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그외 정보/버릇

공짜 좋아하는 버릇-덤

by Healing New 2020. 9. 26.

  구체적으로 내 것이 아니면 그리고 구체적으로 손으로 잡을 수없는 내 것이 
아니면 한국인에게는 공것이다. 공공의식이 박약한 한국에서는 공것은 공것이 된다.

  요즈음만큼 고학에 혜택받지 못했던 수복 직후의 서울 학생들간에는 손수레에 
소금 가마니를 싣고 다니는 소금 고학이 유행했었다. 시민들한테는 '학생 
소금장수'로 동정을 받았고, 여대생들한테는 '짠 학생으로'으로 멸시 당했으며, 소금 
고학생들끼리는 '소금 인생'으로 자존, 동정과 멸시에서 자구했던 것이다.
  나는 그 소금 인생 가운데 하나였다. 그 소금 인생 가운데서도 실패한 소금 
인생이었으며, 그 실패한 이유가 나 자신에게 있었기보다 한국인의 한 일상성의 
습속이 나의 최초의 빈곤한 인생의 출발을 좌절시킨 것이므로 지금도 뼈저리기만 
하다.
  손 종을 달랑거리며 소금 수레를 끌고 골목을 누비면 아주머니들이 자루나 
바구니를 들고 나온다. '학생 소금장수구먼.'하며 더러는 혀를 차고 동정을 하곤 
한다. 한데 이 동정하는 부처님 같은 얼굴은 흥정을 하기 시작하면서 냉혈귀의 
얼굴로 돌변해 버린다.

  외빼기, 쌍빼기의 부기법
  소금맛 좀 본다고 각기 손바닥에 담을 수 있는 최대 분량을 퍼들고 맛을 본 체 
한다. 그 맛보기 소금을 모른 새 아는 새에 아주머니들이 들고 온 자루 속에 집어 
담는다. 한국인의 '덤' 의식이 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소금 가마니를 도매상에서 떼어 올 때 그 분량은 평승, 곧 깎아서 말로 되어 온 
것이다. 한데 아주머니들은 더 이상 올라갈 수 없을 만큼 고봉으로 얹어서 되어 
담는다. 어떤 아주머니는 고봉으로도 성이 차질 않아 손바닥으로 눌러 대기까지 
한다.
  이렇게 눌러 '덤'이 뒤따른다. 그러고서도 그지없는 이 덤의식은 멎지 않고 '덤이 
있어야 하지 않나' 하며, 한두어 주먹 더 집어 담는다.
  이처럼 맛덤에 눌러덤, 고봉덤, 진짜덤의 4단계 덤을 감당하고 나면 수지가 맞을 
턱이 없다.
  이 소금 파는 과정의 중첩된 덤은 예부터 관례가 돼 있었던 것같다. 왜냐하면 
도매상에서 소금을 떼어 올 때 이덤을 감안, 열 말값에서 한 말 값을 덤빼기라 하여 
감해 주는 것이 관례가 돼 있었기 때문이다. 개성 상인의 전통적 부기법에 '외빼기', 
'쌍빼기'라는 한국적인 관습적 부기법이 있었다 한다. 소금, 곡식 같은 됫박으로 
되어서 매매하는 물품을 소매상에게 도매할 때는 그 분량의 10분의 1이 덤으로 
나갈 것으로 간주, 그 값을 받지 않는 것이 외빼기요, 10분의 2를 덤으로 간주, 
계산하는 것이 쌍빼기인 것이다.
  외빼기, 쌍빼기라는 상거래 습속이 제도화돼 있었다는 것은 한국인에게 얼마나 덤 
의식이 강하며 그 덤 습속이 보편화돼 있는가의 단적인 증거랄 수가 있겠다.
  '소금 인생'으로서의 나도 이 외빼기 혜택을 받았던 것인데도 소매과정에서 너무나 
왕성한 '덤'의 범람으로 나의 소금 인생 석달 만에 밑천인 리어카 값마저 날리고 
말았던 것이다.

