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에 폭설이 왔다는 뉴스를 듣다가 갑자기 구봉서의 코미디가 나오는가 하면
"함께 춤을 추어요"하는 노래가 나온다.
어느 일요일, 집에 들어박혀 아이들이 노는 것을 유심히 본 적이 있다. 일부러
보려 했던 것이 아니라 유심히 봐주지 않을 수 없게끔, 노는데 일정한 계속성을
지녔기에 주의를 끌었다는 편이 옳을 것이다.
야구한다고 글러브와 방망이를 갖고 나갔던 놈이 30분도 못 되어 돌아왔다.
친구를 불러내는 시간 또 오가는 시간을 제외하면 겨우 15분도 못 놀았다는 계산이
된다. 돌아와서는 모형만들기 공작을 한다.
그 역시 15분 남짓하고는 턱을 괴고 엎어져 텔레비전을 본다. 대체로 어느 한
행동을 두고 15분 이상을 지속한다는 법이 없이 잘도 표변했다. 이것을 눈여겨 보고
나니 어느 한 소문난 과외 선생의 이야기가 생각이 난다. 왜 자기가 인기가 있고 또
과외 공부에 효과를 올리고 있느냐의 비결은 대체로 지속성이 없는 요즈음 아이들의
보편적 개연성을 감안, 공부시키는 내용을 15분 혹은 15분의 배수인 30분 단위로
바꿔 가르친다는 것이다. 15분 단절의 만화경 교육이 요즈음 아이들의 체질에 맞고
권태를 덜어주며 의욕을 돋운다는 것이 된다.
이 15분주의 촉매제로서 60년대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나라 프로가 15분 단위로 편성되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며 그 2단위로써
30분, 4단위로써 1시간, 이같은 단위로 모자이크처럼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15분간
뉴스를 시청하고 30분짜리 홈 드라마를 본다.
설악산에 폭설이 왔다는 뉴스를 듣다가 갑자기 구봉서의 코미디가 나오는가 하면
"함께 춤을 추어요" 하는 노래가 나온다.
이같은 15분주의의 구별 감각과 구별 능력이 있어야만 비로소 텔레비전이라는
맹물과 접할 수가 있게 되어 있다. 바꿔 말하면 15분마다 단절되어 내용이 백팔십도
전환하는 체내 시계가 생리적으로 체질화되었다 할 것이다.
하지만 쿼터리즘(15분주의)이 체질화된 원천적인 이유는 한국인이 과정에
성숙하지 못하고 결과에 집착, 그 결과를 빨리 얻으려는 한국인의 의식구조도
공모하고 있다고 본다.
이같이 15분 간격의 체내 시간을 속에 품고 있는 현대인은 활자를 읽는데도 15분
벽을 넘는 것에는 지루한 감을 갖게 되었다.
요즈음 짤막한 에세이류가 번지고 또 많이 읽히는 이유도 이 15분주의 때문이며
단편소설도 자꾸만 짧아지는 성향이 있다 한다.
"전쟁과 평화"나 "상록수" 같은 대하소설을 읽는 독자가 줄어든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할 것이다. 신문의 독자 조사에 의하면 한국인이 평균적으로 조간신문을
접하는 시간은 15분 전후라 한다.
잡지도 2백자 원고지 1백 메가 넘는 대논문을 게재한다는 것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길어야 15분 안에 독파될 수 있는 20매 안팎인 것으로 메워지고 있음을
본다.
활자뿐 아니라 영화도 그렇다. 영화산업이 사양길을 걷는 이유도 텔레비전의
보급을 들고 있으나 그 밖의 이유로써 현대인이 두 시간 남짓한 길이의 영화를 봐낼
시간적 지속의 감상력을 상실했다는 것을 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짤막하게
하여 동시 두 편 상영인 동시 세 편 이상 상영이 유행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에
있다고 본다.
비단 문화 분야 뿐만 아니라 오락 분야도 이 쿼터리즘 전염이 심하다. 볼링도 한
사람 게임당 15분이며, 게임 이론에서 아무리 흥미 있는 것이라도 15분 넘기지 않는
것이 상식이라 한다. 유원지의 전문가들에 의하면 회전 목마니 비행기니 각종 타는
놀이의 소요 시간은 5분 이상 경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
짧게 단절한 것이 아니라 5분 넘으면 권태를 느끼기 때문이라 한다.
화투놀이도 옛날에는 '육백'이라 하여 한 게임 끝나는데 길어지면 30분도 더
걸렸는데, 요즈음은 '뻥'이라 하여 5분도 안 걸린다. 5분도 못참아 '섯다'로 승부를
낸다. 마작도 요즈음은 단판으로 승부를 내는 게 상식이 돼 있다 한다. 비지니스
세계로부터 레저 세계에 이르기까지 현대는 쿼터리즘 일변도다.
이런 시대이기에 시간적인 지속을 지닌 사람이 예의적인 위인으로서 우러름을
받는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수년 전 치체스타 경이 혼자서 요트로 세계일 주를
감행했다는 것은 분명히 위대한 일이긴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그 오랜 '시간'을
감내했다는 사실에 대한 무언의 감탄이 내포되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현대 우리
사회는 시간적 지속력이 일반적으로 저하할수록 가치를 부여하는 이상한 세상이 돼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이 촌단된 시간을 각박하게 산다는 것이 눈앞에 어른거리다 사라지는
것들 뿐이요, 결과적으로는 소득도 없고 또 시간의 충실도란 의미의 인생에서
보람도 못 얻고 마는 그런 낭비의 계속인 것이다. 결국 인생은 가급적 잘게 짤라
소비해 버리는 것이다. 인생을 위해 저축하는 행위가 아닌 것이다. 옛 공장들은
불상 하나 만드는데 10년 공들이고 10년 조각을 한다지 않다던가.
10년 후를 못 바라볼지언정 최소한도 1년이나 2년에 걸치는 지속된 틀이 현대의
우리에게 바람직하다고 본다. 현대를 지혜롭게 살아내는 지성의 노력 가운데
하나로서 이 쿼터리즘의 극복이 그 무엇보다 선행돼야 할 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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