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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외 정보/버릇

속과 겉이 다른 한국인

by FraisGout 2020. 9. 30.

  그것을 자제하지 못할 만큼 격양되면 싸울 생각을 뒤로 미루고 상대방의 입을 
틀어막든지, 잠시 휴전을 하든지 하여 내부의 일을 철저히 외부로부터 안전보장을 
한다.

  1890년 상해에서 간행된 아서. H. 스미스의 "중국인성구조"에 중국 사람들의 
부부싸움에 대해 흥미 있는 관찰을 하고 있음을 본다.
  언성을 높여 싸우면서 서로가 집 밖에 오가는 행인이 있나 없나를 열심히 넘나 
본다는 것이다. 자기에게 유리한 판정을 해줄 만한 어떤 아는 사람이 지나가고 
있으면 달려나가 이 행인을 끌어들여 자기 입장을 구구히 설명하고서 누가 옳고 
그르고를 판단해 줄 것을 요구한다. 비단 전혀 지면이 없는 행인일지라도 이 집안 
싸움에 개입을 강요받으며, 또 개입해서 판단해 주는 것이 관례가 되어 있다고 했다.
  만약 아내에게 불리하고 억울한 판단이 내려지면 아내는 아내 나름으로 다른 
행인을 끌어들여 자기의 입장을 설명한다. 이렇게 외부 사람들을 끌어들여 편싸움이 
되고 이 편싸움을 판단하는 제삼자를 다시 끌어들이는 경우도 있게 된다.
  이같은 중국 패턴의 부부싸움은 집을 둔 내부의 일을 외부에 공개하는 것이요, 또 
내부의 일에 외부를 끌어들이는 그런 내외의 소통이 어떤 장해없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 된다.
  인도에도 이 집을 둔 내부와 외부의 차단이 별로 심하지가 않다.
  불교성지가 집중적으로 모여 있는 인도 비하르지방을 보름에 걸쳐 여행하는 동안 
필자는 온 마을의 부녀자들이 한 집에 모여 집단싸움을 하는 것을 두 번이나 
목격했었다. 보름 동안에 두 번이나 목격했다는 것은 인도 사회에서는 이같은 
부녀자의 집단싸움이 자주 있다는 것을 뜻한다.
  호기심이 나서 들어가 왜들 이렇게 싸우냐고 물어 봤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고부싸움이라는 것이었다. 고부싸움이면 단둘이 싸울 일이지 
왜 온 동네 부녀자가 난투를 벌이는 건가 하고 물었다.
  인도 농촌에 있어 시어머니와 며느리싸움은 거의 집단싸움이게 마련이며 
집단싸움이 안 되는 고부싸움이란 오히려 이례적인 것이라 했다.
  맨 처음 어느 한 집에서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싸움이 붙는다. 그럼 고함소리가 
난다. 그 고함소리는 이웃집들에 전파된다. 이 고부싸움소리를 들으면 인도 
부녀자들은 본능적인 조건반사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무슨 일을 하고 있든간에 
일손을 멈추고 이 싸움을 하고 있는 전장으로 달려 간다는 것이다. 가서 그 시비를 
듣기 전에 옆집 시어머니들은 쌈한 집 시어머니 편을 들고 옆집 며느리들은 쌈한 집 
며느리 편을 든다. 이렇게 제일단계의 집안싸움으로 에스컬레이션을 하면 그 
고함소리가 더 커진다. 그 커진 고함소리가 온 동네에 미친다. 온 동네의 
부녀자들이 그 고함소리에 조건반사 현상을 일으킨다.
  이같이 해서 삽시간에 온 동네의 시어머니 대 며느리의 고부전쟁이 되어 버린다.
  이처럼 집을 둔 내부의 종적인 구조보다 집 밖으로 유대되는 외부와의 횡적구조가 
중국 사람이나 인도 사람에게는 강한 편이다.
  이에 비해 한국의 부부싸움이나 고부싸움을 견주어 보자.
  문을 걸어 잠그고 들창을 내리며 심지어는 홑이불로 문이나 창을 가린 다음 쌈을 
한다. 외부 공간과 차단시켜 놓고서 다툰다. 가급적 언성도 죽임으로써 목소리가 
밖에 새어 나가지 않도록 하면서....