  새우젓 장수와 '덤통'의 의미
  옛날 시골에 돌아 다니는 새우젓 장수는 지게에다가 양철통 두 개를 엮어 지고 
다니게 마련인데, 그 양철통 가운데 하나를 '덤통'으로 불렀던 것이다.
  본통에는 양질의 육젓만을 담고 덤통에는 저질의 젓국물만을 담는다. 그리하여 
젓을 팔 때 덤통 젓을 덤으로 주어 한국인의 강인하고 끈질긴 덤 의지를 충족시켜 
주었던 것이다.
  곧 상거래에 있어 이 '덤통'을 필연케 한 한국적 상황에 주의하게 된다. 옛말에 
사나이가 시원찮고 뼈대가 약하면 '저 놈은 덤통 국물로 만들었나.'하는 외설적인 
속담이 있었을 정도로 덤통의 전통은 면면했던 것이다.
  건고등어 같은 소금에 절인 염어는 이미 배때기에 새끼 한 마리씩 덤으로 기워 
파는데 덤이 하나일 때는 '외동 덤', 두 마리일 때는 '남매 덤', 그리고 그 덤 새끼가 
어미만큼 클 때는 '서방 덤'이라 불렀던 것이다.
  이처럼 공것 좋아하는 한국인의 생리는 덤 말고도 영어나 여느 다른 외국말로 
옮길 수 없는 소위 '공짜 명사군'을 이루고 있다. 에누리, 우수리, 떨이, 사구려를 
비롯, 이사턱, 승진턱 하는 '턱', 그리고 이름도 아름다운 '인정'도 인정을 빙자하고 
요구한 덤명사다. 옛 관료층에서는 '복전'이라는 공짜가 있었는데 결재 서류에 짐 한 
짐을 형용하는 '복'자를 써 반려함으로써 요즈음 급행료를 공공연하게 요구했던 
것이다.
  이 문화적 덤과 공짜 좋아하는 유전 체질이 오늘날 상가의 쇼윈도에 실감 있게 
투영되고 있는 것이다. '반값 봉사, 폐점 대매출, 몽땅 세일, 얹어 세일, 원단 값만 
주세요, 무조건 1천원, 본전이 아깝습니다, 와! 싸다, 그냥 갈 수 없잖아요, 
언밸런스'하는 외래어까지 '공짜 명사군'에 도입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우리 한국인의 공것 좋아하는 성향은 우리 속담에도 잘 나타나 있다.

  속담에 나타난 '공짜 명사'
  '공것이면 어찌 무당 서방뿐이랴' '공것이면 양잿물도 마신다' '공술 한 잔 보고 
십리 간다' '공짜라면 당나귀도 잡아먹는다' '공것에 눈도 벌겅 코도 벌겅' 하는 등 
적지 않다. 심지어는 '벌도 덤이 있다'는 속담까지 있으니 그지없다.
  한 한국인 교포가 미국에서 야구 구경 중 오한이 나기에 때마침 이전에 진료를 
받은 일이 있는 미국인 의사가 곁에 있어 상담을 했다. 바로 돌아가 아스피린을 
먹고 빨리 자도록 충고를 받았다.
  그런 일이 있은지 수일 후 이 의사로부터 상담료로 10달러의 청구서가 왔다. 
한국인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고 해서, 역시 지면이 있는 미국인 
변호사에게 그 지불 여부를 물었더니 지불하도록 충고를 받았던 것이다. 그 
10달러를 보내고 나니 이번에는 바로 그 변호사로부터 10달러의 청구서가 온 
것이다. 약간 과장된 이야기이긴 하나 미국에서는 이만한 전문가의 지식이나 정보를 
얻는데 공짜라는 것이 없다. 지식과 정보는 공기나 물처럼 공짜로 얻는 것처럼 여긴 
한국인과는 원천적으로 다르다.
  더러는 구미 사회에 철저한 팁의 생리가 덤이나 공짜와 같은 것이 아니냐고 
의심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봉사에 대한 정당하고 응분의 보수인 것이다. 
  영국에서 택시를 타면 대체로 10퍼센트 내외의 팁을 주게끔 돼있다. 관례대로 
응분의 10퍼센트를 주면 '댕큐 베리 머치'라고 감사해 하고 응분의 액수보다 좀 
적게 주면 '댕큐'만 하고 '베리 머치'를 생략한다고 한다. 액수에 따라 감사도가 
짙거나 묽어진다는 사실을 빗대어 현저하게 적게 주면 댕큐의 댕도 생략, 큐라고만 
한다는 우스개 이야기도 있다. 문제는 응분의 액수보다 많이 준다고 감사도가 
높아지질 않는다는데 있다.
  곧 20퍼센트를 주면 '댕큐 베리 머치'보다 덜 감사한 '머치 어블라이지드(much 
obliged)'란 말을 듣게 된다. 이 말에는 그러해서는 안 될 일을 하는 질서의 
파괴자라는 약간의 경멸의 뜻이 내포된 그런 감사의 말이라는 것이다.
  이 팁을 둔 운전사의 감사 농도는 곧 응분 이상의 덤도 거부하고 응분 이하의 
에누리도 거부하는 덤과 공짜의 거부 생리를 적절히 나타내주고 있는 것이다.

