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과는 과정 끝에 있는 '점'이요, 과정은 그 결과에 이르는 '선'이다. 가급적 선을
생략하거나 단축하거나 비약해서 점을 얻으려는 것이 결과주의다.
우리 한국인은 어떤 결과를 얻기 위해 너무 서두르는 버릇이 있다. 물론 결과를
얻기 위해 일을 한다는 데는 동서양이 다를 것이 없다. 그 결과를 얻는데 거쳐야 할
과정을 성실히 밟는 것을 과정주의라 하고, 그 결과에 너무 집착, 과정을 조금만
밟거나 날리거나 새치기하여 결과를 빨리 얻으려는 것을 결과주의라 한다면 한국
사람은 결과주의편에 속한다.
그래선지 우리 한국인은 무슨 일이든 빨리 할수록 미덕이요, 선이며, 가치를
이룬다. 잠을 빨리 자고, 빨리 일어나며, 심부름을 빨리 하고, 쇠뿔을 단김에 빼는
것은 모르나, 밥도 빨리 먹으라 하고, 공부도 빨리 하라 하며, 일도 빨리 하라고
한다. 빨리 하면 체하고 설치고 날리게 되는 일도 빨리 하라고 한다. 반대로
터키에서는 천천히 할수록 미덕이요, 선이요, 가치를 이룬다. 그래서 그들은
말끝마다 '수하힐리(천천히)! 수하힐리!' 한다. 우리에게 있어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는 것이 부덕이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오늘 하지 못하면 내일로 미루는 것이
미덕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우리 한국인의 식사 속도가 가장 빠르게 됐는지도 모른다.
프랑스 사람들의 저녁밥은 2__3시간이 상식이다.
그들은 식사를 한다고 그 과정을 즐기기 위해 그 과정을 최대한으로 연장시키고
연장시킨 그 과정을 농도짙게 즐긴다.
우리 한국 밥상은 아무리 찬이 걸더라도 할아버지, 할머니 아니고는 15분 안에
먹어 치운다. 그토록 빨리 먹지 못하도록 펄펄 끓여 놓은 설렁탕도 후후 불어가며
5분 안에 먹어 치운다. 짜장면이나 라면 따위는 1__2분 안에 먹어버린다.
이렇게 빨리 먹게 된 복합 이유 가운데 하나로서 한국인의 결과의식을 들 수
있다. 밥은 배고픔을 면하거나 배부르기 위해서 먹는다. 밥먹는 행위의 결과가
그것이요, 그 결과를 빨리 얻기 위해서는 가급적 밥먹는 과정을 단축시킬 필요가
있다. 유럽 사람들처럼 밥먹는 과정을 연장시켜 가며 즐기는 프로세스
엔조어(process enjoy) 따위는 의식구조상 개입할 여지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밥먹으면서 말한다는 것을 예의에 어긋나고 부덕시했으며, 엄마가 빨리 죽는다는
등의 금기를 붙여 놓기까지 했다. 술마시는 속도가 비상하세 빠른 이유 가운데
하나로서 우리 한국 사람이 프로세스 엔조이를 하는데 익숙하지 못하고 리설트
엔조이(result enjoy)를 하려는 의식구조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단위 시간 안에 퍼붓는 알코올 농도가 고밀도인 것은 술에 취한다는 결과에
집착하고 또 보다 빨리 그 결과를 얻기 위해 과정을 단축하려 할 때 일어나는
필연인 것이다.
서양 사람들은 때를 가리지 않고 술을 마시긴 하지만 술마시는 속도는 완만하다.
가급적 술마시는 시간을 연장, 은은히 취해 오르는 그 프로세스를 엔조이하려 한다.
그러기에 술집에 가서 몇 시간 앉아 있더라도 한두 잔이 고작이다. 미국의 대중적인
술집에서 한 잔씩 가져올 때마다 잔당 술값을 계산하는 것은 그렇게 계산하는 것이
그들 프로세스 엔조이 음주 방식에 합리적이고 또 편리하기 때문이다. 리설트
엔조이를 하는 우리 한국 사람에게는 이 미국 술집의 잔당 계산이 불편하고 짜증이
난다. 왜냐하면 홀짝홀짝 빨리 마시고 마시는 쪽쪽 술값을 치러야 하기에 술마시러
술집에 갔는지 술값 계산하러 술집에 갔는지 혼동할 지경이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대체로 5달러나 10달러는 아예 테이블에 내놓고 웨이터가 알아서
계산해 가라고 시켜놓고 불러 마시는 것이 한국인의 습관이 돼 있다.