  그러기에 허스키, 소프라노는 아주 별난 음성으로 싸운다. 격앙되어 목소리가 
커지면 서로 "쉿!" 하며 주의를 주면서 싸우거나, 그것을 자제하지 못할 만큼 
격앙되면 싸울 생각을 뒤로 미루고 상대방의 입을 틀어막든지, 잠시 휴전을 하든지 
하여 내부의 일을 철저히 외부로부터 안전보장을 한다.
  싸움하는 도중 손님이 찾아 오면 칼로 자르듯이 싸움을 멈추고 언제 싸웠냐는 
듯이 생글생글 평소처럼 손님을 맞고 용무를 마친다. 인사를 다 차려 보내놓고 
나서는 문을 잠그고 삿대질을 하며 다시 재개를 한다. 이처럼 한국인은 집 밖의 
외부를 내부로부터 완벽하게 차단한다.
  이처럼 외부와 내부의 완벽한 차단은 외부=표. 내부=이의 외중구조를 뜻하며, 이 
표리의 이중구조는 한국인의 사색구조의 기본 패턴이랄 수가 있다. 중국 사람이나 
인도 사람이 집안싸움을 손쉽게 집 밖에 공개시키는 것은 표리가 단일구조로 되어 
있다는 증좌랄 수가 있다.
  한국인의 마음의 특성을 이해하는데 이 표리의 이중구조는 중요한 기본 공식이랄 
수가 있다.
  집의 구조 자체도 이 표리성이 완연하다. 구미의 집들은 집의 내부와 외부를 
차단하는 담이 큰 구실을 못하고 있다. 차단 구실보다 여기서부터는 우리 땅이라는 
일종의 영역 표시에 불과하다. 그러기에 사람이나 개가 넘어다닐 수 있을 만큼 
나지막하게 나무토막을 박아 놓은 것이 고작이다.
  곧 집 안과 집 밖이 차단없이 연결되어 있다. 이에 비해 한국의 담은 외부와 
내부의 완벽한 물리적 차단이다. 돌담을 쌓거나 벽돌담을 쌓거나 하여 표리표시를 
선명하게 한다. 대문도 크게 단단하게 하여 안에서 고리를 걸고 빗장으로 완벽하게 
폐쇄한다.
  한국인은 일단 문안에 들어오면 표인간에서 이인간으로 표변을 한다. 표인간의 
차림인 신발도 벗고 양말도 벗으며 표복장을 벗고 이복장으로 갈아 입는다.
  구미인은 집에 돌아와도 신발을 벗지 않고 옷도 침대에 들어갈 때까지는 집 
박에서 입었던 그대로다. 곧 표인간이 이인간으로 돌변한다는 법 없이 단일 
차림으로 집 밖이나 집 안에서 산다.
  지금 한국의 대부분의 주택이 양옥구조로 개조되고 있다. 어쩌면 도시인구의 약 
70퍼센트 이상이 양옥에서 산다 해도 대과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양옥이 갖는 표리없는 단일구조는 한국인의 의식구조가 용납치 않아 
표리구조로 변형시켜 놓고 있다. 이를테면 영역표시에 그치는 양옥의 담을 그대로 
도입한 한국의 양옥은 없다. 모두가 물리적 차단이란 전통적 담을 쌓고 산다. 또 
양옥의 기본구조인 신을 싣고 집 안에서 사는 그런 한국의 양옥은 거의 없다.
  잠자고 밥먹고 옷입고 사는 이 의식주는 한국인에게 있어 '이'의 공간에서 
영위되어야 한다. 그러기에 표로부터 차단되어야 하고 표의 공간에서의 영위는 
본능적인 거부반응이 일어난다.
  가족끼리 밥먹고 있을 때, 손님이 오면 밥을 먹다 말고 마치 밥먹는 것이 무슨 큰 
과실이나 죄짓는 일처럼 반사적으로 밥상을 치운다. 반찬이 없어 남보기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표' 범주가 손님에게 노출된 데 대한 충격 때문에 그같은 
조건반사가 일어난 것이다.