  구미에선 응분 이상 싫어하고
  구미 사람들은 응분보다 비싼 것도 싫어하지만 응분보다 싼 것도 비싼 것 이상 
싫어한다. 우리 한국인이 물건을 살 때 가치 기준이 덤과 에누리라면 구미인들의 
가치 기준은 그 값의 리즈너블(reason-able) 여부다.
  그 물건의 성능, 사용 연한, 외견과 가격이 비싸지도 싸지도 않고 사는 사람 
쪽에서 봐 납득이 갈 뿐 아니라 파는 쪽에서도 손해가 가지 않는 값을 
리즈너블하다고 한다. 곧 매매 쌍방에서 봐 비용과 효과가 균형을 잡았다고 볼 때 
그들은 구매 욕구가 가장 왕성해진다.
  국어 사전에 보면 공것, 공짜의 어원을 '공'에 찾고 있다. 응당한 가치나 노력이 
결여된 곧 빈 것이라는 뜻일 게다. 한데 '공'에서 비롯된 것일 거라는 이설도 있다.
  한자 풀이의 성서랄 "설문"을 보면 '팔'은 배반한다는 뜻이요, '사'는 사의 옛 
글씨라 했다. 곧 사를 배반하여 평분한다는 뜻이다. 이를 재산에 투영하면 나의 
사유 재산 아닌 공유의 것이 곧 공것이 된다.
  구체적으로 내 것이 아니면 그리고 구체적으로 손으로 잡을 수 없는 내 것이 
아니면 한국인에게는 공것이다. 공동의식이 강한 나라에서는 공적인 물도, 공기도 
그리고 손에 잡히지 않는 시간도, 지식도 모두 돈, 곧 가치화하는데 공공의식이 
박약한 한국에서는 공것은 공것이 된다.

  농경 사회의 정신적 유산
  극복해야 할 공것 생리의 뿌리가 아닐 수 없다. 반면에 공것 좋아하게 된 
한국인의 문화 생리는 비타산의 인정을 미덕시했던 농경촌락 사회의 정신적 
유산이기도 하다. '인정'이란 말이 요즈음 촌지나 금일봉 같은 공짜 명사가 돼 
있었다는 사실이 타산적, 경제적 노예가 아니었던 한국적 인간주의의 명쾌한 증명일 
수도 있는 것이다. 곧 잘 사는 사람은 못 사는 마을 사람에게, 잘 사는 친척은 못 
사는 친척에게 타산하지 않는 재산 유통을 했으며, 따라서 비타산의 가치관이 
공것이나 덤을 주고받는 것을 악덕시하지 않았기에 이 같은 문화 생리가 형성 
조장됐음직도 하다.

'그외 정보 > 버릇'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다리지 못하는 버릇  (0) 2020.09.26
형식갖추기를 좋아하는 버릇  (0) 2020.09.26
사진찍기 좋아하는 버릇  (0) 2020.09.26
매사에 서두는 버릇  (0) 2020.09.26
편리함만 추구하는 버릇  (0) 2020.09.26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