또 외국 사람에 비해 술을 마시고는 술마신 티를 내려는 성향이 강한 것도 이
결과의식의 조치로 풀이해 볼 수가 있다. 바꿔 말하면 후다닥 마시고 젓가락짝을
때리거나, 읊어대거나, 울어버리거나, 통사정을 하거나, 싸우거나, 술상을 엎어
버리거나 하는 주정을 하려 들고 또 아예 주정을 하려고 술을 마시는 성향마저도
없지 않다. 그 때문에 주정에 대해서 이 세상에서 가장 관용한 나라가 됐는지도
모른다.
은은히 취해 오르는 과정을 연장시켜 가며 즐기러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취한다는 결과를 얻기 위해 술을 마시기에 취했다는 그 결과를 자타에게 인정시킬
필요에서 주정을 하게 된다고 볼 수가 있다.
결과는 과정 끝에 있는 '점'이요, 과정은 그 결과에 이르는 '선'이다. 가급적 선을
생략하거나 단축하거나 비약해서 점을 얻으려는 것이 결과주의요, 주정은 바로 이
'점'의 인지인 것이다.
우리 고전소설 가운데 연애 요소가 희박한 것은 연애는 과정이지 결과가 아니기
때문에 그 '선'을 단축시키거나 소외시켜 '점'으로 직결하려는 의식구조에 부합하려
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우리 고전소설 가운데 연애소설하면 "춘향전"을 연상하게 된다.
여타의 소설보다 연애요소가 가장 많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춘향전"을 굳이
어떤 범주 안에 분류한다면 연애소설의 범주 안에 분류한다면 연애소설의 범주에
넣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도령이 남원 광한루에서 산책하다가 그네를 뛰고 있는 춘향이를 보고 연정이
싹튼다. "춘향전"이 연애소설이려면 첫머리에서 싹튼 이연정이 '점'으로써 결실하는
대목은 적어도"춘향전"의 후반부에 있어야 한다. 그러해야만 이 '선', 곧 연애가
개입할 여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한데 "춘향전"은 이 '선'을 가능한 단축하고 가급적
배제하려는 방향으로 꾸려지고 있다.
광한루에서 책방으로 돌아온 이도령은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의 그 작은
과정마저도 못 기다려 방자를 데리고 애를 태운다.
해가 어찌 되었느냐. 해 아직 멀었소. 애고 얘 날 죽인다. 채질 급히 해달라고
희화(요임금님 때 천문을 관장했던 벼슬아치들)에게 부탁할까. 해 어찌 되었느냐. 해
아직 멀었소. 애고 얘 날 죽인다. 활로 쏴 달라고 유궁(고대 하의 나라 이름)
예(활을 잘 쏘아 왕위에 오른 사람)에게 찾아갈까. 이제 당신도 염치 없이 해말은
속에 두고 밥재촉하듯 어찌 되었느냐. 아직 멀었소. 어찌 되었느냐. 아직 멀었소.
허허 흉한 일이로다. 그렇게 더디 가면 과부(옛날 해그림자를 쫓았으나 미치지
못하고 죽은 사람)는 고사하고 앉은뱅이도 따라가겠다.
이렇게 해지는 '과정'마저도 못 기다려 초조하다가 날이 어두워지자 통인, 방자
등불 들려 앞세우고 춘향집으로 직행을 한다. 춘향이 거처하는 별당으로 들어가,
'사랑 사랑이야 무수히 이룬 후에 벗기기'로 든다.
곧 춘향이를 처음 본 그날 밤에 '점'을 얻고 만다. '선'이 개입됐다면 그토록
희화와 예까지 동원하면서까지 초조하게 단축시키려 들었던 한나절에 불과하다.
