼 수 있는데 이름 석 자를 적고 있는데 
예외가 없다.
  곧 이 명소에 왔었다는 증명 심리뿐만 아니라 이 명소를 사유화하려는 한국인의 
통성발로가 구미의 명소까지 뻗어가고 있음을 보았다. 곧 결과주의의 국제화랄 
것이다.
  우리 옛 시가문화를 이해하는 한 방편으로도 이 한국인의 사유화 심성이 관건이 
되고 있다고 본다.
  옛 우리 선조들이 읊은 시가의 대부분이 자연이나 풍광에 야기된 정서를 시에 
동화시킴으로써 그것을 사유화한다. 그것이 시가라는 형태로 나의 것이 된다.
  그러기에 옛 문인은 들르는 명소 명승마다 시를 남겼다. 현대의 한국인이 들르는 
명소 명승마다 사진을 찍어 관광결과를 사유하듯이 시를 지어 관광결과를 
사유화했다.
  이를테면 전국을 방랑했던 저항시인 김시습은 관서 지방의 명소를 구경하면서 
곳곳마다 1백 46수의 시를 남겼고, 관동 지방에 놀면서 1백 35곳에 들러 1백 
35수의 시를, 호남에 놀면서 88수의 시를 남기고 있다. 비단 김시습뿐만 아니라 
송강 정철의 "관동 별곡", "성산별곡"이며 율곡 이이의 "구산별곡"이며 퇴계 이황의 
"도산십이곡"이며 이 명소마다 자신의 정서를 동화시킴으로써 사유화하고 있으며 이 
경관의 사유화는 한국 시가형성의 한 유형을 이루고 있다 할 것이다.
  곧 한국인에게는 사유화의 파토스가 유별나게 강하다.
  미국 대학교수들의 서재에 들를 때마다 느끼는 공통된 느낌으로 장서가 너무 
빈약하다는 사실이었다. 미국의 대학에 가 1__2년 있는 한국인 연구 교수들의 
책장이 그 본고장에서 10여 년씩 있는 현지 교수들의 책장이 그 본고장에서 
10여년씩 있는 현지 교수들의 책장보다는 대체로 풍부한 편이었다. 교수들 뿐만 
아니라 여느 지식층 가정에 들러봐도 한국의 지식층 가정에 비해 상대적으로 
장서량이 적다.
  그렇다고 미국의 교수들이나 지식층, 학생들이 한국의 교수나 지식층, 학생들보다 
책을 덜 읽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들이 갖고 있는 장서량은 상대적으로 적다 
할지라도 그들의 독서량은 상대적으로 크다. 얼핏 보기에 장서량과 독서량은 비례할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다. 그들은 주로 도서관이나 연구실의 장서를 이용하기 
때문이다. 곧 그들은 한국 사람처럼 장서를 사유화하지 않고 공유화한 것을 왕성히 
사용한다는 그런 동적인 생각으로 생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장서의 사유화는 
사장할 우려가 많지만 장서의 공유화는 지식흡수가 왕성하다. 비단 도서관 장서의 
이용이 아니더라도 미국 교수나 학생들은 필요한 서적을 사서 그것으로부터 지식을 
흡수하면 다시 팔아 버린다. 그러기에 미국 대학의 게시판이나 대학신문에는 
자기에게 필요 없는 서적판매광고나 필요로 하는 서적을 구한다는 광고가 굉장히 
많다. 더러는 다 보고난 책을 늘어 놓고 파는 학생도 있다.
  사유화의 파토스가 강한 한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광경이 아닐 수 없다. '한국의 
학자들 집은 집이 아니라 도서관이다.' 라고 한 서울에 사는 한 미국인 외교관의 
말을 따지고 보면 부러워하고 경탄하는 말이라기보다 사유화의 파토스가 미미한 
그들인 것을 감안하면 약간 비꼬는 저의가 담긴 말일 수도 있는 것이다.
  책에서 내용을 흡수한다는 것은 과정의 '선' 행위요, 일단 책을 갖추고 보는 것은 
결과부터 갖추어 놓는 '점' 행위로 이 장서의 차이도 결과주의로 귀착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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