  동남아의 길거리를 걸어 보면 사람의 왕래가 심한 길거리에서 온가족이 밥을 먹고 
있는 광경을 흔히 볼 수가 있다. 프랑스를 비롯 남부 유럽 지방의 길거리에는 
카프레리아가 준비되고 있다. 그 길에 앉아 식사들을 한다. 해방 수 미국의 
지아이(GI)들이 상륙했을 때, 우리 한국민에게 이질감을 주었던 요소 가운데 하나로 
길 가면서 빵을 먹고 콜라를 마시며 껌을 씹는 행위였다.
  한국 사람은 길거리는커녕 남이 보는 앞에서 뭣을 먹고 하는 것은 부덕이었다.
  비단 음식뿐만이 아니다. 구미 사람들이 잠자고 난 자리를 그대로 두어 두는데 
비해 한국인은 이부자리를 반드시 개어 벽장에 넣어 둠으로써 잠잔다는 '이' 범주의 
흔적을 말소해 버린다. 이불잇이나 베갯잇 등 이부자리의 빨래는 반드시 '이' 요소가 
철저히 보장된 공간인 뒤란에다 말려야 했던 고로 이 '이' 물건의 '표' 공간에의 
방기는 그 방기 공간에 따라 뜻이 달랐다.
  '이' 공간인 뜰에 베개를 버렸을 경우는 아내를 친정에 내쫓는다는 남편의 
의사표시요, 담 밖인 '표' 공간에 버렸을 경우는 아내와 이혼한다는 남편의 단호한 
의사표시인 것이다. 곧 돌이킬 수 없는 부부사이의 절연을 그들이 은밀히 베고 
잠자던 이중이 요소인 베개를 표 공간에 노출시키는 것으로 나타냈다는 것이다.
  이같은 한국인의 표리구조와 미국인의 단일구조는 인간관계의 밀도에도 차이를 
있게 한다.
  한국 사람은 이 공간에 사는 폐쇄된 사람끼리 종적인 인간유대가 강한 반면에 
미국 사람은 표 공간에 사는 공개된 사람끼리의 횡적인 인간유대가 강하다.
  미국의 경우 부부본위, 어른들 세계, 어린이들 세계, 젊은이들의 세계가 각기 
독립적인 것으로서 분절되어 있다. 곧 이 가족구성의 종적인 유대가 약한 반면에 
어른들은 어른들끼리 파티를 통해, 젊은이들은 젊은이들끼리 데이트를 통해, 
어린이들은 코리구라는 구겨 집단을 통해 횡적으로 사회에 연결되고 있다.
  한국인은 조상--조부모--부모--나--형제--자매--아들의 종적 유대가 강한 
반면에 미국인은 집 밖의 평등한 동료들과 횡적인 유대가 강하다. 그러기에 
도덕이나 윤리도 한국인은 이 종구조의 가족 윤리가 발달하고 어떤 다른 윤리보다 
선행된 데 비해, 미국인은 횡구조의 공공윤리가 발달하고 어떤 다른 윤리보다 
선행된다.
  미국에서는 자기 부모를 상대로 한 소송사건이 해마다 늘고 있다 한다. 이를테면 
연전 "타임"지가 열거한 사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할머니가 조실부모한 손녀를 애지중지 기르면서 이 아이의 장래를 위해 착실히 
예금한 3만 달러의 통장을 물려주고 죽었다. 그 통장을 보관하고 있던 할아버지가 
긴요한 일이 있어 그 중 3천 달러를 찾아 썼다. 이것을 안 손녀는 할아버지를 
상대로 3천 달러의 청구소송을 내고 있다.
  또 다른 케이스.
  한 18세 된 청년이 부모들과 더불어 유원지에 놀러갔다. 그곳에서 다이빙을 
하다가 마침 그 다이빙한 자리의 수심이 얕아 팔에 부상을 입었다. 이 부상을 입은 
청년은 부모들이 이같이 위험한 곳이면 다이빙을 하지 못하게 주의를 주든지 
위험표시를 해놓든지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중과실죄'로 부모를 형사소송하는 한편 
5백만 달러의 배상 민사소송을 아울러 제기했던 것이다.