그렇게 '점'을 초반부에서 얻어버린 "춘향전 "은 어디까지나 수절 소설이지
연애소설이라기에는 구성상 허점이 많다. 이처럼 우리 고전소설에서 연애요소가
증발된 데는 연애가 과정에서 요소로서 결과의식에 배치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한국인은 관광도 결과주의로 한다. 설악산을 목적지로 하여 관광을 할 때
결과, 곧 '점'은 설악산이 된다. 과정주의로 관광하는 사람이라면 비록 목적지가
같은 설악산일지라도 설악산까지 이르는 과정, 이를테면 관동의 경치라든지 동해의
풍광, 도중에 있는 고적이나 사찰을 열심히 관광을 하면서 간다. 곧 과정관광의
비중을 결과관광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크게 둔다. 이에 비해 설악산이 점으로서
설정된 이상 그에 이르는 선은 짧을수록 없을수록 좋다. 그러기에 그 선을
무화시키기 위해 코를 골고 졸거나 술을 마심으로써 읊거나 뛰거나 하여 선 감각을
둔화시키려 든다. 우리 한국 관광버스를 들여다 보면 십중팔구는 속에서 깡충깡충
뛰고들 있는데 예외가 없다. 과정을 무화시키기 위해 피나는 노동을 하고 있다는
셈이다. 그리곤 오로지 설악산이란 결과를 향해 돌진을 한다.
수년 전 미국에서 나오다가 하와이에서 비행기를 갈아 타고 오스트레일리아를
가게 된 적이 있었다. 콴타스란 여객기에 올라타자 기내방송이 나오는데 이 비행기
어디어디가 고장이 나서 다섯 시간 연발을 한다는 것이었다. 보세 지역에서 짜증을
내며 권태로운 다섯 시간을 기다렸다가 올라 탔다.
이 여객기는 남태평양의 풍광 좋은 피지 섬의 난다 국제공항에서 급유를 하고
오스트레일리아로 가게 돼 있었다. 예정대로 난다 공항에 도착하자 마자 또 기내
방송이 있었다. 이 비행기의 수압장치에 고장이 생겨 다시 열한 시간이나
연발한다는 것이었다.
하와이에서 다섯 시간 기다렸던 짜증까지 복합되어 홧김에 와이셔츠 자락을 잡아
젖힌 것이 단추 서너 개가 떨어져 나갔던 것이다.
그런데 3백여 명 타고 있는 그 여객기 안에서 화를 내고 있는 것은 오로지 나
혼자 뿐이었다. 연발한다는 기내 방송이 끝나기가 바쁘게 그 모든 여객들이 환성을
지르며 기뻐 날뛰는 것이었다.
휘파람을 부는 사람, 만세를 부르는 사람, 지나다니는 스튜어디스를 붙들고 키스를
하는 사람 등등 환희의 수라장이 돼 버린 것이었다.
연발한다는 기내 방송에 나와 나를 제외한 모든 승객간에 정반대의 엇갈린 반응이
순발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미쳤거나 나 아닌 다른 승객들이
집단적으로 미쳤거나 어느 한편이 미쳤다고 하지 않고는 이 정반대된 반응이
해석되질 않는다.
그들이 기뻐 날뛴 이유는 간단했다. 일부러라도 거금을 들여 관광하러 왔어야
했던 피지 섬, 열한 시간 연발로 공짜 구경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 어찌 아니
기쁘겠는가.
나를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누구라 기다려 주는 사람도 없고 또 직업상 꼭 시간
맞추어 갈 일도 없는 나였다. 곧 여행의 '결과'를 제한된 시간에 취득해야 할 아무런
강제적 여건도 없는 터인데 왜 그렇게 '결과'얻는 것이 지연된다 해서 화를 내고
짜증을 내야 했던가. 한국인의 결과의식이 무의식 중에 발로된 때문일 것이다.
여행의 결과보다 여행의 과정을 중요시하는 인종과는 순발적인 반응이 이렇게
정반대로 달라질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한국인이 행락의 결과를 얻으면 그 결과를 배경으로 하여 기념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것은 그 관광결과에 너무 집착했기에 발생되는 '결과 사유화'의 소치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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