  흔하지 않은 이례적인 일일 것이나 이같은 소송이 가능하다는 모랄풍토만은 
인정해야 할 줄 안다. 이만큼 가족간의 종구조의 유대는 허약하기 이를 데 없다.
  이에 비해 한국인의 종적 윤리가 횡적 정의보다 얼마나 소중하고 선행되었던가는 
우리 역사상 빈번히 있었던 불고존장론에서도 역력히 찾아볼 수 있다. 
불고존장론이란 자기 부모나 상전 등 존장이 지은 죄는 알고 있어도 관에서 
이야기하지 않아도 되며 또 존장이 지은 죄를 관에서 강요하는 것이 오히려 죄가 
된다는 일종의 한국적 법이론이다. 죄는 색출 박멸해야 할 사회(표)의 적이다. 
그러나 가족(이)의 유대가 중요한 한국에서는 이 가족의 윤리적 유대를 파괴하는 
것이 큰 사건이요, 사회의 적이 번지는 것을 작은 일로 여겼기에 이같은 한국적 
법이론이 형성된 것이다.
  이를테면 조선왕조 숙종 11년 6월에 당시 좌의정 남구만의 상소문을 들 수 있다.
  당시 대흥산성의 병참용 은을 대량으로 도둑맞은 사건이 있었다. 용의자가 
잡혔으나 그 증거를 잡을 수가 없어 포도청에서는 그 용의자의 열두 살 난 아들을 
인치하여 공갈하며 그의 아버지가 은을 훔친 절차를 심문했던 것이다. 어린 
자식으로 하여금 아버지를 고발케 하여 참륙의 처형을 했던 것이다. 이 문제를 두고 
남구만은 '벽에 구멍을 뚫고 은을 훔치는 일은 극소사요, 아들로 하여금 아버지를 
적으로 만들게 한 패륜은 극대사'라 하고 이같은 처리를 한 포도청의 행위를 그려 
군수가 중한 줄만 알았을 뿐 천리강상이 중한지는 몰랐다 하여 포도대장과 
형조판서의 파면을 상주하고 있다.
  한국 법률의 본이 된 "대명률"을 보면 자손 처첩이 조부모, 부모, 남편을 관에 
고할 경우는 장 1백에 도 3년의 중형으로 다스리고 있다. 예외규정이 있는데 이 
고발도 대역이나 모반 등 국가 대사에 관한 일, 그리고 그의 어머니가 아버지를 
살해했을 경우는 이 중률에 해당되지 않는다.
  가정뿐만 아니라 회사, 학교, 노동조합 등 한국의 모든 조직사회는 종적인 구조를 
하고 있다. 여기에 한국 사회의 특징이 늘어난다. 
  이를테면 어느 한 회사의 과장은 다른 같은 과장 상호간보다는 자기 부하인 
계장이나 계원들과 보다 친밀한 관계를 갖는다. 곧 과장끼리라는 횡적 유대보다 
과장--계장--계원하는 종적유대가 보다 강하다. 이 친밀도나 유대력은 과장과 계장 
또는 계원이 지닌 직무나 직책 관계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것들을 떠난 인간적 관계에 의해 결집력이 생긴다.
  흔히들 젊은 사원들이 술집에서 술이 거나하면 '우리 과장은 나를 몰라준다.'고 
곧잘 불만을 토로한다. 몰라준다는 불만이 현대 한국 샐러리맨들에게 공통된 요소라 
해도 대과가 없다. 이 몰라준다. 곧 이해해 주지 않는다는 사항은 자기가 맡은 
직무에 관한 것이 아니다. 자기라는 인간 그 자체를 이해해 주지 않는 데 대한 
불만인 것이다.
  직장의 인간관계도 이처럼 의사가족적 관계로 맺어져 있다. 여기에서 직책이나 
직무상의 관계는 표관계요, 인간적 관계는 이관계다. 미국의 직장에서는 철두철미 
표관계 이외에는 어떤 다른 관계도 용납되지 않는다. 곧 표관계 일변도의 
단층구조를 하고 있는데 한국의 직장은 이처럼 이중구조를 하고 있다.
  문제는 한국의 직장이나 단체 등 조직집단에 있어 이 직무 직책 등의 표관계보다 
그것과는 아랑곳없는 인간적 이관계가 보다 큰 힘을 갖고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중요하다는 점이다.
  아무리 직책에 성실하고 직능에 유능하다 하더라도 인간관계가 소홀하거나 이 
종적구조에서 소외되면 그 사람은 그 집단에서 생존하지도 못하고 또 발전도 못하며 
끝내는 소외당해 버린다. 이관계와 표관계가 싸우면 꼭 이관계가 이기게끔 돼 있다. 
그래서 한국에 있어 유능한 관리자, 곧 윗사람은 유능한 스페셜리스트나 
엑스퍼트만으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표관계에서만이 유능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 유능에다 플러스 알파가 더 붙어야 유능한 윗사람일 수가 있다. 그 
알파는 마치 아버지나 형님처럼 인간적 인정적인 배려를 하는 인격의 
엑스퍼트이어야 한다.
  흔히들 개인과 친지와 타인과의 관계를 세 개의 동심원으로 곧잘 표현한다. 가장 
안에 있는 중심원을 '나'라 하고 중간층을 '친지', 바깥 원을 '타인'이라 한다면 
한국인과 미국인과의 차이는 다음의 도표와 같다.
  타인층은 나와 전혀 모르는 사람으로 사회관습에 따라 형식적이고 예의바르기를 
요구하는 그런 인간층이다.
  친지층은 가족이나 친척 또는 친구 등 친한 사이로 형식적이거나 예의로 접하는 
것이 좀 뭣한 인간적 인간층이다. 영국이나 미국 사람 같으면 미스터니 미세스 등 
호칭을 하지 않고 텍크, 보브, 앨리스, 낸시 등 애칭이나 별명이나 퍼스트 네임으로 
부를 수 있는 그런 사이다.
  이 나를 둔 두 개의 인간층과 나와의 사이가 실선과 점선으로 표시되어 있다. 
실선은 그 사이에 굳건한 성이 가로놓여 있다는 강한 경계를 나타내는 것이고, 
점선은 그다지 경계가 강하지 않고 서로 소통이 가능한 그런 소홀한 경계를 
나타낸다. 한국인은 친지와는 터놓고 살지만 타인과는 담을 쌓고 산다. 모르는 
사람은 어디까지나 모르는 사람이다. 만리 외국에 가서 한국인들끼리 만났을 때도 
한국 사람들은 웬만하면 서로 모른 체하고 지낸다. 이 장벽을 뚫으려면 어떤 
이니세이션 같은 것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누군가가 가운데서 소개를 하는 절차를 
거치거나 그것을 거치고도 술 한 잔 나눠야만이 타인층에서 친지층으로 수용시킨다. 
곧 그 경계로 하여 밖이냐 안이냐가 확연하고 선명하다.
  교환교수로 미국에 가 일 년 있었던 한 친구로부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다.
  그 친구가 일하고 있는 연구소 건물의 개축 계획을 대학본부에 제출할 단계에 그 
책임자가 청사진을 들고와 이 친구에게 묻더라는 것이었다.
  이 친구는 겨우 일 년 남짓 있다 갈 사람에게 의견을 묻는다 해서 책임있는 
회답을 할 수 있겠는가고 반문했더니 '일 년이 아니라 반년을 체재하는 일이 
있더라도 현재는 이 연구소의 멤버임에는 틀림이 없다. 멤버로 있는 이상 의견을 
말할 권리가 있는 것이다.'고 말했던 것이다.
  한국의 대학이 일 년 계약으로 체재하고 있는 외국인 교환교수에게 대학의 장래 
계획에 대한 의견을 상의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한국에 있어서는 타인도 
남인데 하물며 외국인은 철두철미 외국인인 것이다. 그러기에 외국인은 항상 경계 
밖에 놓아두고 그 속으로 끌어들인다는 법은 없다. 곧 나와 타인의 경계를 외국인은 
뚫지 못하게끔 안보를 한다. 외국인이 경계 내의 우리의 것, 이를테면 김치를 잘 
먹고 판소리를 하며 한복을 즐겨 입곤 하면 그것은 이상한 외국인으로 순수한 
외국인보다 오히려 더 별나게 본다. 이에 비해 미국인은 외국인일지라도 나와의 
경계가 허술하기에 교류가 수월하다.
  자기와 외부층과의 경계에 있어서는 거꾸로 한국인이 점선이고 미국인이 
실선이다. 달리 말하면 한국인의 자기는 친지에게 의존이 가능하기도 하고 또 자기 
안에 친지의 침입이 가능하다는 것이 되고, 미국인의 자기는 이것만은 양도할 수 
없는 영역으로 친지든 누구이든 타인에 대해 굳게 문을 닫고 있다는 것이 된다.
  한국 사람은 일단 친해지면 자타의 구분이 흐려지고 네것 내것에 구차하게 구분을 
하려 들지 않는다. 자신의 의사나 의견이나 결정이라는 것이 별반 큰 힘을 갖지 
못하고 그 친지들이나 공동체의 의견, 결정에 조화하려 든다. 외국인과 한국인 
사이에 곧잘 일어나는 오해는 이 차이에서 적잖이 비롯되고 있다.
  외국인과 친해진 한국인이 마치 한국인에게 하듯 외국인의 자기층에 침입하려 
했을 때 무자비하게 문을 닫고 밀어내 버린다. 그런 꼴을 당하고 나면 정이 뚝 
떨어지고 더 사귈 맛이 안 난다.
  필자의 아프리카 여행 때 CBS방송의 한 프로듀서인 미국인 부부와 같은 
차편으로 일주일 남짓 관광한 일이 있다. 그 부인은 고국에 두고 온 다섯 살 난 
아들놈 생각을 자주 하였고 필자도 다섯 살 난 아들놈이 있어 곧잘 그 동갑 또래를 
두고 이야기를 자주 나누었던 것이다. 이 공감인자 때문인지 부인과 나는 퍽 
친해졌으며 농담도 하고 또 서로 짐도 들어주는 다정한 사이가 되었던 것이다.
  어느 날 한 호텔의 선물가게에서 필자는 눈이 부리부리한 목각흑인 어린이인형을 
다서 살난 아들 놈을 위해 사면서 그 프로듀서 부인더러 이 선물을 아들놈에게 
사다주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했더니 이 부인, 갑작스레 표정을 굳히더니 
"그런 일까지 걱정해 주지 않아도 됩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 후부터 부인과는 말도 건네지 않았던 거이다. 한국 사람이면 그만한 권고쯤은 
친절로서 고맙게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미국 사람에게는 자기가 판단해서 해야 
할 자기층의 침해로 받아들이고 그토록 무자비하게 팽개쳐 버린다.
  사람을 가로의 시선으로 보고 평등하게 파악하는 경향이 있는 미국인은 
개인주의의 '개' 의식이 확고하여, 인격이 중심에 있는 자기의 프라이버시를 굳게 
지키며 상대가 누구일지라도 그 개체의 심층에 드는 것을 거부한다.
  양옥에 있어 개체의 방은 완벽하게 프라이버시를 보장해 준다. 그리고 문만 열면 
바로 사회와 직결된다. 가족이 모이는 식당이나 거실에 나가더라도 그곳은 사회의 
일부이며 반드시 사회에 나간 것처럼 옷차림을 단정히 하고 나간다. 한국인처럼 
거실이나 식당에 나간다는 법은 없다.
  곧 개체는 표문화에 직결된 데 비해 한국인의 개체는 이문화와 중화되어 표문화를 
단절시킨다.

  이같은 한국인의 표리구조는 퍼서낼러티 자체에도 표리층을 형성시키고 있다.
  '명실'이란 것이 그것이다. 명실이 상부한다느니 명실이 다르다니 하는 이 명실은 
바로 '표리'와 같은 개념의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 곧 명은 명분이나 체면 같은 
형식적인 요소요, 실은 본심 같은 실질적 요소이다.
  명은 '표'요, 실은 '이'다. 그러기에 명과 실은 한국인에게 있어 상부하는 경우보다 
상이하는 경우가 많다.
  많은 사람이 있는 '표' 공간에 있어서의 논리와 혼자 있을 때의 '이' 공간에 
있어서의 논리는 상반된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교실에서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알았습니까?' 하고 물었을 때 선생은 
모르는 것이 있더라도'예'하고 대답해 주기를 기대하고 묻고 있으며, 또 어린이들은 
모르더라도 알았다고 대답하는 것이 선생에 대한 '표' 논리의 예외로 알고 있기 
마련이다. 그러기에 모르면서도 '예!' 하고 대답한다. 표 논리에의 이 논리의 
희생이다. 미국의 어린이면 결코 그 표논리의 명분에 휩쓸린다는 법 없이 모르면 
모른다고 우겨대는 것과 대조적이다.
  이처럼 '명'에서 '실'을 희생하는 한국인은 회의나 공개토론에서 대체로 명분의 
노예가 되는 바람에 실을 상실하기 일쑤이고 그러기에 회의의 결과가 효과적이지 
못할 경우가 많다.
  이같은 명실의 이중 퍼서낼러티를 다음과 같은 역시 삼중의 동심형으로 도시할 수 
있다.
  이를테면 여기 내향성의 한 실업가가 있다고 하자. 그는 항상 혼자 있기를 
좋아하며 조용한 독서를 즐기는 그런 사람이다. 하지만 주간에 회사에서 일할 때는 
실업가로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외향성의 어떤 다른 남자와 다름없이 사교적이고 
활동적으로 일을 한다. 곧 주간의 그만을 보아 온 사람은 그가 내향성이라는 것을 
전혀 모를 지경이다. 이런 경우 이 실업가는 그의 역할(role)에 순응하기 위해 그의 
본성질과는 전혀 다른 가면의 행동을 한다. 이같은 외부공간과 접하는 퍼서낼러티의 
표층을 A층(role action)이라 한다.
  한 사회조사에 의하면 창녀들 가운데는 낮에 혼자 집에 있을 때는 얌전하고 
수줍어하는 여자가 예상과는 달리 비교적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짙은 화장을 
하고 옷을 갈아 입고서 거리에 서면 그 성질이 표변, 외향적인 난폭한 언행을 하고 
표독해진다는 것이다. 마치 배우가 역할이 주어졌을 때 그에 상부한 연기를 하듯 
한다는 것이다. 이같은 역할행동이 퍼서낼러티의 가장 겉층을 형성하고 있다.
  이같은 역할행동이 되풀이됨으로써 몸에 익숙해졌다고 하자. 창녀의 경우를 
실례로 들면 역할행동인 난폭한 언행을 하는 것은 특수한 장(situation)에서만 하는 
일이요, 본연히 자신으로 돌아왔을 때는 그것 때문에 마음의 가책을 받고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있는 느낌이 든다. 곧 표리의 이중행동층을 B층(Core peripheral 
personality)이라 본다.
  다시 이 역할행동이 보다 깊숙이 내면화하여 이제 역할이 본여의 영역까지 
지배했을 경우를 A층(Core nucleus personality)이라 한다. 다시 창녀의 경우를 
들면 이제 난폭한 언행을 특수한 장이 아닌 일반적인 장. 곧 본연의 장에서도 
서슴없이 하게 된다. 역할행동을 두고 가책이나 십자가로 느낀다는 법 없이 
일상화해 버린다. 곧 B층은 표리의 이중구조인데 비해 A층은 표가 리를 압도하여 
표--표의 단일구조화한다.
  민족이나 문화권에 이 역할행동을 둔 퍼서낼러티 형성이 달라진다.
  구미인은 역할행동이 A층으로 단일화한데 한국인은 역할행동이 B층으로 
이중화한다. 바꿔 말하면 표리화한다. 그러기에 한국인은 공적활동, 집단활동, 
사회활동, 외부활동 등 역할행동 때와 사적활동, 개인활동, 가정활동, 내부활동 
때와는 의사나 의견이나 주장이나 언행이 일관되지 않고 다를 경우가 많다. 곧 
표리가 다르다. 
  한국인을 이해하는데 있어 이 표리구조는 주요한 관건이 되며 이 관건을 
구조면에서 조명해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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